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김종상의 동시와 동화세계

권영상 2020. 9. 2. 14:03

일과 어머니를 찬미한 大地와 그리움의 문학

-김종상의 동시와 동화세계

권 영 상

 

 

들어가는 글

 

김종상, 그는 가식없고 후덕한 인품의 소유자다. 또한 사람을 이끄는 강한 흡인력의 소유자다. 그의 신체적 특성이 그렇듯 그는 ‘거인적인 문학가’요, 아동문화 운동가이며 훌륭한 교육자다.

김종상이 문학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1959년 무렵이다. 『새벗』창간 7주년 기념, 문예작품 현상 모집에 동시 <산골>이 뽑히면서부터다.

그 이듬해인 196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산 위에서 보면>의 당선으로 그는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1958년, 소슬 <부처손>이 곽종원의 심사로『새교실』에 뽑힌 때라고 봐도 되겠다.

 

 

그는 그로부터 거의 40년 가까이 문학에서 단 하루도 손을 떼지 않았다. 사회적 대접이 빈곤한 아동문학을 생명처럼 가꾸어 온 그의 문학 행적에 깊은 경의를 보낸다. 그러나 생각하면 그가 그토록 아동문학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문학적 열정뿐만이 아니라 뜨거운 교육적 열의에서 비롯되었음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이재철은 김종상론에서 ‘교단 문학인’이라 했다.

그것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김종상은, ‘초기에 소설에 손을 댔다가도 성인문학을 끝내 포기한 것은 성인문학은 아이들에게 읽어줄 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 고 했다. 그 후로 그는 동시를 쓰게 됐고, 거기에서도 한계를 느껴 다시 동화를 써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다양한 채널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는 또 그 동안 ‘글짓기 교육’과 ‘시(時) 사랑’ 운동에 심혈을 기울여 왔고, ‘동요부흥’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과업으로 그는 14권의 동요동시집과 20여권의 동화와 소년소설, 그리고 40여권의 글짓기 교육에 관계되는 저서를 냈다. 물론 동요 400곡도 얻는 커다란 수확도 거두었다.

1960년대 들어 김종상은 박경용, 조유로, 유경환, 신현득과 함께 본격 동시 운동을 일으킨 주역로서 여전히 1920년대식 시법에 안주하고 있던 한계에 대한 철저한 반성적 인식을 갖게 된다. 김종상은 신현득과 함께 시와 동시의 동격화와 예술성과 교육성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러한 그의 문학사적 활동은 김종상 문학을 접근해 가는데 있어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김종상은 1935년 경북 안동군 서후면 대두서에서 아버지 김계명과 어머니 강봉선 사이에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본의 앞잡이인 문곡이라는 조선 순사의 농간으로 농토의 대부분을 일제에 빼앗긴다. 게다가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피해 부친마저 국외로 피신하면서 가산이기울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초동으로 자란다. 그후 해방과 함께 고향을 떠나 안동군 풍산면 죽전동 관음사촌(대밭골 관음절)으로 이주하여 어렵게 성장한다. 그가 모친의 타계 후 연작시 ‘어머니’를 쓴 것도,그리고 그의 시의 곳곳에 나타나는 ‘일’도 따지고 보면 부모의 ‘노동’의 모습과 자신의 ‘초동’으로의 성장에서 기인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학 속에는 ‘일’과 ‘어머니’에 대한 글이 유독 많다. 비록 그렇지 않은 작품이라 빙산처럼 숨어 있는 심연의 밑바닥엔 ‘어머니’와 ‘일’에 연계된 안개같은 이미지의 고리가 있다. 그러므로 ‘일’과 ‘어머니’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주는 소중한 도구 또한 문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처럼 비중있게 들아는 김종상 문학의 ‘일’과 ‘어머니’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동시 속에 드러나 일과 어머니

 

