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식 세끼
권영상
나는 삼식 세끼다. 삼식 세끼, 말 그대로 하루 세 끼 꼭꼭 챙겨먹는 남자다. 밥 한 끼라도 거를라치면 나라가 무너질 것처럼 전전긍긍한다. 밥 중독이다. 안 먹으면 답답하고, 불안하고, 어지럽고, 혈압이 떨어진다.
아침에 아내가 길 건너 언니집에 간다며 나선다.
"김장 하는 거 도우러 가니까, 점심에 전화하면 밥 먹으러 와." 그런다.
“아, 안 돼! 나 바빠!”
나는 그렇게 의기양양 소리쳤지만 아내는 안다. "안 먹으면 혈압 떨어지잖아. 괜찮어. 언니한테 당신 혈압 이야기해 놓을 테니까." 그러고 간다.
배고프긴 좀 이른 시간인데, 벌써 전화가 온다.
처형이다. "얼른 와요. 보쌈해 놨으니. 부끄러워 말고 얼른요!" 그런다.
나는 하던 일을 놓고 일어선다. 안 그래도 내심 가고 싶었다. 가고 싶은 데는 점심도 점심이지만 사람들이 그리워서다. 처형도 보고, 손위 동서도 만나보고, 김장하러 왔다는 동서의 장성한 두 아들과 젊은 두 며느리. 그리고 이제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서의 손자. 뭔 일 있을 때마다 만난 이들이니 식구처럼 보고 싶다.
그이들도 또 그이들이지만 무엇보다 집을 나선다는 것이 좋다. 오래 다녀 친숙한 그 길이지만 코로나 때문에 발을 끊고 살아 낯설 게 느껴지는 처형 댁으로 가는 길.
밥도 먹고, 사람도 보고, 저들 이야기도 듣고, 웃고, 싱거운 소리도 하고, 생각만 해도 참 좋다. 코로나19 이후로 나는 꼬박 집에 박혀 오직 밥 먹는 일이 내 인생의 국정 목표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밥 먹고, 점심에 점심밥 먹고, 저녁에 저녁밥 먹고.
처음엔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게 미안했다. 사람이 하루종일 밥이나 먹는 소나 돼지 같았다. 책장이나 넘기고 잡지도 보는데, 안다 하는 머릿속은 점점 텅텅 비어가고, 세상으로 나가는 일은 점점 게을러진다. 그게 요즘 삼시세끼 나다.
“밥 먹어!”
아내가 식탁에 밥 차려놓고 부를 때면 나는 내가 밥이나 먹는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주려고 일부러 방에 박혀 꾸물댄다. “내 말 안 들려?” 그럴 때까지 일부러 꾸물댄다. 그렇게 꾸물대는 내 속을 아내가 모를 리 없다. 아내는 나직하지만 아주 위엄 있게 “그럼, 도로 집어넣는다!” 위협 아닌 위협이다. 식탁 위의 밥을 철수하겠다는 말이다.
“미안해할 거 없어. 코로나 땜에 세상 모든 남자가 삼식이가 됐대.”
못 이기는 척 밥 먹는 날 보고 아내가 위로한다.
아내는 또 어디서 들었다며 껌딱지 이야기를 한다.
슈퍼 갈 테니 오늘은 제발 따라오지 말고 집에 혼자 있어요. 그러고 아내가 슈퍼에 갔는데 도착하자마자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더란다. 나 거기 가면 안 될까?
그런 전화 때문에 요즘 아내들 신경질 나 죽겠다는 거다. 슈퍼 갈 때마다 따라가는 날 들으라는 소린지 껌딱지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가슴이 뜨끔하다. 거기다가 나는 겁 없는 삼식세끼다. 삼식이는 아무나 하나. 밥투정을 말아야 하고, 주는 대로 먹고, 맛없어도 맛있게 먹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와, 잘 먹었다!” 숟가락을 놓자마자 설거지에 임해야 한다.
처형 댁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비록 삼식세끼지만 당당해지고 싶다. 내가 존심을 무릅쓰고 밥을 챙겨먹어 우리나라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교차로 신문>2020년 12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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