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우는 봄밤
권영상
친구가 잠깐 들렀다. 커피 한 잔을 들고는 일이 있다며 일어섰다. 날이 저물고 있어 하룻밤 자고 갈 것을 권했지만 기어이 일어섰다. 후텁지근하던 날씨가 비라도 뿌릴 것처럼 꾸물거렸다. 시동을 걸고 라이트를 켰다. 산굽이를 돌고 돌아 백암을 향해 천천히 가고 있을 때다.
“차 좀 잠깐 세워줘 봐.”
창밖 컴컴한 무논을 내다보던 친구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가겠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반쯤 열어둔 차창으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적당한 데다 차를 세우고 내렸다.
“이 소리, 정말 얼마나 오랜만인가?”
모내기가 끝난 논은 그야말로 개구리 세상이다. 늘 다니는 길이지만 밤에 다녀보기는 처음이다.
고향집도 앞엔 물도랑이 흐르고, 물도랑 너머엔 논이 있었다. 보리가 팰 때쯤이면 모내기 끝낸 무논의 개구리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와글와글 울었다. 지금 여기 무논의 이 개구리들도 그 옛날의 고향 개구리들처럼 짓궂다.
“논두렁길을 우리 같이 좀 걸어보자구.”
컴컴하던 들판이 천천히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슬쩍슬쩍 구름 뒤에 숨은 달이 보인다. 보름으로 향해 가는 달인지 보름을 갓 지난 달인지 약간 일그러진 달빛이 후연하다. 우리는 그 빛으로 봄밤의 논두렁길을 걸었다. 말이 논두렁길이지 수레가 다닐만한 길이다. 개구리들은 우리가 지금 저들 곁을 지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까보다 더 요란히 울어댄다.
마을 불빛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이 깊은 산 중엔 우리뿐이다. 그와 나, 그리고 달빛과 어둠과 개구리들과 간간히 들리는 산꿩소리. 고향과 너무나 먼 이 논길에서, 타향에서 만난 친구와 봄밤을 맞는다는 일이 우연이라면 신비로울만큼 우연이다.
우리는 어느 쯤에서 멈추었다. 달이 구름을 밀치고 나오는 바람에 갑자기 논벌이 환해졌다. 마치 영화의 무거운 장면이 확 바뀔 때처럼 놀랍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다. 줄을 맞추어 심어놓은 어린 모들이 또렷이 보일 정도다. 그 너머 논두렁의 풀과 고들빼기 노란 꽃까지 선명히 보인다. 그 순간이다. 그 요란하던 개구리 울음이 뚝 끊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어느 놈의 울음 방정을 시작으로 무논은 정적에서 다시 울음 속으로 빠져든다. 신비로운 건 입을 맞추지 않고 제각각 울어대는 이 울음들이 잡음이나 소음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거다. 소음이기 보다 오히려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이 단순하기 짝이 없는 발성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살아오느라 겪었던 외로움이거나 아픔이거나 고단함이거나 풀리지 않는 일로 몸부림치던 저 편의 기억을 더듬는다. 논두렁길을 걸으면서 서로 별말이 없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백암 정류장에 친구를 내려주고 돌아설 때쯤 꾸물거리던 비가 내렸다. 예고 없는 비였다. 가로등 없는 깜깜한 시골길을 달려 집에 돌아와 닫아놓았던 창문을 열었다. 와락, 개구리 울음소리가 밀려온다. 여태껏 개구리 울면 개구리 우는구나 했는데 친구 탓에 내 귀가 열렸다. 집에서 한참 나가야 논이 있는데 마치 논두렁에서 듣던 그 소리처럼 요란벅적하다.
개구리 울음 소리에 차를 세우던 친구는 어쩌면 향수에 목말라 있거나 도회지 삶의 고단함에 내심 지쳐있거나 아니면 먹은 나이를 오롯이 느끼고 있거나 그런 게 아닐까. 뜻하지 않게도 그에게 때묻지 않은 개구리 울음을 선물할 수 있어 다행이다.
빗소리가 점점 거세다. 천둥까지 친다. 빗소리와 천둥소리와 개구리 소리가 어우러져 봄밤이 점점 고적해진다. 그는 이 밤 어디쯤 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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