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집 아저씨의 호의
권영상
뜰안에 있는 소나무를 베어냈다. 빈 자리가 커 무슨 나무든 한 그루를 심고 싶었다. 살구나무거나 아니면 감나무, 그도 아니면 사과나무.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무 심을 구덩이를 미리 팠다. 지금 심어도 좋겠지만 겨울 냉해가 좀은 걱정이었다.
심을 자리를 미리 파두면 구덩이에 눈이 내리고 녹고 하는 사이 땅이 물러질 테고, 나무는 생땅이라는 낯설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구덩이를 다 파고 허리를 펴고 일어설 때다. 옆집 수원 아저씨가 자전거를 끌고 나오며 내게 물었다.
“혹 심으려고 마음먹은 나무가 있어요?”
내가 머뭇거리자, 자두나무가 산 너머 포도밭에 있는데 자두 맛보는 재미도 누릴 수 있을 테니 자두나무 심는 게 어떠냐고 했다. 몇 그루 되니 한 그루 주시겠다면서. 말은 고마웠지만 자두라는 말에 나는 서둘러 글쎄요, 하고 그 말을 밀막았다. 6년을 키운 자두나무가 지난해에 죽고 말았다. 자두꽃도 좋고, 주렁주렁 달리는 자두도 좋지만 병해 때문에 조심스럽게 사양했다.
수원 아저씨는 일 보러 가시고 나는 쟁기를 정리했다.
열흘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엔 소나무가 서 있었다. 8년 전, 여기 올 때엔 내 키만 하던 것이 그 사이 몰라보게 컸다. 근데 그게 나를 불편하게 했다. 소나무는 제 커다란 그늘에 도라지 한 뿌리 허락하지 않는다. 봄에 날리는 송홧가루는 문을 꼭꼭 닫아도 방안으로 노랗게 숨어들어온다. 우리 집 만이라면 견딜만 하다. 이웃에게 민망할 정도다. 무엇보다 이웃 밭에 길게 그늘을 드리우는 형편이라 그게 안 됐다.
그러나 내 힘으로 덩치 큰 소나무를 어찌하긴 무리다. 한두 그루도 아니고 무려 네 그루다. 나는 그런 소나무를 볼 때마다 신경이 거슬렸다.
근데 열흘 전 월요일이었다.
“집을 언제 비우시나요?”
수원집 아저씨가 물었다.
“그 사이 이 소나무들을 제가 잘 정리해 드릴 게요.”
느닷없이 그런 제안을 했다. 나는 설마, 했다. 나보다 체격이 작은 분이 그냥 해 보시는 말이겠거니 하며 집 비울 날짜를 말씀드렸다.
그 일이 있고 서울로 돌아와 이것저것 밀린 일을 마치고 엊그제서야 안성에 내려왔다. 설마, 한 내가 잘못이었다. 파 한 뿌리, 무 한 잎 다치지 않고 그들 소나무 네 그루를 말끔히 정리해 놓았다. 혹시나 하고 준비해간 선물을 드렸지만 그분은 한사코 거절했다. 해드리고 싶어 한 거니까 자신의 마음을 지켜달라는 거였다.
실랑이 끝에 감사하다는 말만 하고 싱겁게 돌아섰다.
생각할수록 그분의 호의가 그 어떤 물질로도 답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느껴졌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아는 분의 트럭까지 동원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산 너머 포도밭에 포도가 익을 때면 포도 맛을 보라며 적잖이 포도를 보내 주시고, 난로를 놓고 고구마를 구워 깜깜한 밤중에 찾아오시는 분이 그분이다. 그 모두가 처음부터 담장을 둘러치지 않고 서로 교류하며 산 덕분이 아닌가 싶다.
“당신도 잘 대해 드리니까 그렇지.”
아내가 그러기는 하지만 나는 그분에 대면 턱없이 부족하다.
<교차로신문>2020년 11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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