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우리 정신을 지킨 50년, 신현득

권영상 2020. 9. 2. 14:32

우리 정신을 지킨 50년, 신현득

권영상

 

 

1. 고구려 아이

 

고구려의 엄마는

아이가 말을 배울 때면

맨 먼저

‘고구려’라는 말을 가르쳤다.

다음으로

‘송화강’이란 말을 가르쳤다.

 

(중략)

 

아이가 커서

골목을 뜀박질하게 되면

고구려의 엄마는

요동성 이야기를 해 주었다.

고구려 사람은 겁내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다는 걸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엄마는

요동성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고구려는 언제 멸망하였는가? 사전을 찾아 보니 668년입니다. 그 7년전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소정방으로 하여금 평양성을 치기 위해 7개월이나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연개소문에게 전멸 당하고 맙니다. 고구려의 최후는 역시 고구려다웠습니다. 큼직한 당나라에 끝까지 저항했던 아름다운 민족혼을 지녔댔습니다.

그런 나라 고구려가 강성했던 것은 아이를 가진 어머니들이 넓은 땅 ‘고구려’와 ‘송화강’이란 말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땅을 지키기 위해 장렬하게 목숨을 던질 줄 아는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라지요.

 

이 시는 신현득 시인의 두 번째 동시집 <고구려 아이>에 들어있는 ‘고구려 아이’의 앞부분입니다.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워주는 이야기 형식의 시입니다. 활달하고 강성한 고구려를 배경에 깐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1400년 전의 역사속으로 거슬러 올라간 신현득 시인의 폭넓은 시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비눗방울 연구가 방울 아저씨가

집 한 채 들어갈 만한 비눗방울을 연구했지.

엄청난 크기, 꺼지지 않는 여기에다

열고 닫는 문을 두었지.

 

비눗방울 안에 꽃밭을 두고

꽃씨도 심고

꽃이 핀 봄날

 

살림을 옮기고

식구가 모두 탔지.

엄마 닭과 병아리와 강아지도 태웠지.

 

“우린 떠나요. 먼 여행이죠. 안녕!”

마을 사람 우리도 손을 흔들었지.

 

    -‘비눗방울 타고 태평양 건너기’의 앞부분

 

어떤가요? 이제 이 시를 쓴 시인이 어떤 분인지 어림잡을 수 있나요? 앞의 ‘고구려 아이’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종적인 상상이라면 이 시는 비눗방울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가는 횡적 상상의 산물입니다. 앞의 시가 먼 과거에 가 있다면 이 시는 현재라는 시간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의 상상력은 현재와 과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태평양 너머의 세계까지 막힌데 없이 열려 있습니다. (신현득 시인의 머리에는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상상의 문이 있습니다.) 그 바탕에는 올바른 민족의식과 꿈을 확장시켜주고자 하는 뜻이 있겠지요. 그러나 어찌 보면 어린이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답답하고, 싱겁고, 공부만에 매여사는 아픔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따뜻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

 

신현득 시인은 일제가 우리를 잔혹히 짓밟던 1933년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나셨지요. 일제에 땅을 빼앗겨 집안 살림이 어려워지자, 아버지를 따라 중국 길림성으로 갔지요. 그러나 그곳마저 살기가 힘들어 9살에 다시 가족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 네 명의 형제와 어머니마저 잃게 됩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마을 면사무소 급사로 일하며 훗날 사범학교를 마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시지요. 그런 슬픈 소년 시절의 추억을 시인은 어떻게 간직하고 살았을까요.

 

 

지하철에 앉아 뜨개질하는 할머니

한 코 짜고, 한 코 한 코 또 한 코......

 

손자 주려고 짜나 보다

빨간색 벙어리장갑

 

다섯 살 개구쟁이가 있나 보다

장갑 크기가 그래

 

옆자리,

옆자리 사람이

할머니 손놀림을 본다

 

‘뜨개질 할머니’의 앞부분입니다.

화자는 전철의자에 앉아 빨간색 벙어리장갑을 짜고 있는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편의 잘 그려진 정물을 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장갑 크기로 보아 다섯 살 개구쟁이 것이 아닌가, 하고 여깁니다.

어린 시절, 힘들게 겪었던 궁핍과 방황과 가족을 잃고 살아온 시인의 아픈 추억이 이렇게 살아났군요. 오히려 따스하게, 애정어리게, 곡진하게 시로 피어났습니다.

 

‘문패를 단다’는 시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집을 사서 왔어요./ 우리 내외 막노동을 했지요.”.......“아이들 옷도 헌걸 얻어다 입혔어요. /가방도, 책도, 필통도 그랬지요.”.......“아끼고, 줄이고, 쪼개고, 모으는 데에/ 저랑 동생도 힘을 모았어요. 꿀꿀이를 턴 걸요.”