김종상 동시선집 《날개의 씨앗》 (오늘, 1996년 1월 15일)에 보면 그는 자신의 문학을 4시기로 나누고 있다. 첫째의 시기는 동시집 《흙손 엄마》와 《소라피리》를 낸 1960년대로, 두 번째 시기는 〈어머니,그 이름은〉과 〈우리땅 우리 하늘〉을 낸 1970년대, 세 번째 시기는 〈하늘빛이 쌓여서〉, 〈어머니 무명치마〉, 〈하늘 첫동네〉, 〈땅덩이 무게〉, 〈동시를 생각하셔요〉를 낸 1980년대로, 그리고〈생각하는 돌맹이〉와 〈매미와 참새〉, 〈나무의 손〉을 낸 1990년대가 그것이다. 이러한 분할을 10년 단위의 십진법적 구분이다. 그러나 이시기의 시들을 일별하면 나름대로의 성격과 특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 분할을 보다 포괄적으로 나눈다면 교단 첫출발지인 상주를 중심으로 하는 시기와 서울로 이주한 시기로 나눌 수 있겠다. 그는『아동문학평론』‘96년 5월호에서 시골 생활 무렵의 글은 대부분 한가로운 전원생활과 은혜로운 자연의 풍광을 스케치하듯 그려냈다고 했으며 서울 생활로 뛰어든 것을 대단한 변화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것을 뒷받침하듯 그의 시의 소재를 보면 그가 처한 환경이 시에 어떻게 작용하였는가를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위의 책에서 김종상은 ‘1973년 나는 어머니를 잃었다. 자신 모두를 희생해서 길러주신 어머니를 한 번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점이 한이 되어 나는 한동안 어머니 생각만을 동시로 썼다’고 했다. 이것으로 보면 그의 문학을 다시 ‘어머니’의 생존과 상실을 근거로 구분할 수도 있다.

위와 같이 그의 작품을 구분짓는데 몇 가지의 복합적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의 시에 한결같이 노정되는 시상의 저변에는 ‘일’과 ‘어머니’가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1. 일에 대한 이미지

 

텃밭의 채소도

울타리의 호박도

아버지가 가꾸셨지.

 

열 마지기 벼논에서

물어 보세요.

어느 한 포기에도

손 닿지 않은 게 있는가?

 

군에서

장군이 된 형님에서

등에 고삐 지고

풀 뜯는 황소까지.

 

그 손으로

기르셨기에

아버지 손 마디엔

심이 굳고

못이 박혔습니다.

 

                     -<아버지>전문

 

바르비종의 자연주의 화가 밀레는 ‘손’을 가리켜서 .‘사상의 겸손한 사자(使者)’라고 했다. 열 마지기의 벼논이 가꾸어지는 것도, 호아소가 살이 찌는 것도 다 아버지의 손이 간 결과다. 대지 속에서 흙과 더불어 벼를 익히고, 생명을 성장하게 하는 이 노동의 시는 ‘참된 대지의 노래’가 아닐 수 없다. 일은 고된 수고로움을 필요로한다. 그러나 그 수고로움의 뒤켠에는 언제나 정직한 결실이 예고된다.

 

그처럼 김종상의 시에는, 아버지의 손이 그렇듯 가벼운 기교가 없다. 손재주보다는 잘 발달된 인간미와 성실한 언어와 수고로운 땀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직 겸손하고 숭고한 노동의 아름다움만이 비장한 유산처럼 남는다. 그것은 아버지의 ‘손’이 겸손하고 자기헌신적인 감동 전달의 사자로써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이 시에서 ‘손에 심이 굳고 못이 박히도록’생활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적인 한 사나이를 보고 있는 것 같아 더욱 숙여진 고개를 들 수 없다.

 

 

벼논의 메뚜기는

벼메뚜기

노릇노릇 익어가는

벼이삭처럼

메뚜기도 노오랗게

익고 있네요.

 

콩밭의 메뚜기는

콩메뚜기,

볼록볼록 알이 드는

콩꼬투리처럼

메뚜기도 토실토실

살이 찌네요.

 

  -<메뚜기>전문

 

이 시는 얼핏보면 농촌의 한가하고 풍등한 자연을 스케치한 것 같다. 그러나 실은 메뚜기의 보조관념을 눈여겨 보면 그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메뚜기의 살이 찌는 모습을 ‘익거가는 벼이삭’과 ‘알이 드는 콩꼬투리’ 에 빗대고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앞의 시 <아버지>에서 보았듯이 벼이삭이 익고, 콩꼬투리가 알이 드는 것은 아버지의 손이 필요했다. 아버지의 손, 즉 일이라는 과업이 없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자연은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노고를 바란다. 그러나 그의 시는 그런 노고를 시의 수면으로 끌어 올리지 않고 있다. 그것은 시의 사명은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지 노동하는 이의 고뇌를 부상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시인의 문학관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겠다.

 

 

못자리판 논둑에

찔레꽃이 하얗다.

