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멈추지 않은 동심의 탐구와 사유의 확장

권영상 2020. 9. 2. 14:18

멈추지 않은 동심의 탐구와 사유의 확장

김 용 희

 

 

시력 30년, 그 시간의 깊이

권영상 시인이 동시를 써온 지 올해로 30년이 됩니다. 그는 1979년 《아동문예》에 「새」가 천료되고, 이듬해 《강원일보》신춘문예에 「길」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단풍을 몰고 오는 바람』(1981)에서 『구방아 목욕 가자』(2009)에 이르기까지 모두 13권의 동시집을 선보였습니다. 동시를 써온 30년, 그 시간의 깊이만큼 그의 동시 세계도 폭넓습니다. 순수한 자연과의 교감, 우리의 역사와 민중의 삶 의식, 가족과 이웃에 대한 깊은 애정, 기발하고 활달한 동심의 세계 등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 중 소외받고 보잘것없는 대상을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과 동화적 발상으로 빚어낸 햇빛처럼 눈부신 지혜의 소리는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북돋아줍니다.

 

권영상 시인의 다양한 동시 세계도 그 시적 관심이나 표현 방식에서는 일관된 변화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역사성과 시대성 혹은 사회성을 담은 거시 담론에서 아이들 삶의 자유분방함과 다양성을 구체화한 미시 담론으로, 또 시적 이미지 추구에서 동화적 상상력에의 몰입으로, 보다 더 아이들 삶의 현실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런 변화 과정은 그가 1993년 《MBC 동화 대상》에 창작동화「쥐라기 아저씨와 구두」가 당선되면서 동화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만, 그보다 동시의 미학을 새로이 인지한 결과로 여겨집니다.

 

동시는 시인의 잠재된 동심을 시적 대상에 투사하거나 어린이의 화법이나 시점으로 그 대상을 인격화하고 유정화(有情化)하여 시적 의미를 구현하는 문학인 까닭입니다. 이때 동시는 시적 이미지와 동화적 상상력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이야기성과 의미성을 함께 드러내게 됩니다. 시력 30년을 맞으며 내놓은 『구방아, 목욕 가자』(사계절)도 짤막한 동화들을 묶어놓은 듯 자유분방한 시적 화자를 통해 구김살 없는 아이들의 삶 현실을 구수하게 이야기하는, 후기의 시적 면모를 잘 대변해주는 동시집입니다.

 

그러던 그는 이번에는 시력 30년을 정리하듯 또 한 권의 동시집을 내놓았습니다. 14번째 동시집 『햇빛 좋은 날』이 그것입니다. 이 『햇빛 좋은 날』은 그가 동시를 써오면서 각별히 해두고 싶었던 시적 성찰의 과정을 따로 마련해둔 아주 특별한 동시집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동시집을 읽으며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시적 화자입니다. 시적 화자란 시인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내세운 허구적 대리인으로, 이 동시집에서는 ‘생각 많은 아이’와 ‘속 깊은 아이’를 화자로 설정하여 시인의 시적 탐구 과정을 의미 있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 많은 아이와 동심의 탐구

 

『햇빛 좋은 날』은 생각 많은 시적 화자의 진솔한 자기고백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것은 시인 자신이 시적 화자의 삶 체험을 자기화하여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진실하게 실현시키려 한 결과이지요.

 

나도 처음엔 떨었지.

 

3월, 그 학교의 교문을

들어설 적엔

나도 괜한 두려움에 떨었지.

 

우뚝 서 있는 철봉대를 보고도

엉겁결에 안녕, 했고

 

운동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밟고도

어, 미안해!

그러며 굽신거렸지.

 

 낯선 곳에 들어서면

누구나 처음엔 떨지.

 

―제 이름은 홍방구입니다.

 

홍방규인 내 이름도

달달달 떨릴 때는

홍방구라 하는 수가 있지.

 

   ―「처음엔 다 떨지」 전문


누구나 낮선 세계 속에 처음으로 혼자 놓이면 ‘괜한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입학한 첫날 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그 ‘괜한 두려움’에 “우뚝 서 있는 철봉대를 보고도/엉겁결에” 인사를 하고, “운동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밟고도” 움찔거리지요. 또 “홍방규인 내 이름도/달달달 떨릴 때는/홍방구라” 얼떨결에 발음하여 웃음바다가 됩니다. 누구나 떨다보면 자신의 이름마저 잘못 발음하는 실수를 범하는 수가 있지요. 「처음엔 다 떨지」는 시적 화자가 과거 경험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공감을 획득한 동시입니다.

