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구독지와 2017년 지역연간집 동시들
권영상
<아동문학평론> 여름호는 다급하다. 방정환문학상 시상식에 맞추려다 보니 늘 임박하다. 봄호를 쓴지 25일 만에 여름호를 쓴다. 아동문학지가 대부분 계간지 형태여서 마땅히 사용할 텍스트가 없어 고민하던 중에 그나마 도착해준 <동시마중> 3.4월호와 <열린아동문학> 봄호, 그리고 2017년도 지역아동문학 연간집을 그 텍스트로 삼았다. 용케 찾아낸 연간집은 <강원아동문학> 제 42집, <대구아동문학> 제 59호, <새바람아동문학> 제 30호, <울산아동문학회 동시 동화집>이다.
일부 지역아동문학 연간집만 읽었다는 한계는 있지만 이들이 갖는 뚜렷한 점은 있다. 작품 수준이 구독지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점, 지역 간의 문학적 격차 또한 보이지 않는다는 점. 이들 연간집이 지자체의 발간비 수혜를 입어 편집이 품격있고, 작품 또한 더욱 선명하고, 진지하며, 지역 색채로 말미암아 다채롭다는 점이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지역마다 동시인들을 폭넓게 확보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이번호도 되도록 많은 작품(10편)을 보여주고 싶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계평 주제를 만들어 그 안에 다수 작품을 구겨넣는 억지는 피하려 한다. 지역문학연간집 작품은 가급적 중앙에 덜 알려진 분들 동시를 먼저 선택하려고 노력했다.
1. 봄, 그 신선함
올챙이, 민들레,/ 요렇게 조그만// 강아지풀, 제비꽃,/ 요렇게 조그만// 조그만 친구들이/ 심부름 다녀왔어요// 꼬물꼬물 기어가서/ 아장아장 걸어가서// 덩실덩실 덩치 큰/ 봄을 데려왔어요
-유금옥의 ‘심부름’ 전문 <강원아동문학> 2017년 제 42집
프로펠러가 움직이고/ 고비 사막이/ 시동을 건다// 산 넘고/ 바다 건너/ 두두두두/ 다다다다// 여권도 없이/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우리 집까지 쳐들어온/ 모래 군대
-권도형의 ‘황사’ 전문 <울산아동문학 동시 동화집> 2017년 11월
유독 봄에 관한 시들이 많았다.
유금옥의 ‘심부름’이 눈에 띄었다. 봄기운이 대지를 타고 서서히 북상하면 거기에 맞추어 민들레가 피고 제비꽃이 핀다는 게 일반적이다. 근데 시인은 다르다. 민들레며 올챙이, 제비꽃 같이 조그만 것들이 먼 남쪽으로 내려가 덩치 큰 봄을 데려온다는 발상이다. 생각을 요만큼만 바꾸자 시가 확 달라진다. 이 들판의 주인이 다름아닌 올챙이 민들레가 된다. 봄을 보는 눈이 독특하고 신선하다. 그의 시는 시상을 크게 덧칠하지 않는다. ‘조그만’을 절제있게 반복해 쓴다거나 꼬물꼬물, 아장아장, 덩실덩실 같은 첩어 사용으로 심부름 갈 때에는 천천히 갔어도 올 때에는 금방 왔다는 시간의 속도를 회화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권도형의 ‘황사’ 역시 봄시답게 비유가 신선하다. 비록 중심소재가 답답한 황사이긴 하지만 시조차 답답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웃나라 ‘모래 군대’가 우리 집까지 쳐들어오는 모습이 일견 흥미롭다. 고비사막에서 날아오는 황사는 마치 불순한 비행편대와 같다. 대놓고 타국의 국경을 넘고 허락도 없이 우리들 방안으로 습격해 들어온다. 굳이 황사를 감정적으로 비난하기보다 ‘모래 군대’라는 비유로 그것의 부정적 이미지를 에둘러 드러내고 있다.