피사리 하시는 아버지의

하얀 무명 바지 저고리.

황새가 날개를 접으며

논두렁에 내려앉는다,

새하얗게 빛나는

황새의 깃 옷.

아버지는 허리를 펴시고

황새를 바라보았다.

황새도 목을 늘여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물 실린 논귀 가득히

햇볕은 부서져서 반짝이고,

들판은 고요하기만 했다.

    

              -<초여름>의 앞 부분

 

이 시는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노래다. 태양의 강열함과 색채의 환희가 시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이 시의 처음과 종말을 지배하는 ‘찔레꽃, 무명 저고리, 황새, 햇볕’의 ‘흰빛’ 이미저리는 ‘우리의 대지’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일을 노래한 시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면서도 또한 가장감정이 잘 억제된 시다. 상황의 색채적 토운은 화려하지만 아버지와 황새, 그리고 대지가 서로 교감하는 분위기는 그지없이 고요하고 그윽하다. 상호간의 심리적 호흡이 잘 일치되고 있다. 흰 무명옷을 입은 아버지와 깨끗한 황새의 이미지가 황홀하게 조우하는 시다.

 

 

‘수직으로 낙하하는 선은 이미 그 반대인 수평선을 암시한다.’는 말이 있다. 날아 내리는 황새의 발끝에는 이미 ‘피사리하는 못자리판’이라는 수평적 대지가 있다. 그것에서 수목처럼 뿌리 박고 서 있는 아버지와 황새의 수직적이며 대칭적인 이미지는 넉넉히 회화적이다. 구뿐만이 아니라 두 수직적 존재의 ‘마주 바라보기’는 이미 모든 고단함과 고통의 한계를 뛰어넘어 누가 황새이고 누가 아버지인지 모를 경지로 이끌어 올리고 있다.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의 희열은 무엇인가. 그것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극도

로 색채가 자제된 ‘고요’함이다. 고됨과 한가로움, 지상적 존재와 비상적 존재, 무거움과 가벼움의 ‘아버지’와 ‘황새’의 영혼이 합일 되는 곳, 그곳이 바로 대지에서 비롯됨을 이 시는 충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위의 시들에서 얻을 수 있는 일의 이미지는 고단함을 노정시키되 그것을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경지로 보다 높이 승화시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1-2.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

 

어머니에 대한 그의 시는 어머니의 생존과 사별 후의 시로 나눌 수 있겠다. 생존 시의 시는 대부분이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헌신적인 노고’가, 사별 후의 시는 반대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서러움’의 감정이 곡진하게 드러나 있다.

 

메밀꽃도 지고

벼이삭 머리 숙이면

엄마는 밭머리에서

아침 해를 맞고

저녁 해를 보낸다.

 

언제나

흙손을 털고

지친 허릴 펼 때면,

주름진 골짝마다

 

산그늘이 내리고

어느 산골에서

부엉이 운다.

 

           -<흙손 엄마>의 앞 부분

 

 

이 시는 그의 초기 시집《흙손 엄마》에 나오는 표제시다. 그의 시가 대부분이 그렇듯 이 시도 정밀한 터치나 펜의 기교 등의 문제보다 항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추구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 만나는 보편적인 인상은 그가 자질구레한 마띠에르의 고삐에서 풀려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대상을 단숳ㄴ하게 만들어 그 속에 그이 고뇌를 ‘정중하게 불어넣는 힘’ 을 가지고 있다.

 

이 시는, 엄마는 가을이 되면 밭머리에서 아침을 맞고, 밭머리에서 저녁을 맞는다는 내용이다. 표면에는 앞의 노동에 관한 시와 마찬가지로 일을 중심으로 한 시다. 그러나 그 시의 이면에는 어머니의 희생적 노고가 깔려있다. 머리 부분에서 말했지만 김종상은 어린 시절을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어머니의 손에 의해 성장한다. 아버지가 일제의 눈을 피해 해외로 피신하고, 어머니는 혼자 남아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품팔이’를 하고 자식을 키워 나가셨다.

김종상은 그런 어머니를 근접한 거리를 두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바라보며 성장해 왔을 것이다. 이 시도 바로 그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쓰여진 시다. 인간에 있어 가장 원형적인 이념은 고향과 어머니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말이 있다. ‘어머니’는 김종상에게 있어 일을 통하여 사랑을 가르치는 훌륭한 순교자 였다.

