수탉이 짊어진 운명
권영상
새벽 4시. 그 무렵 나는 잠에서 깬다. 11시에 잠자리에 들건 자정에 들건 자다가 눈을 뜨면 어김없이 4시다. 이 일을 못마땅해 하지는 않는다. 몸 어느 한 부분의 나사가 풀렸거나 기름칠이 안 돼 그러거니 하며 편하게 받아들인다.
책 한 줄을 읽으려고 책을 펴는데 난데없이 수탉 우는 소리가 들린다. 몇 해를 여기서 살아왔지만 이처럼 가까이서 새벽 닭 우는 소리는 처음이다. 가만히 새겨들으려니 길 건너 파란 지붕집 닭이다. 그러나 잠깐! 그 집에 어린 닭이 있는 건 알지만 새벽에 마을을 향해 울어 젖힐 만한 수탉은 없다. 장날에 나가 수탉이라도 사온 건가. 그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암탉이면 모를까 수탉을 사올 리는 없다.
문득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그 집 어린 닭들이 커서 어른 닭이 됐으려나. 생각이 거기 이르자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그 집 마당을 헤집고 다니는 닭들을 병아리로만 보아온 사이, 그들은 지렁이며 개구리를 잡아먹고 부지런히 커, 어떤 것은 야무진 암탉이 되고 또 어떤 것은 늠름한 수탉이 되어가고 있었겠다. 모르기는 해도 수평아리는 그 사이, 두 발로 땅을 움켜잡듯 딱 그러잡거나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떡 벌어지거나 고개는 우뚝 서고, 머리 위엔 훈장처럼 붉은 볏을 매달고 디룩디룩 즈이 마당을 걸으며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꼿꼬꼬, 꼬오오오!
명주실만치 가느다란 별빛을 빼면 깜깜하기 그지없는 칠흑의 밤을 향해 수탉이 또 한 번 운다. 울음을 빼는 곡조가 영 아니다. 변성기에 든 소년의 목청처럼 어설프다. 그러나 저 어린 것이 이 깊은 새벽과 홀로 마주한다는 기개만큼은 용맹해 보인다. 누가 이 야심한 새벽에 일어나 자신의 영토의 안녕을 위해 목청을 높이겠는가.
나는 책을 놓고 그의 울음소리가 날아가 닿을 곳을 가만히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적엔 웬만한 집들은 모두들 달걀을 얻기 위해 닭을 키웠다. 씨암탉이 알을 품기를 또 바랐으니 집집마다 위엄 있고 호기로운 금빛 수탉도 한 마리씩 꼭 키웠다.
그때의 새벽은 요란했다. 어느 집의 수탉이 첫울음을 부르짖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질세라 수탉들이 가세했다. 그러다가도 최후엔 울음이 좋은 놈만 두 놈이 남았는데 이들의 울음이 가히 명품이다. 한 녀석이 길게 울음을 뽑으면 거기에 알맞는 텀에 맞추어 다른 녀석이 운다. 그것은 시나위의 장단 같아 주거나 받거니 한다. 짧으면 짧게, 길면 길게, 소리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곡조를 넣었다가 뺐다가 아주 새벽을 가지고 놀듯 운다. 그것은 그 당시 하늘이 일찌거니 이 지상에 내려주신 흥겨운 알람시계였다.
홀로 사는 서동이 어무이를 탐하러온 연못 용도 이 알람이 울면 그간에 든 살정을 떨치고 방을 나오고, 담장을 기웃거리던 도깨비도 이 무렵이면 슬며시 민가를 떠난다.
나는 수탉 우는 시간을 책 옆에다 적었다. 4시 22분, 4시 45분. 그리고 5시 5분. 수탉은 꼬박 세 차례나 새벽이 오는 길을 터주고 그만 잠에 들었다.
가만히 생각하노라니 어린 수탉은 태어나면서 이처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이 세상에 왔다. 좀 버거워 보이지만 그것이 수탉의 운명이다. 힘들다고 새벽 울음 울기를 포기한다면 그건 수탉이 아니다. 어쨌거나 파란 지붕집 햇내기 수탉은 이제부터 이 마을의 새벽을 책임져야 한다. 그게 그가 짊어진 생의 무게다. 그 댁 몸이 편찮으신 할머니도 어쩌면 혼자 사시는 인생의 무게를 수탉에게 반쯤 지우려고 수평아리를 키워온 게 아닌가 싶다.
<교차로신문>2021년 1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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