2. 시를 감싸는 미감
창밖엔 애기별꽃 소록소록/ 별이 내려요, 꽃이 내려요.// 아침이 오면/ 알록달록 색동옷 입고/ 타래버선 복주머니/ 곱게 땋은 귀밑머리에/ 배씨댕기 도투락댕기 드리고/ 언니랑 오빠랑 세배 가요./ 숫눈길 사박사박 함께 가요.// 오늘은 까치설날/ 잠은 안 오고/ 머리맡 설빔도 잠은 안 오고
-강순예의 ‘잠은 안 오고’ 전문 <열린아동문학> 2018년 봄호
비가 쏟아져서,// 방터골 계곡이 잠시/ 어리둥절해지는 순간// 뭉게뭉게/ 소리가 불어났다// 불어난/ 소리만큼// 상큼상큼/ 초록빛이 불어났다.
-남진원의 ‘소나기’ 전문 <강원아동문학> 2017년 42집
강순예의 ‘잠은 안 오고’는 고아한 미감을 느끼게 하는 시다. 근래에 드문 설날 전통의상의 고전미를 예스럽게 잘 묘사하고 있다. 까치설날, 설빔을 받아놓은 아이는 설렘에 잠은 안 오고, 그런 밤 창밖엔 소록소록 별이 내린다. 아침이 얼른 와야 설빔으로 받은 타래버선에 복주머니, 배씨댕기에 도투락댕기하고 언니랑 오빠랑 숫눈 밟으며 사박사박 세배를 갈 테다. 설날 아침을 기다리는 잠 못 자는 아이가 시 속에 있다. 잘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을 보듯 시의 옷을 곱게 차려 입힌 회화적인 시다.
남진원의 ‘소나기’는 시 감각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복합적인 이미지 생산과 내적 충격을 극적으로 이끌어 올리고 있다. 배경은 방터골 계곡. 소나기 내리는 늦여름. 갑작스런 소나기로 계곡물이 급하게 차오르고 물소리마저 계곡에 가득하다. 그 요란함을 시인은 ‘뭉게뭉게 소리가 불어났다’거나 ‘초록빛이 불어났다’로 시각화하면서 동시에 소나기로 말미암아 방터골의 숲이 상큼상큼 초록으로 변하는 시간적 흐름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소나기가 만들어내는 순간적인 현상들과 그 속에 어리둥절한 채로 서 있는 시인의 모습. 어리둥절할 만큼 빼어난 시다.
3. 연대감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영영 모를 그 어느 곳에서/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영영 모를 그 어느 시간에/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영영 모를 그 무엇을 들고/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영영 모를 그 춤을 추면서/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영영 모를 그 암호를 외자.//
다른 사람은 모르게 우리끼리만/ 우리끼리 약속한 일들을 다른 사람은 알아도 모르게 꼭 우리끼리만.
-정유경의 ‘아지트’ 전문 <동시마중> 2018년 3.4월호
쪽지가 배달되었다.// TO./ 도라지/ 고사리/ 시금치/ 당근/ 참기름// 오늘 뭉치자, 밥집에서!// from. 고추장// 추신: 참, 계란은 오늘도 늦는대.
-김이삭의 ‘비빔밥’ 전문 <울산아동문학회 동시 동화집> 2017년 11월
정유경의 ‘아지트’는 어찌 보면 가락국 영신군가를 닮았다. 가락의 사람들은 이 시의 아이들처럼 구지봉에 올라 나무막대기를 들고 땅을 두드리며 춤을 추면서 자신들만의 암호인 구지가를 불렀다. 구지봉은 그들의 ‘아지트’다. 아지트는 집단의 비밀공간이다. 그들은 폐쇄된 집단이기에 그들만의 암호로 소통한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은 ‘우리끼리’에 속하고 싶었다. ‘우리끼리’가 만드는 부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연대의식, 집단성 등은 어린이 고유의 특성이 아닐까.