 

들로 가신 엄마 생각,

책을 펼치면

책장은 그대로

푸른 보리밭.

 

이 많은 이랑의

어디만큼의

호미 들고 계실까,

우리 엄마는.

 

글자의 이랑을

눈길로 타면서

엄마가 김을 매듯

책을 읽으면

 

싱싱한 보리숲

글줄 사이로

땀 젖은 흙냄새

엄마 목소리.

 

이 작품도 그의 초기시에 해당하는 1968년 동인지『은방울』에 실린 시다. ‘글자의 이랑을 타며’ 글을 읽는 화자와 ‘싱싱한 보리밭’의 이랑을 매시는 어머니가 평행적 구조를 가지며 짜여진 흠이 없고 완벽한 시다.

이 시의 발단은 ‘책장’과 ‘이랑’의 오버랩에서 비롯된다. 또한 그것은 시가 발전되어 갈수록 끝내는 동일성을 갖는 효과를 거둔다. 책장이 이랑이고, 이랑이 책장이 되는. 이 시에서 그것이 가능한 것은 ‘책상 위의 책’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싱싱한 보리밭’이라는 넓은 공간으로 나아가는 열린 통로가 있기 때문이다. 그 통로가 바로 화자와 어머니 사이에 장치된 상상의 채널이다. 화자는 상상이라는 채널을 통하여 ‘싱싱한 보리밭’으로 나아가 그 ‘보리밭’ 을 책 속으로 다시 이끌고 들어온다. 그리고 그 책 속의 ‘싱싱한 보리밭’에서 ‘어머니의 땀에 젖은 목소리’와 만난다.

 

방 안이라는 공간과 보리밭이라는 공간적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이 시의 배후에는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있음을 우리는 간파해야 한다. 그리움은 상상이라는 기제를 통하여 ‘가능하지 않은 현실’을 ‘가능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메신저의 구실을 한다. 그 가능성은 육친에 대한 곡진한 그리움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와같이 그의 ‘어머니’에 대한 저변에는 어머니에 대한 원초적인 그리움의 이미지가 깔려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어머니, 그 이름은

두고 온 고향마을,

오솔길 꽃가마에

다홍치마 곱던 사연.

돌각담 초가 삼간

전설같은 등불이네.

어머니, 그 이름은

서러운 고향 하늘.

서낭당 돌무더기

원을 실어 탑이 되고,

억새숲 영마루에

그리움의 달이 뜨네.

 

   -<어머니, 그 이름은>의 전문

 

1973년 김종상은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겪는다. 어머니는 생애에 있어 그에게 한없는 우주요, 믿음이요, 종교적 존재였다. 그런 어머니와의 결별은 우주와 빋음과 종교의 살실과도 같은 아픔이었을 것이다. 이시는 어머니를 사별 뒤인 1974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승을 떠난 어머니를 ‘전설같은’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서러움이 담긴 애상의 ‘하늘’로 보고 있다. 그에게 있어 어머니는 아늑한 ‘고향’이었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상실은 또 하나의 지리적 고향은 물론 정신적 고향의 상실을 뜻한다. 어머니는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감으로 하여 김종상은 그의 문학에서 고향과 일과 어머니를 잃어버린다.

 

 

이상과 같은 고찰을 통해 보면 그의 시는 한결같이 일과 어머니와 흙에대한 공경 문화적인이미지를 지향해 온 것이 틀림없다. 일에 있어서는 노동에 고단함이 아니라, 노동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이미지로, 어머니에 있어서는 어머니의 자기 헌신적인 삶과 시인의 간절한 모정의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그러니까 서울로 이주한 1969년을 기점으로 그토록 즐겨쓰던 일과 어머니와 흙에 대한 이미지들이 점차 사라져 가고 도시적이며 교단적인 취향의 시들로 그 빈자리가 메워지기 시작한다.

 

2. 그의 동화문학

 

우리 아동문단에서는 시를 쓰는 이들이 동화에 손을 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왜 그런 수평적 장르의 공유성이 일어나는지를 말하기에는 이 자리가 마땅치 않다. 그러나 김종상은 그 까닭을 동시만으로는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소호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김종상은 그간 20여권의 동화와 소년소설을 써 왔다. 그 작품들을 모두 일독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동화 선집《재주 많은 왕자》에 수록된 18편의 동화를 통해 그의 동화관을 짐작하는 데에는 큰 여려움이 없었다.