 

그 시적 화자가 점차 낯선 세계와 친숙해지면서 ‘생각 많은 아이’로 발전해 갑니다. 그런 아이는 이제 모든 것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듯 자신만의 생각으로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것은 세계를 새롭게 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생일」, 「화요일의 가로수 길에서」 등이 그런 주관적 사유로 빚어낸 동시들이지요. 곧 내 생일날 새벽부터 매미가 “유리문에 날아와 길게 나팔을” 부는 것도, “저녁에/수돗가 손 씻을 물에/말간 달 한 덩이가 찾아”온 것도 모두 자기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계절이 축복이라 여기고, 화요일의 가로수 길을 걷다말고 “지금도 일요일이/우릴 향해 오고 있다는 걸” 생각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의 생각으로 세계를 보면, 「내 생일」처럼 세상이 새로우면서 아름답고, 「화요일의 가로수 길에서」처럼 즐거우면서 기쁘지요. 어디 그뿐 인가요? 「잎사귀들은 심심하면」에서보듯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고, 「바스락」이나 「바람은 착하지」에서보듯 세상일에 궁금증도 발동하고 자연 현상조차 의미 있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계를 자기만의 생각으로 본다는 것은 세계를 새롭게 보는 일이자 사물의 속성을 새롭게 발견해내는, 시적 성찰의 과정인 것입니다. 철 따라 변하는 자연의 현상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 크고 작고 보잘것없는 모든 생명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편견 없이 순수하게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동심이며 동시의 세계인 까닭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사물도 생각이 있다고 느끼고, 사물과 말할 수 있고, 친구가 될 수 있어서 사물의 처지를 새롭게 살피고, 그에 대한 궁금증도 발동하게 됩니다.

 

동시는 이런 성찰의 과정 속에서 태어납니다. 권영상 시인은 생각 많은 시적 화자를 통해서 이러한 동심의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지요.

천진한 자기고백에서 비롯된 이런 동시야말로 행복의 시편이 아닐까요? 그것은 권영상 시인이 즐겨 쓰는 화법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종결어미 ‘~지’의 사용이 그것입니다. 이 종결어미는 「처음엔 다 떨지」, 「바람은 착하지, 「달개비는 파랗지」 등 제목에도 종종 나타나지만, “나도 괜한 두려움에 떨었지”, “잎사귀들은 흥에 겨우면/지나가는 사람들 소매를 끌어 당기지” 등 시 구절에서 많이 쓰입니다. 이때의 종결어미 ‘―지’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확신의 뜻이 숨겨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결어미 ‘―지’는 독자에게 공감을 얻어내는 수긍의 화법이기도 합니다.

 

어린 독자들은 작품을 읽을 때 시적 화자의 경험을 자기 삶의 경험에 비추어 이해하려들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종결어미는 그것이 지니는 한정적인 의미로 인해 때로는 공감의 폭을 축소화하는 화법이 되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햇빛 좋은 날』에는 ‘속 깊은 아이’를 시적 화자로 함께 설정해 두었던 것이지요.

 

 

속 깊은 아이와 사유의 확장

 

권영상 시인은 속 깊은 시적 화자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확장을 꾀합니다. 곧 자기중심의 생각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한 사유의 확장으로 시적 공감의 폭을 확대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런 ‘속 깊은 아이’를 『햇빛 좋은 날』 전편에서 쉽게 만날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 사유의 확장은 “누가 나처럼/창가에 서서/내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한번 쓰윽 내려다봐” 달라고 부탁하는 「달님, 부탁이 있어요」에서보듯, 타인에 대한 천진한 관심으로 시작하여 남의 입장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인식의 길로 나아갑니다.

 

새들은 힘들지요

아침 햇살과 함께 깨어나

한나절 하늘을 날았을 테니까요

 

벌레를 잡기 위해 쉬지 않고 일했으니

새들은 피곤할 테지요

 

벌레들은 또 어떨까요

아침 일찍 일어나 잎을 갉고

 

새들 부리에 찍히지 않으려 애썼을 테니

벌레들은 또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오후 1시」1~2연

 

보다 성숙해진 ‘속 깊은 아이’는 「오후 1시」에서처럼 상대방의 입장까지 생각합니다. 그 아이는 쉬지 않고 벌레를 잡기 위해 일한 새들이 피곤함도 생각할 뿐 아니라 새들의 부리에 찍히지 않으려고 애쓴 벌레들의 힘겨움도 잊지 않습니다. 여기서 ‘오후 1시’란 새와 벌레가 함께 피곤함을 풀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라는 뜻이지요. 분명 서로의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사고법은 한 걸음 비켜서서 세계를 공평하게 바라보는 방법이자 사유를 객관화하는 방편이 됩니다.