‘제비가 물고 오는 것’에는 제비가 물고 오는 게/ 요술 박씨여야 하나?/ 금돈, 은돈이 쏟아져야 하나?// 텃밭에 가꿀 수박씨 하나면 어때?

이 시들을 읽어 보면 신현득 시인의 삶의 미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절약입니다. 일확천금이 아니라 일하여 얻는 소박한 소득입니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따스한 사랑입니다.

 

 

3. 이따만한 사람 신현득

 

신현득 시인과 함께 길을 걸을 때면 그분을 배려해 나는 키를 낮춥니다. 허리를 더 구부정하게 합니다. 그게 좋아 그러실까요. 키가 좀 작으신데도 가끔 저와 함께 길 걷기를 좋아하십니다. 신현득 시인은 양복에 중절모 쓰시기를 좋아합니다. 가방 메시는 것도 또한 좋아합니다. 가방은 항상 터질 듯이 빵빵합니다. 그 안에는 몽당연필과 지우개가 들어있는 생철필통과 책들과 원고지로 꽉 차있습니다. 붓펜으로 쓰시는 일기장도 있습니다. 늘 무거운 가방을 짐처럼 지고 다니십니다. 그 짐의 무게로 21권의 동시집과 수없이 많은 논문을 발표하셨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작은 거인’이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키 작고 빡심 세면

작은 고추라지

주먹까지 야물면 매운 고추라지

 

우리 반 덕수는

작은 고추다

미술도 음악도 못하는 공부 없다

 

다릿심도 좋아서

달리기도 날쌔다

씨름도 팔씨름도 우리 반 챔피언

 

누구든지 개 앞에선

거드름을 못 피운다

작은 고추 덕수 진짜로 맵다.

 

   -‘작은 고추 덕수’

 

‘작은 고추 덕수’는 암만 생각해도 신현득 시인이지 싶습니다. 키 작고 빡심 세고, 미술 음악도 다 잘하고, 다릿심도 좋고 씨름 잘 한다면 맞습니다. ‘누구든지 걔 앞에선/ 거드름도 못 피운다’면 그도 맞습니다. 언젠가 <아동문학평론>이라는 잡지에서 ‘손 꼽히는 아동문학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로 뽑힌 이가 바로 ‘작은 고추’ 신현득 시인입니다. 키는 작아도 문학적으로 ‘이따만한’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4. 착한 잠재성 일깨우기

 

사람 사는 세상에 시인이 있어야 할 진짜 이유는 뭘까요? 참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착한 잠재성에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좀 쉽게 말하면 작고 보잘 것 없고, 나약한 것들에게, 이를테면 자리를 잡아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그 자리에 모두들 당당히 설 때 세상은 아름다워질테니까요.

 

내 책상 주소가 있듯이

내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

-민락동 754

동민이 집, 동민이 방

동민이 책상 위

동민이 필통 속

 

신동민 내 주소는

민락도 754번지 앞에

주소가 더 있다

-경기도 의정부시

 

그 주소 앞에 주소가 더 있지

-지구별 대한민국

지구별 앞에도 주소가 더 있다

-은하게 안 태양계

 

맞았어

내 몽당연필 주소도

고쳐 써야겠네

 

‘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는 시의 뒷부분으로 이 동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합니다. 앞 부분은 세계가 축소되는 점강의 방식으로, 뒷부분은 확장되는 점층으로 방식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앞 부분은 ‘몽당연필’의 주소를, 뒷부분은 ‘내 주소’ 앞에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있는 주소를 찾아준다는 내용입니다. ‘몽당연필’이나 경기도 의정부시 어디에 있는 ‘내 주소’는 그 포지션이 매우 미약한 한계를 지니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에게 존재감을 심어주어 그들의 착한 잠재성을 일깨우는 것, 이것이 시 속 화자의 의지입니다. 다시 말해 힘없는 것들에게도 당당하게 자리를 배려함으로써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려는 것,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신현득 시인의 시에는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농후하게 배어있습니다.

 

5. 우리 것을 사랑한 시 정신

 

언젠가 신현득 시인이 ‘새싹회’라는 단체의 이사장 일을 맡아 보고 계실 때입니다. 어린이 잡지사에서 어린이날을 맞아 대담을 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신현득 시인은 그 잡지사의 이름이 프랑스 말로 된 것을 알고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하필이면 어린이 잡지에 남의 나라 말을 쓰냐는 거였습니다.

이 동시집 속에도 ‘빡심’이니 ‘어금버금’, ‘순단이’, ‘ 차돌이’, ‘센둥이’ 등의 참한 우리 말이 보물처럼 많이 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시인은 우리 것을 사랑했고, 우리 정신을 지키고자 50년이 넘도록 시를 써왔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무한한 상상의 힘과 세상을 보는 거인정신, 검소한 삶과 노동,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시인이기도 합니다.

 

신현득 동시집 <몽당연필과 지우개>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