 

동화작가 이영호는 위의 책 《동화해설》에서 그의 동화를 ‘사랑의 끈 잇기’, ‘비정한 세태 고발’, ‘아름다움에 대한 끝없는 동경’, ‘민족적한에 대한 아픈 절규’ 등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보다 포괄적으로 나누면 ‘들려주는 동화’와 ‘읽는 동화’로 구별할 수도 있다. 앞서 김종상 개인도 그랬지만 ‘들려주고 싶은’ 의도에서 동화를 쓰게 됐다고 말했음을 우리는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집 네눈이>, <우박 오던 날>, <재주 많은 왕자>, <개와 늑대>등의 작품들과 위의 해설에서 이영호가 말한 우화 계열의 작폼들이 대부분 들려주는 동화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의 동화들은 대개 작중의 화자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게 또한 사실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그런 유형의 글보다는 읽는동화 <느티나무>와 <휴전선의 코스모스>, <까치소리>만을 논고의 대상으로 삼았다.

 

2-1. 슬픈 자기 헌신의 모정

 

앞서 김종상의 시문학에서 우리는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을 확인했다. 한 작가의 내면적 진실은 비밀리에 은밀하게 노정되게 마련이다. 비록 장르가 달라졌다고 해서 그가 찾고자하는 잠재적 의식이 근원이 달라질 수는 없다.

<느티나무>와 <까치소리>는 그런 의미에 부합되는 비교적 잘 다듬어지고 어머니의 ‘자신에 대한 헌신적 사랑’이라는 테마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느티나무>는 늙어 속이 비어버린 동구나무로,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게 잘 드러나 있다. 어머니는 아들을 학교에 보낼 때나 마중 할 때나 이 느티나무에 와 아들을 보내고 맞는다.

 

“일찍 오잖고, 왜 이리 늦었니?”

어머니는 책보를 받아들면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 냅니다. 그러고는 동구나무에 절을 합니다.

전쟁이 터지고 어머니의 아들이 군대에 가던 날도 어머니는 동구나무에 나와 무사히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길 기원한다.

“아이고 신령님, 이 일을 어쩝니까. 아들을 빼앗겼습니다. 몹쓸 전쟁이 내 아들을 데려갑니다. 나는 어쩝니까?”

어머니는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흐트린 채 땅을 치며 울었습니다.

 

위의 글을 3인칭시점으로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관계된 사랑의 끈을 느티나무의 시선을 통해 이어가고 있다. 이 글에서 느티나무는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과 아픔과 고뇌를 바라보는 존재로 작용한다.

그리고 느티나무의 ‘속이 썩어가는’ 아픔은 어머니의 동구밖에 나와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아픔과 일치한다. 그런 의미에서 느티나무는 곧 그의 작품 속에서 어머니를 상징한다. 나무는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이며, 고향이며 우주에 대한 상징이다.

우리는 이글에서 ‘외면의 논리적 질서’보다는 ‘내면의 심리적 진실’을 읽어야 한다. 작가가 이 글에서 밝히고자 하는 내면의 심리적 진실은 전쟁이라는 소재가 아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그리움이다.

 

작품<까치소리>도 외부적 사건의 요인은 전쟁에 있다. 전쟁으로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할머니와 팽나무에 날아와 집을 짓는 까치의 울음소리가 이야기의 화음을 이루며 전개되는 외면적 질서다. 이 글은 일관성이 없은 일상적 현실을 잘 짜여진 허구의 현실로 구성해 놓은 가장 모범적인 작품이다. 까치의 울음소리와 그 뒤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소설 구성의 특징인 인과관계로 다듬어져 있다.

 

“까자! 까자! 까자!”하고 까치가 울고 난 뒤 까치는 정말이지 ‘아기까치를 깠고’, “가자! 가자가자‥‥‥”하고 울고 난 뒤 까치는 팽나무에서 ‘떠나갔다’ . 또 “깨자! 깨자깨자깨자!‥‥‥”하고 울었을 때에는 건강이 나빠 의식을 잃은 할머니가 다시 ‘깨어난다’는 인과관계는 허구의 구조임에도 오히려 사건 전개의 무리함을 빠른 속도로 감소시킨다.

이러한 외부적 구조 속에 감추어져 있는 내부적 비밀은 끝내 아들을 잊지 못하는 할머니의 한과 사랑이다.