 

권영상 시인이 이러한 상호 이해의 성찰 과정 속에서 창의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우화적 동시입니다. 우화는 일종의 비유담으로 동물들에게 일정한 유형의 성격을 부여하며, 인간의 행동을 이야기하고 훈화합니다. 그 우화는 사건의 전후 상황에 대한 설명 없이 간단명료하게 사건의 윤곽만을 보여주어서 응축의 효과가 있고, 인물이나 사건, 대화는 시인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한 시적 장치로 적합합니다. 또한 그것들은 주제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고 다의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어 풍부한 시적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해 지기 전에

한 번 더 만나줄래?

 

하루살이가 나귀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저녁은 안 돼.

내일도 산책 있어.

모래, 모레쯤은 어떠니?

 

그 말에 하루살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섭니다.

 

넌 너무도 나를 모르는구나.

 

  ―「하루살이와 나귀」 전문

 

남을 잘 모르면서 자기 생각대로 남을 이해하면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게 슬픔을 주게 됩니다. 「하루살이와 나귀」가 그 좋은 실례가 되겠지요. 하루살이의 삶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귀가 하루살이에게 자꾸만 내일도 모래도(모레쯤) 만나자고 졸라대니 하루살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서고 말지요. 이 「하루살이와 나귀」는 철저하게 동화적 상상력을 끌어들인 동시입니다. 이때 권영상 시인은 종결어미를 ‘~지’ 대신 ‘~다’로 보편화하여 공감의 폭을 확대합니다. 종결어미 ‘~지’가 다소 자기 고백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화법이라면, ~다’는 일반적이고 상황을 객관화하는 화법으로 그만큼 의미화에 기여하기 때문이지요.

 

권영상 시인은 이 같은 언어의 운용법으로 독창적인 이야기 세계를 형상화하며 시적 의미를 구현해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행복하려무나, 얘야」, 「나무와 산」, 「메꽃씨」, 「참음을 통해」 등은 다 인간사와 조응관계를 지닌 좋은 이야기 동시들입니다. 객관화하는 시적 사유는 세계를 보다 공정하게 바라보고 보편화하는 시적 탐구 과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햇빛 좋은 날’의 시적 의미

 

권영상 시인의 시적 탐구 과정은 가족에 관해서도 그대로 적용합니다. 곧 아버지는 “겨우 두 개의 손으로/우리 집을 먹여”(「아버지의 손」) 살리는 고달픈 존재로, 식사 때면 “기어이/밥상 앞에 나를 불러 앉히는”(「엄마는」) 엄마는 잔소리꾼으로, 가족을 모두 자기중심으로 해석하고 판단합니다. 그런 생각 많은 아이의 주관적 사유가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속 깊은 아이로 변화하면서, 비로소 진정한 가족애를 이룬다는 것이지요.

 

건조대 위에서 보송보송 마르는

촘촘한 빨래들.

빨래 마르는 것만 봐도 안다.

햇빛 좋은 날의

우리 가족

―「햇빛 좋은 날」 3연

 

「햇빛 좋은 날」은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건조대에 널어놓은 빨래에 비유한 동시입니다. 이 동시는 ‘보송보송 마르는 촘촘한 빨래’와 ‘햇빛 좋은 날’의 의미가 일원화되어 따뜻한 행복감을 자아냅니다. 햇빛 좋은 날일수록 빨래가 보송보송 잘 마르는 것과 같이 가족의 행복도 서로의 배려와 이해 속에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햇빛 좋은 날」도 시적 화자가 한 걸음 비켜서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보편화해 놓았던 것이지요.

 

이와 같이 『햇빛 좋은 날』은 ‘생각 많은 아이’와 ‘속 깊은 아이’가 세상을 인지해나가는 시적 탐구 과정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구현해낸 동시집입니다. 이 세상에는 “멍석에 싸놓은 닭똥이/저도 줄콩인 줄 알고/달각달각 함께 말랐다.”(「저도 줄콩인 줄 알고」)고 한 것처럼 다같이 함께 살아갈 뿐 아니라 “반짝반짝 별의 축복을/받지 않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별의 축복」)고 한만큼 모든 것들은 다 소중한 의미를 지닙니다.

 

바로 이 『햇빛 좋은 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소중하다는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의미화해 놓은 동시집인 것이지요. 곧 생각 많은 시적 화자를 통한 동심의 탐구로 물상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눈을 뜨게 하고, 또 남의 입장을 배려하는 속 깊은 시적 화자를 통해 따뜻한 가족애와 공동체를 일깨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이 『햇빛 좋은 날』은 동시를 써온 지 30년, 권영상 시인이 일관성 있게 추구해온 시적 과제와 그 탐구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 따로 한 권으로 마련해둔 아주 특별한 동시집인 셈입니다.

 

동시집 <잘 커다오, 꽝꽝나무야>(문학동네) 해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