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호박과 코 베 갈 추위

권영상 2021. 1. 5. 17:52

호박과 코 베 갈 추위

권영상

 

 

올겨울은 제법이다. 겨울 구실을 좀 한다. 겨울 예고편도 없이 곧장 기온을 뚝 떨어뜨리고, 사흘이 멀다 하고 눈발을 날린다. 치고 드는 품이 어디서 많이 본 솜씨다. 연일 영하의 강추위를 예고한다. 지금대로라면 겨울 맛을 제대로 볼 것 같다.

겨울이 깊어가는 시절에 좋은 음식이 있다. 호박죽이다. 방금 끓인 호박죽을 후후 불어 먹는 맛은 일품이다. 오랫동안 호박은 주로 대형마트에서 구했다. 그러던 것이 끝내 안성 텃밭 한 귀퉁이에 호박 심을 자리를 지난해에 마련했다.

 

 

예전 아버지하시던 걸 보면 4월쯤 남녁 담장 밑에 호박 구덩이를 한껏 파시고 거기에 잘 삭힌 뒷거름을 가득 채우셨다. 그렇게 땅을 살찌운 뒤 호박씨를 넣고 봉분처럼 둥글게 흙을 덮으셨다. 그러고 한 보름 지나면 그 냄새 나는 구덩이에서 호박씨는 푸른 깃발을 찾아들고 나온다.

대개 호박의 인생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도 텃밭 끄트머리에 호박 구덩이 다섯 개를 팠다. 그리고 작은형수님께서 보내주신 맷돌호박씨 서너개 씩을 던져 넣은 뒤 초록 봄을 기다렸다. 호박 심은 자리는 자리 중에 명당이다. 구덩이 곁엔 좁은 수로가 있고, 그 너머는 호박순이 뜀박질하며 놀기에 딱 좋은 경사진 바위억서리다. 바위들 틈에 더러 철쭉이 있을 뿐 방해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호박 떡잎은 햇빛 충전기를 닮았다. 초록 충전을 가득 하고 나면 호박순들은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제가 알아 수로를 건너고 바위억서리를 탄다. 맷돌호박은 호박도 볼만하지만 호박잎과 줄기가 볼만하다. 잎은 넓고 크며, 줄기는 짐승처럼 멀리멀리 달아난다. 그게 한창 커오르는 여름, 호박 텃밭은 물론 바위억서리 모두 온통 숲이 되었다. 그 안에선 맹꽁이가 밤 새워 맹꽁맹꽁 울고. 호박잎 아래로는 동네 고양이들이 드나들었다.

 

 

하루는 옆집 수원아저씨가 낭패라는 듯 내게 말했다.

“호박숲에서 뱀이 자꾸 기어나오네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기겁을 했다. 뱀이라니!

내가 여기 내려와 사나흘씩 머물다 서울로 올라가거나 장맛비가 요란히 내리면 호박숲에서 푸른 뱀이 기어 나온다는 거다. 그 말이 무서워 호박뿌리를 그만 아작 뽑아내려 했는데, 수원아저씨는 그런 내 앞을 가로막는다.

 

 

“힘들어도 우리가 좀 견뎌보겠어요. 호박이 아깝잖아요.”

그분의 거시기한 후의로 끝내 장마도 가고 가을도 무사히 갔다. 그러나 그런 일과는 달리 호박은 바위 등허리며 뱃구레며 사타구니쯤에 넙죽 않아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그렇게 좋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호박은 기어다니는 놈들과 달리 그 자리를 고수한다. 그리고는 말할 수 없는 관대함으로 제 늠름함을 완성해낸다.

 

 

서리가 내리면 호박의 인생도 거기서 끝이다. 잘 익은 놈을 이웃과 나누고, 남은 건 거실에 두고 오명가명 들여다보는 기분은 좋다. 큼직한 호박 한 덩이 집안에 들여놓고 나는 그의 인생을 배운다. 나이 먹어 스승으로 삼을 게 호박이다. 늙은 호박은 말수가 없다. 눈치없이 가운뎃자리를 탐하기보다 외진 자리에 머물 줄 안다. 무엇보다 한 자리에 꾹 눌러앉는 신뢰감과 말이 없어도 느끼게 되는 엄숙한 존재감은 배울만한 덕목이다.

 

 

바깥에선 연일 코 베 갈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호박의 내면은 점점 꿀이거나 조청빛을 띠며 충실히 익어간다. 추위가 아주 깊어지거든 내 저 늙은 호박을 잘 깎아 호박죽 한 그릇을 먹으며 겨울을 견디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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