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무렵에 받은 호박 선물
권영상
“두보한테 갈 거야!”
아내가 현관문을 나서려고 나를 불렀다.
나는 대충 옷을 챙겨입고 거실로 나갔다. 아내는 현관 앞에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세워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걸 들고 마당에 나가 아내의 차에 실어주고 물러섰다. 금방 오겠다면서 아내가 차를 몰고 정문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돌아섰다. 날씨가 춥다. 올해처럼 이렇게 갑작스럽게 눈과 추위가 몰려오는 해도 드물다. 작년 겨울이 비교적 푸근했고, 또 너도나도 온난화 타령이었으니 올 겨울도 그리 춥지 않으려니 했는데 초입부터 사람을 몰아세운다.
아내가 만나려는 두보는 아주 오래 전, 아내가 가르친 초등학교 제자다. 우연한 기회에 만났고, 지금껏 서로 연락하며 가까이 지낸다. 두보의 시를 좋아해 이름대신 두보라 부른다. 사정이 있어 늦은 나이가 되도록 혼자다.
“한번 제대로 김장을 해주고 싶었는데.”
아내는 김장철만 되면 그 말을 했다. 아무리 김장이 성가시다 해도 안 먹을 수 없는 게 김치다. 두보도 고향이 있고 부모도 있다. 하지만 나이든 딸로서 번번이 김장 받아먹는 일이 어디 쉬울까.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 아내한테 뜻밖의 호재가 생겼다. 지난 달, 작은형수님께서 적잖이 김장을 보내주셨다. 아내는 이때다 싶게 그걸 두보에게 보내주고 싶었지만 그때 두보는 아쉽게도 이사 중이었다. 그후 집안 정리가 될 때를 기다린 게 오늘이다.
며칠 전, 아내는 고향 형수님께 전화를 드렸다.
고맙게 받은 김장 중의 일부를 김장이 정말 절실한 이에게 보내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걸 못 받아주실 형수님이 아니셨다. 내년에 그에게도 김장을 해드린다 할까봐 걱정한 건 또 우리였다.
두어 시간쯤 뒤 아내가 돌아왔다. 코로나 때문에 넣어만 주고 집에 다 왔는데 이번엔 후배한테서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고 거기 다녀오는 길이란다. 후배의 시댁이 충남 부여인데 거기 내려가 시부모님 일 며칠 도와드렸더니 호박을 주시더란다. 종이 박스를 여니 청호박이다. 청호박은 다 익어도 청호박이다. 맷돌호박처럼 엉덩이가 넙적하고 탐스럽다.
호박 한 덩이 들어 옮기는 데 그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당신한테 보내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래!”
볕이 드는 거실 문 옆에 의자를 놓고 거기에 앉히는데 그런다.
크리스마스 선물치고 정말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선물이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는 이쯤에, 서울에서, 그것도 아내의 후배로부터 다른 선물도 아닌 호박선물을 받다니!
저 큼직한 청호박 안에 봄 여름 가을 내내 받아들인 맛있는 햇빛은 또 얼마나 가득 차 있을까. 호박밭을 지나간 바람 소리며 장맛비 소리며 천둥소리는 또 얼마나 꽉 차 있을까. 더구나 늙은 호박이 거기 그 의자에 떡 앉아주는 것만으로도 집안의 중심이 잡히는 것 같다. 마치 어른을 한분 모셔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는 아내의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선배님이 보내주신 시집 잘 읽었는데 호박선물 드렸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그런다. 호박이 크리스마스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 무렵의 선물치고 너무나 특별하다. 두보에게 김장을 선물하고 나니 호박 한 덩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돌아온다.
<교차로신문>2020년 12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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