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행복을 위해 잠시 멈출 줄 아는 일, 김현숙 동시집

권영상 2020. 9. 2. 15:01

 

행복을 위해 잠시 멈출 줄 아는 일, 김현숙 동시집

권영상

 

 

김현숙 시인의 <아기 새를 품었으니>와 마주 앉습니다. 행복합니다. 아무리 덥다해도 7월 볕으로 참나리는 피고, 글라디올러스는 향기를 뿜네요. 그렇듯이 여름날의, 시인의 시 바구니에서도 시의 향내가 담뿍 납니다. 그 향내 사이로 데구르르 굴러나오는 것, ‘축구공 하나’ 있습니다.

 

여름 한낮

축구공 하나가

동네 아이들

다 데리고 나왔다

학교 운동장으로

 

언젠가 시인들의 시를 읽는 자리가 있었지요. 나는 거기서 이 시 ‘축구공 하나’를 발견하고는 세상에나! 하고 놀랐지요. 김현숙 시인은 그후 첫 번째 동시집 <특별한 숙제>를 출간했는데 거기에 실린 시들 모두 또 다른 이름의 축구공들처럼 제 눈을 사로잡았지요. 김현숙 시인의 시가 그렇게 특별한 것은 머리말에서 밝힌 시인의 이런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만의 빛깔로 동시를 빚어 동시 마을로 갈 수 있을까. 또 어떻게 그 마을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특별한 숙제>는 정말이지 독자들의 열광으로 10쇄를 찍었고, 시인은 동시단에 아주 드문 독특한 빛깔을 지닌 시인이 되었습니다.

 

김현숙 시인은 시를 무겁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볍게 대하는 것도 아니지요. 복잡한 현상을 단촐하게 간추려내어 독자의 시선에 딱 맞추어내지요. 그래서 그의 시는 짧고 명쾌하지요. 그리고 또 하나, 축구공이 그러하듯 달려 나가는 방향성을 지닌다는 점입니다. 시인의 시는 어린 독자의 성장 특성을 닮아 어느 한곳을 향해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지요.

시인의 두 번째 동시집 <아기 새를 품었으니>를 앞에 놓고 그의 시가 세상을 품거나 다독이거나 우리 귀에 속삭여줄 이야기를 상상합니다. ‘특별한 숙제’ 이상의 특별한 세상과 곧 만날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설렙니다. 나는 그 설렘이, 언젠가 김현숙 시인을 뵈었던 태화강 대숲에 부는 2월 바람처럼, 잔잔한 노을처럼 그렇게 곱고 아름답기를 예감합니다.

 

 

1. 새로운 시작

 

지구별에

첫발 내디뎠다고

 

꾹!

찍어준

발바닥 도장

 

   -‘출생신고’

 

이 시는 김현숙 시인의 시를 열어가는 단초가 아닐까 합니다.

인간의 고향은 우주지요. 우주에서 태어나 별을 여행하다가 어느 날, 어떤 인연으로 이 지구별이라는 중간 기착지에 불시착하여 인간이 되는 거지요. 아기의 이 ‘발바닥 도장’은 어쩌면 지구별 여행을 허락한다는 패스포트일지 모릅니다.

하필 왜 발일까요.

발은 우리의 몸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주는, 여행자에겐 필수적인 신체의 한 부분입니다. 김현숙 시인의 시에서 발은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이 ‘첫발’로부터 지구는 자전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해는 돋고, 꽃은 피고, ‘나’라는 존재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아기의 세상은 점점 넓어지고, 세상을 이해해가는 영토는 점점 튼튼해지고, 여기서부터 시인이 걸어가 이르고자하는 방향 또한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똑! 똑!

 

문 열 테니까

놀라지 마

 

그래도

수박은 놀랐는지

 

쩌억!

소릴 지른다

 

    -‘놀라지 마’

 

시 속 여행자가 만나는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네요. 한 세계에서 그와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데엔 갈등과 긴장이 놓여있기 때문이지요. 똑! 똑! 누가 바깥에서 이쪽을 향해 손기척을 냅니다. 작고 동그란 세계에 갇혀 살아온 수박씨들은 곧 열려날 세상이 기대되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합니다. 놀라지 말라는 경고에도 그들 앞에 펼쳐진 세상에 놀라 쩌억! 비명을 지릅니다. 수박 속 씨앗들이 바라본 세상과 거기 고개를 숙이고 빤히 들여다보는 낯선 얼굴은 또 얼마나 씨앗들을 놀라게 했겠나요.

발바닥 도장을 찍고 지구별에 도착한 어린 여행자의 눈에 이 세상은 경이롭기만 합니다. 멈출 수 없지요. 미지의 세계가 그를 축구공처럼 이끌어냅니다.