 

2-2. 민족적 한에의 비극

 

또 다른 글, <휴전선의 코스모스>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휴전선의 코스모스>도 위의 두 글의 외면적 사건인 ‘전쟁’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분단이 된지 40여년이 됐지만 아직 우리 동화문학에는 분단을 다룬 작품들이 흔하지 않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지 않으려는 오랜 타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역사학자들이 우리의 현대사 기록을 기피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우리 아동문학은 부끄럽게도 무단통치 시대에도 순수문학을 외치며 현실을 외면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여타의 조건 속에서도 분단 문학을 다룬 위의 작품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겠다. 김종상은 이외에도 현실 정치와 세태를 다룬 풍자적이고 우화적인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러한 태도는 아마 그의 사회를 보는 시인으로서의 견딜 수 없는 분노에서 기인된 것이 아닐까한다.

<휴전선의 코스모스>는 휴전선 근처에서 소꿉놀이를 하며 지내던 명이와 석이가 코스모스를 심어 가꾸는데서 시작된다. 코스모스가 피기 전인 어느 날, 전쟁이 일어나 명이와 석이는 고향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떠나간 명이와 석이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코스모스는 꽃을 피워가지만 억새와 칡덩쿨이 코스모스를 덮쳐오기 시작한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이 곳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없어지면 명이와 석이가 돌아와도 여기가 마을이 있던 곳이란 것을 모를 테니까”

라며 코스모스들은 가냘프고 야윈 몸으로 돌아오지 않는 석이와 명이를 기다린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이 글의 전반부는 명이와 석이가 코스모스를 심고 가꾸는 평화로운 배경이, 그리고 후반부는 명이와 석이가 떠나간 뒤에 코스모스가 억새와 칡덩쿨에 잠식당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코스모스’는 떠나간 명이와 석이를 위해 빼앗겨 가고 있는 옛 명이와 석이의 터전을 지키겠다는 긴박한 시련이 주된 사건이다. 이 작품에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위기감을 칡덩쿨과 억새의 강한 침식력을 통해 작가는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간단하고 단선적인 구조의 글이지만 그는 통일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일깨움으로 하여 우리들의 통일 메신저로서의 교육적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위의 글의 이면 속에 숨어 있는 테마는 ‘기다림’이다. <느티나무>나 <까치소리>엔 전쟁터에 나간 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기원과 염원이, 그리고 <휴전선의 코스모스>는 돌아오지 않는 석이와 명이를 기다리는 코스모스의 간절함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김종상 동화문학의 본질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 에 있지 않나 그렇게 볼 수 있겠다.

 

김종상의 산문문학에는 문장 구성의 치열성과 리얼리티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우려를 하는 이도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약간의 근거가 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건성건성 건너뛰는 무리한 구성과 평면적 구조로 다가 올 사건을 예감할 수 없는 ‘이야기적’이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비약적 전개를 통한 넉넉한 상상의 공간삽입으로 오히려 흥미와 상상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나가는 글

 

김종상 문학을 모두 바라보기에는 그 숲이 너무 크다. 그러기에 필자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일과 어머니 그리고 현실에 대한 애정이라는 측면만을 조명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70년대까지 일관되게 그의 시 속에 ‘일의 숭고함’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의 헌신적 자식 사랑’을 흙이라는 대지를 바탕으로 구축해 왔다.

또한 동화문학에서도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모성애가 질박하게 표출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현실 직시력으로 우리 민족이 당면하고 있는 뼈아픈 분단문제를 애정을 가지고 다루어 왔다. 그는 또한 어린이에 대한 사랑을 교단에서 실청하기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 문학’을 개척한 면에서도 크게 기여했다고 보겠다.

 

필자는 김종상 문학이야말로 대지를 바탕으로 하는 ‘숭고한 일의 문학’임을 다시 한번 거론하며 그의 그런 문학이 우리나라 아동문학사에 또 하나의 확고한 이정표로 우뚝 서게 되었음을 분명히 말해 두고 싶다.

한 사람의 작가가 40 여년의 도정 속에서 하나의 테마와 이슈를 일관되게 다루어온 업적에 경의를 표한다. 또한 김종상의 문학적 과업과 놀라우리만치 강렬한 인간적 포용력을 통해 그야말로 체격에 걸맞는 ‘거인문학가’라는 점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필자의 미흡한 논고가 그의 업적에 흠이 될까 저어하다.

 

<한국아동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