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있던 자리
권영상
마당가에 오동나무가 있었다. 아버지가 큰댁에서 분가해 나오신 후에 심은 나무다. 딸들의 혼인할 때를 위해 장롱 감으로 심으셨을지 모른다. 그때가 1935.6년쯤이라면 충분히 그런 문화가 있었을 것도 같다.
막내인 내가 태어나 세상을 분별할 때쯤 오동나무는 거의 두세 아름은 되었다. 마당가에 홀로 선 독립수라 먼데서 보면 한 채의 푸른 집을 닮아 있었다.
오동나무는 늦은 봄에야 꽃을 피웠다. 꽃은 보랏빛으로, 무심코 마당에 들어선 고양이들이라면 꽃향에 취해 비틀거릴 정도였다. 여름에는 그늘이 좋았고, 가을에는 오동잎에 듣는 가을 빗소리가 좋았다. 겨울의 오동나무도 별나게 좋았다. 가지에 촘촘히 달린 열매들이 동실동실 바람에 부딪는 소리는 귀를 풍성하게 했다.
오동나무는 한 채의 넉넉한 집이었다. 이를테면 안채가 있고 사랑채가 있듯이 우리들에게 있어 오동나무는 집안과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정자와 같은 일종의 마당채였다. 여름에는 점심이거나 저녁을 그 마당채인 오동나무 아래 그늘 멍석 위에서 했다. 들녘을 내다보며 먹는 일종의 나들이 음식 같은 한가한 멋이 있었다.
오동나무 그늘에 펴놓은 멍석은 식사뿐만이 아니라 거기서 오수를 즐기거나 무협지를 읽거나, 손님을 환대하거나 하는 곳이기도 했다. 저녁엔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무논의 개구리 소리를 들었고, 별을 세다가는 깜물 한뎃잠을 자는 곳이기도 했다.
근데 그 말고 오동나무는 내게 이런 나무이기도 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여름이 깊어가는 어느 날의 등굣길이었다. 10여 리 학교 길을 함께 다니는 썩 윗학년 형 둘이 깜짝 놀랄 소리를 내게 했다.
“너, 우리랑 뺑소니치자!”
그들 없이 먼 학교 길을 혼자 다닐 힘이 없던 나로서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들을 따라가 한적한 어느 수수밭에 책가방을 숨겨놓고 갯가의 물새들을 쫓아다녔다. 학교가 파할 무렵쯤 수수밭에 가보니 책가방이 없어졌다. 우리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비틀비틀 걸어 집으로 왔다. 그날 오후, 수수밭 주인이 내가 메고 다니던 가방을 들고와 어머니께 드렸다. 이로써 나의 뺑소니는 요지부동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 날 밤, 어머니는 말없이 나를 데리고 오동나무 곁에 세웠다. 그리고 바느질 무명실로 나를 오동나무에 묶으셨다. 그것은 내가 아무리 어리지만 어린아이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못 낼 뺑소니를 친데 대한 징벌이었다. 나는 날이 어둡도록 거기 묶여있었다. 움직이려 해도 무명실이 끊어질까봐 오동나무를 꼭 껴안고 숨죽여 울었다. 그날 그 컴컴한 밤의 오동나무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또 한분의 어머니였다.
늦어서야 어머니는 마당으로 나와 나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셨고, 그 밤 나는 어머니 품에서 눈물 묻은 잠을 잤다. 어머니도 내가 동네 윗학년을 따라 어쩔 수 없이 뺑소니쳤다는 것쯤 아셨을 테지만 어린 내가 행여 또다시 그런 유혹에 빠질까봐 벌하신 게 아닌가 싶었다.
그 후, 나는 학교를 다니며 뺑소니를 치거나 이런저런 핑계로 학교를 빼먹은 적은 없었다. 그건 모르기는 해도 그날의 그 오동나무 징벌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 오동나무도 어느 해 가을 태풍 루사로 사라졌다. 집이 침수되는 바람에 집을 새로이 짓느라 부득이 베어지고 말았다. 가끔 찾아가는 고향집 어느 언저리에 나무가 섰던 자리만 어림풋이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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