 

 

2. 내 길을 갈 거야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게 힘을 빌리지 않을 거야

 

도깨비바늘처럼

사람들 옷자락에 매달려가지도 않을 거야

 

멀리 가지는 못하더라도

내 힘으로 갈 거야

 

톡 톡 톡

내 길을 갈 거야

 

   -‘봉숭아 씨앗’

 

구멍 나고

찌그러진 축구공

소나무 가지에 걸렸다

 

이리 튀고

저리 튀더니

콩닥거리는 심장을 품은

오목눈이 둥지가 되었다

 

이제 아기 새를 품었으니

맘대로 뛰어 놀 수 없겠다

 

저렇게 가만있어 보긴

처음일 거야

 

   -‘아기 새를 품었으니’

 

좁쌀만한 봉숭아 씨앗이어도 존재는 당당합니다. 깜찍할 정도로 도발적이고 도전적입니다. 이미 앞서 걸어간 이들의 전철을 밟아가는 건 질색이라는 거지요. 앞서 말한 ‘나만의 빛깔로 시인의 마을’에 당당히 입성하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선연히 드러납니다. 누군가 이미 걸어간 길은 시인이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닙니다. 민들레나 도깨비바늘 식의 이동이 아무리 좋다해도 그거는 안 될 말입니다. 비록 멀리 가지 못할지언정 내 힘으로 내가 갈 길을 만들어가겠다는 거지요. 고되어서 더욱 행복한 길, 그길이 2월 바람 같은 시인의 길입니다.

‘아기 새를 품었으니’는 김현숙 시인의 시가 종국에 가 닿는 지점을 말해주고 있네요. ‘찌그러진 축구공’이 되어서라도 오목눈이의 둥지가 되겠다는 거지요. 내가 좀 힘들어도 오목눈이 아기 새를 품어 자유로운 하늘로 날려 보내겠다는 꿈이 있어 그의 시에서는 향기가 납니다. 그 꿈이 시인의 행복이라면 행복을 위해 잠시 멈추는 법을 보여줍니다.

 

 

3. 시는 즐겁다

 

개나리 꽃망울

터진다

감나무에 새 잎

터진다

개구리 입

터진다

놀이동산에 팝콘

터진다

아이들 웃음

터진다

 

남에서

북쪽으로

봄, 봄, 봄

봄이 터진다

 

   -‘터진다’

 

김현숙 시인의 시들은 ‘축구공 하나’처럼 모두 즐겁지요. 즐거워서 좋지요. 이 시 속 개나리 꽃망울, 감나무 새잎. 개구리 입, 팝콘은 아이들 웃음처럼 펑펑 터져납니다. 지금은 남에서 북으로 봄이 봄봄봄 터지며 북상하는 때. 움츠렸던 목숨들이 되살아나는데 어떻게 기쁨을 참을 수 있겠어요. 그 참을 수 없이 쏟아내는 생명의 환희를 시인은 ‘터진다’는 단 하나의 말로 발현시킵니다. 그와 동시에 ‘터진다’는 노래처럼 반복운율을 만들어내고, 각 소재 속에 숨겨놓은 ‘터진다’의 은유를 찾아내게 하는 사유 활동을 펼칩니다. 이것이 김현숙 시인의 시가 예사롭지 않은 까닭입니다.

 

신불산 능선은 억새평원이다

가을이면

사람들이 억수로 찾아와

은빛으로 반짝이는

억새에 빠진다

 

조심해!

억새는 억세니까

 

이름만으로 억센데

진짜는 더 억세니까

 

  -‘억새’

 

우리말은 소리 나는 대로 지어진 소리말이지요. 시인은 시의 재료를 그 소리말 부림에서 찾아냅니다. 제재인 ‘억새’와 비슷한 말소리 ‘억수로’와 ‘억세다’를 뽑아내어 동음이의어의 말재미를 만듭니다. 말 재미만인가요? 아니지요. 신불산 능선의 반짝이는 억새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억수로’ 찾아오는 사람들로 표현하고, 억새는 억세니까 자칫 손을 다칠 수 있다는 정보까지 만들면서 가을 정취에 빠져들게 합니다.

 


4. 잘 익은 시의 빛깔

 

감나무 발전소는 느리다

 

감 이파리가 태양열 발전을 시작한다

 

두 계절이 지나서야 불이 켜진다

 

감나무에 켜진 알전구들

 

가을이 환하다.

 

  -‘홍시’

 

시인의 시에도 이제 가을이 왔네요. 감나무 발전소가 잘 익은 ‘홍시’를 빨갛게 열었네요. 생명 활동이 시작되어 끝마칠 때까지의 감나무의 일 년을 빚어낸 단아한 시입니다. 시의 움직임이 퍽도 느려지고 시맛은 깊어집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런 서정조차 낯설고 경이롭게 그려내기 위해 은유의 불을 켭니다.

감나무는 잎 피는 시기가 늦다는 말을 시인은 ‘감나무 발전소는 느리다’로, 감 이파리의 광합성 작용을 ‘태양열 발전’으로, 감이 익기 시작한다를 ‘불이 켜진다’로, 감나무에 매달린 빨간 홍시를 ‘불 켜진 알전구’로, 이렇게 은유를 읽어내는 재미를 숨겨놓지요. 한 장의 잘 그린 그림을 보는 듯한 아담한 가을 풍경입니다.

 

지구별을 찾아온 어린 여행자가 여기 가을까지 걸어왔습니다. 시인의 시가 다시 겨울을 맞고 봄을 맞으면서 더욱 달콤하고 향기로워지기를 바랍니다. 김현숙 시인의 행복한 동시 여행에 잠시 동승한 기쁨을 오래오래 간직하겠습니다.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김현숙 시인 동시집 <아기새를 품었으니> 2020년 국민서관,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