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봄날의 유희, 화전놀이

권영상 2021. 4. 4. 15:15

 

봄날의 유희, 화전놀이

권영상

 

 

봄비 끝난 아침이다. 세상이 환하다. 환하다 못해 빛난다. 봄꽃이 한창이다. 이런 봄날을 골라 예전의 어머니들은 화전놀이를 갔다.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고향의 어머니도 젊은 날 화전놀이를 가시곤 했다.

화전놀이의 재미는 진달래꽃 부침을 지지는 일과 화전가를 지어 부르는 일이다. 어머니는 대개 하루 전에 화전가를 두루마리 종이에 미리 써 가지고 가셨다. 화전가란 내방가사의 한 장르인데 민가의 여인들이 봄날 화전놀이를 하며 부르던 가사형식의 노래다.

 

 

지난해다. 영주 문화유산 보존회에서 그 지방 가사를 집대성한 ‘영주의 내방가사’를 보내왔다. 하도 방대해 열 엄두를 못 냈는데 오늘에야 첫 장을 넘겼다. 300여 편의 가사 중에 ‘덴동어미 화전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세 가세 화전을 가세 꽃 지기 전에 화전 가세

이때가 어느 땐가 때마침 삼월이라

동군이 포덕택하니 춘화일난 때가 맞고

화신풍이 화공되어 만화방창 단청되네

이런 때를 잃지 말고 화전놀음 하여보세’

로 시작되는 노래다.

 

4월 봄바람이 마치 화가라도 된 양 자연을 만화방창으로 물들이고 있다. 때가 때니만큼 마냥 집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어느 참꽃 피는 좋은 날, 꽃 필 때를 놓치지 말고 우리 화전놀이를 가자는 것으로 가사는 시작된다.

 

 

그런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여인들 마음이 부풀고 설렐 수밖에 없다. 진달래꽃 전을 부칠 밀가루, 기름. 조리 도구를 실어 나를 일도 일이지만 무엇보다 설레는 것은 몸단장을 하는 일이다. 이 노래의 백미는 여기에 있다. 당시 여인들의 머리단장, 얼굴 단장, 나들이옷 단장의 외양묘사와 심리묘사가 빼어나다. 여인들의 재재바른 손놀림이며 곱게 차려 입은 옷맵시가 눈에 선하다.

 

‘청홍사 감아들고 눈썹을 지워내니

세붓으로 그린 듯이 아미 팔자 어여쁘다

양색단 겹저고리 길상사 고장바지

잔줄누비 겹허리띠 맵시 있게 질끈 매고

광월사 치마에 분홍댕기 툭툭 털어 들쳐 입고

 머리 고개 곱게 빗어 잣기름 발라 손질하고

공단댕기 갑사댕기 수부귀 다남자 딱딱 박아’

 

가는 붓으로 눈썹을 또렷하게 그리고 보니 예쁘기만 하다. 비단 겹저고리에 비단 고쟁이, 촘촘히 누빈 겹허리띠 질끈 매고, 달빛무늬 비단치마, 잣기름 발라 곱게 빗은 머리에 수명 부귀 수놓은 댕기를 드리운다.

 

 

단장을 마치고 여인들이 가는 곳은 순흥이라는 곳에 있는 비봉산 시냇물가다. 화전을 지지며 봄에 취할 즈음 덴동어미가 저의 기구한 인생 역정을 한편의 드라마처럼 펼쳐낸다. 열여섯에 결혼을 했으나 이듬해 단오에 남편을 잃는다. 재혼을 했지만 이번엔 괴질로 남편을 잃고. 삼혼엔 물에 잃고, 사혼엔 불에 잃는다.

그야말로 서럽고 서러운 인생을 비교적 긴 소설적 서사로 노래한다.

내용이야 뻔하다. 나처럼 재가하여 서럽게 사느니 차라리 수절을 하라는 그 시절의 계몽적 노래다. 그러나 당대 여성들의 언어를 다루는 감각적 표현과 세련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거기다가 극적인 소설적 서사와 그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도 어머니는 가끔 화전가 두루마리를 펼쳐놓고 소리 내어 읽으시곤 했다. 이제는 경치 좋은 곳을 찾아들어 꽃전을 부치며 놀던 화전놀이도 다 옛일이 됐다. 하지만 이 무렵쯤 꽃 좋은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교차로신문> 2021년 4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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