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가을비 내린 아침

권영상 2020. 11. 20. 14:02

가을비 내린 아침

권영상

 

 

간밤 가을비가 왔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연다. 마당에 그 좋던 느팃잎이 다 떨어졌다. 아침을 챙겨먹고 아파트 뒤쪽 후문을 나섰다.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느티나무 숲이 황량하다. 여기라고 다를 게 없다. 번개와 천둥을 거느리고 온 가을비가 느팃잎을 모조리 떨어뜨렸다. 한길가에 줄지어 선 은행나무 또한 길 위에 노란 잎을 수북수북 쏟아냈다.

 

 

그 요란하던 가을의 작별도 이렇게 끝났다.

가을은 고운 햇빛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낙엽들의 작별 축제를 싫도록 누리게 한 뒤 그 절정의 고비에서 비를 안겼다. 이제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나뭇잎들은 모두 이 지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축제는 끝났다. 바람과 함께 흩어지던 낙엽의 어수선함이며, 때로는 휘황찬란하던 몸짓이며, 마른 가지를 스치던 낙엽 지는 소리마저 모두 옛일이 되고 말았다.

비 내린 뒷날의 숲은 조용하다. 절정의 시간을 보낸 사내의 얼굴처럼 솔직해졌다. 욕망의 뒤켠에 숨기고 있던 슬프다면 슬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계절을 겪으며 쓰러지거나 꺾이거나 뿌리째 뽑혀 흉하게 눕거나 한 상처를 더는 감출 수 없다. 가을을 떠나보낸 숲엔 그런 그늘이 있다. 하지만 그걸 드러낸다고 이제 부끄러울 것도 없다.

 

 

발길이 나도 모르게 나와 가까이 지내던 산을 향한다.

이 비를 맞고 있을 귀룽나무가 보고 싶었다. 그에겐 지난여름이 맡겨놓은 무거운 짐이 있다. 오랜 장맛비에 위태위태하던 늙은 오리나무가 그를 덮쳤던 거다. 그 경황없는 일로 하여금 한창 크던 귀룽나무는 지금껏 오리나무에 짓눌려 살고 있다. 아니 활처럼 휜 몸으로 현실을 버텨내고 있다는 말이 옳겠다. 여름이 지워놓은 짐이라지만 여름도 더는 어찌하지 못하고 떠나갔다. 귀룽나무에게 지워진 아픈 운명인지 모르겠다.

 

 

내 생각이 가끔 거기에 가 닿으면 신발을 묶고 그를 찾아 산을 오른다. 내가 찾아간다고 그의 고충이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가는 건 그가 견디는 아픔을 잠시라도 지켜봐주고 싶어서다. 오리나무와는 아무 상관없는 나이긴 하지만 누군가 보아주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힘이 된다면 그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잣나무 숲이 끝나는 그곳에 귀룽나무는 몸을 구부린 채 힘겹게 가을비에 젖고 있다. 오래도록 이 산길을 걸어온 나를 귀룽나무라고 모를 리 없다.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못마땅해 하는 내 안의 생각을 귀룽나무도 아는 이상 표리부동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내게도 그러하지만 타인에게도 무정한 인간이 되는 건 싫다.

 

 

비에 젖어가는 귀룽나무의 고통이 내게로 온다. 나는 그의 휘어버린 허리를 어루만지며 그가 이제는 자신을 짓누를 수밖에 없는 오리나무를 이해하기를 바랐다. 더 어찌할 수 없는 이 고통을 고통으로 안고 겨울로 들어가는 건 슬픈 일이다. 그를 이해하여 내 몸처럼 껴안고 그 엄혹한 시간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주길 바랐다.

들떠 있던 가을의 시간에서 우리는 벗어났다. 머지않아 닥쳐올 춥고 바람 많은 계절 앞에 서 있을 때가 왔다. 이 산 언덕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상 귀룽나무도 느티나무도, 어린 생강나무도 이 겨울을 비킬 수는 없다.

 

 

산모롱이를 돌아내려오다가 걸어온 길을 올려다본다. 저기, 귀룽나무가 내려가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타인의 생애를 짊어지고 이 겨울을 맞는 귀룽나무가 조금 애처롭다. 하지만 그 애처로움이 있어 내년 봄엔 더 향기나는 귀룽나무 꽃을 피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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