4. 유기적 연결망
태어나 처음 나온 시장/ 불리는 이름도 갖가지/ 골뱅이/ 골부리/ 고디/ 사고디/ 대사리/ 다슬기// 올갱이네!// 그래,/ 들어왔던 이름이네!// 충청도/ 고향 사람이겠구나
-권영욱의 ‘반가운 말’ 전문 <대구아동문학> 제 59호 2017년 9월
다람쥐처럼 볼이 볼록/ 눈동자는 가운데로 몰리지// 두 볼 잔뜩 공기를 머금고/ 후 불면// 난생처럼 하늘을 날아가는/ 민들레 씨앗들// 내 숨을 타고 날아가는/ 민들레 씨앗들// 다음 해 봄,/ 언덕에 노랗게 민들레가 피어나면// 후웃,/ 그 꽃들에게서/ 내 숨결 냄새가 나게 될 거란 말씀/ 나도 바람의 친척이라는 말씀
-문성해의 ‘민들레 씨앗을 불 때’ 전문 <동시마중> 2018년 3.4월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과 서로 관계하고 있다.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하나의 관계망 속에 있다는 말이다. 그가 누구와 관계해 왔는가는 유전자 속에 간직되기도 하지만 그에게 불리어지는 이름에도 있다. 권영욱의 시 ‘반가운 말’의 골뱅이, 골부리, 고디, 사고디, 대사리, 다슬기라는 이름들이 그렇다. 그들은 우리나라라는 공간 속에서 생겨난 방언이며 저마다 출생지를 가지고 있다. 타지인 대구에 살고 있는 시인이 ‘올갱이’라는 말에서 불현 고향인 충청도를 떠올리는 것처럼 방언은 동향의식을 자극한다. 우리는 모두 타인처럼 살지만 실은 내재된 관계망 속에서 존재한다.
문성해의 ‘민들레 씨앗을 불 때’가 그렇다. 지금 민들레 씨앗을 후, 불어 날린 내 숨결은 다음해 봄 어느 언덕 민들레꽃에도 닿아 있겠지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불교의 유기체적 인연관이다. 우리가 타인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나의 관계망 속에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의 아픔이 언젠가 우리의 아픔이 될 수 있어서다.
5. 자연으로부터 배우기
옆집 누나가/ 심부름 값으로 준/ 사과 한 개// 동생 줄까?/ 아니 내가 먹어야지.// 내가 먹을까?/ 아니, 동생 줘야지.// 구름 속에서/ 반달이 쏙 얼굴을 내밀며 웃었다.// ‘아! 반쪽’/ 나도 웃었다.
-이화주의 ‘아! 반쪽’ 전문 <강원아동문학> 2017년 42집
시골 할아버지 댁에는/ 나보다 먼저 가족이 된/ 자전거가 있다.// 그 연세에 찬바람도 빙판길도 위험하다고/ 이제 그만 자전거를 없애자는 아빠께/ 할아버지가 그러셨다.// 바람을 겁내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넘어져 본 사람이 일어설 줄도 안다고.// 나를 뒷자리에 태우고/ 읍내 장터로 나가/ 자장면도 사주시던 할아버지,/ 한층 가벼워진 할아버지를 태우고/ 오늘은 내가 페달을 밟았다.// 바람 앞에/ 삐뚤빼뚤 중심이 흔들려도/ 겁낼 필요없다는 우리 할아버지// “그려, 그렇게 나아가면 되는 겨.”
-김영란의 ‘삐뚤빼뚤’ 전문 <대구아동문학> 제 59호 2017년 9월
사람의 문화사는 자연이나 자연의 이법을 배워온 역사라 해도 틀리지 않겠다. 인생론에서 현대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차용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화주의 ‘아, 반쪽!’도 그렇다. 사과 한 개를 놓고 갈등을 일으키다가 구름을 열고 쏙 얼굴을 내미는 반달을 보며 비로소 나눔의 미덕을 발견한다. 딱 반쪽! 반달이 가르쳐준 이등분의 미학이다. 사람은 이처럼 작고 소소한 일에서 일상성의 미덕을 놓칠 때가 있지만 걱정할 게 없다. 우리는 늘 우리에게 귀띔하고 조언해주는 자연 곁에 의지해 살고 있으니까.
김영란의 시 ‘삐뚤빼뚤’은 할아버지로부터 배우는 인생론이다. 바람 앞에 삐뚤빼뚤 중심이 흔들린다 해도 두려워할 것 없다. ‘그려, 그렇게 나아가면 되는 겨.’라는 연륜이 밴 할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연륜이 시 전반을 든든하게 잡아주는 시다. 술술 읽히는 재미가 있다.
이제 다 썼다. 나는 또 칸나꽃이 피고, 토란이 알이 굵고, 풋감이 맛이 들 무렵 가을호를 준비하는 나를 보게 될 테다. 그때에 다시 여러분을 뵙게 되기를.
(아동문학평론 201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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