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구방아, 목욕 가자> 권영상 지음. 사계절 펴냄
- 안도감을 심어주는 동시
이 상 교
<구방아, 목욕 가자> 제목부터 아이들의 흥미를 끌기에 모자라지 않는다. 이름이 하필이면 구방이인가. 민우, 정섭이 같은 평범하고도 쉬운 이름 다 두고서.
동시인 권영상이 펴내는 동시집은 그처럼 번번이 새로웠다. 표시 제목만 그런 것 아니라 내용이라든지 형식면에서도 늘 새롭곤 하였다. < 구방아, 목욕 가자>도 마찬가지여서 거꾸로 부르면 ‘방구’가 되는 것은 물론, 놀러가자도 아니며, 학교 가자도 아니고, 소풍 가자도 아니고 하고 많은 일상 가운데 하필이면 목욕 가자인가에 있다.
‘구방이’ 이름과 ‘목욕 가자’ 는 묘하게 잘 어울려서 목욕가기를 싫어하는 아이라도 구방이를 쫓아 목욕을 나서게 하고 싶어 할 지경이다. 목욕이라는 게 무언가. 부자지간이건 모녀지간이건 또는 가까운 친구 사이이건 옷을 훌훌 벗고 함께 목욕탕에 드는 것으로 이미 허물은 없어지고 말았다.
여행을 떠나는 일처럼 호사롭지 않으며 메모지에 준비물을 노트해 놓아야 할 지경으로 복잡한 것도 아니다. 입던 옷에 수건, 칫솔, 비누 등 몇 가지만 간단히 들고 나서면 그만이다. < 구방아, 목욕 가자>는 제목처럼 목욕탕에 들어서는 일처럼 간단없이도 마음을 푹 놓이게 한다. ‘구방이’ 이름은 공부를 뛰어나게 잘한다거나 보기 드물게 모범적인 잘 생긴 아이일 거라는 상상을 마다한다.
아빠는/ 내게 사탕 하나 주실 때에도/구방아,/그렇게 내 이름을 불러 주시지요./주머니에 넣어 온/낙엽 한 장 꺼내어 주실 때에도/구방아,/그렇게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가끔 술 마시고 들어오면/아빠는 마치 특별한 것을 주실 때처럼/나를 꼭 껴안고는/구방아!/귓등에다/내 이름을 불러 주시지요.//
<‘아빠는 내게’ 전문>
구방이 이름을 붙여준 아빠는 또 어떤가. 별 것 아닌 작은 것을 건넬 때도 잊지 않고 ‘구방아’ 이름을 부른다. 그렇듯이 자주 친근하고도 간단없이 구방이 이름을 불러주는 아빠가 아이는 참으로 편안하다. 아이도 아빠와 마찬가지로 아빠가 다른 아이들의 아빠처럼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있길 바란다거나, 대단한 선물을 사다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사탕 한 알을 건네주면서도 잊지 않고 구방아, 불러주는 아빠, 주머니에 넣어온 낙엽 한 장을 건네주면서도 구방아, 이름을 잊지 않는 아빠. 어쩌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에는 좀 더 특별한 것을 주듯 꼭 끌어안고는 속삭이듯 이름을 불러주는 아빠. 그처럼 정다운 아빠한테서 나는 술냄새조차 싫지 않을 것이다.
구방아, 목욕 가자./아빠는 뭐가 무섭다고/혼자 가도 될 목욕탕을/꼭 나랑 같이 가자 하시지요.//구방아, 산에 가자./아빠는 뭐가 무섭다고/만날 가는 산을/ 꼭 나랑 같이 가자 하시지요.//넌 이거도 못하냐,/그러며 날 놀리는 아빠는/어디 갈 때면/꼭 나를 앞세우려 하시지요.// 구방아, 이모네 가자./이것 좀 봐요.//
<‘구방아, 목욕 가자’ 전문>
어른인 아빠라고 해서 대단한 것은 아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따금 아이인 나보다 못한 데가 있는 듯 싶다. 목욕조차 혼자 가지 못하고 ‘구방아, 목욕 가자’ 그러는 아빠. 그뿐 아니다. 만날 가는 산에도 같이 가자고 조르며 그밖에 어딜 갈 때면 나를 앞세우려 한다. 지금 당장만 해도 아빠는 이모네 가야 할 일에 구방이를 앞세우려 한다. 아빠는 한참 어른인데도 어린 나를 의지하려 든다. 그리하여 나는 훨씬 어른스러워지는 기분이다. 어른인 아빠가 나를 의지하려 들다니. 얼마나 다행이냐. 아빠는 어른이면서 나보다 못한 데가 있었다니. 내가 돌봐드리기도 해야 한다니.
옛날에 말이지. 호랑이가 살았어./그 호랑이는 어찌나 힘이 세던지/황소도 잡아먹고, 사람도 잡아먹었단다./근데 엄만, 호랑이한테 안 잡아먹혔어?/당연히 잡아먹혔지. 당연히./근데 어떻게 이렇게 살아 있어?/그 호랑이가 엄마를 보더니 느네 남편 주면/ 안 잡아먹지, 그러는 거야./그래서 아빠를 휙 주었지./그랬더니?/그랬더니 이번엔 느네 아기 주면/안 잡아 먹지, 또 그러네./나를? 엄마, 나를?/응. 그래서 좋다 하고 너를 휙 던져 줬지./그랬더니?/그랬더니 또 뭐라냐믄 너도 잡아먹겠다, 어흥!/그러며 엄마를 넝큼 잡아먹네./그래서 어떻게 됐어?/그래서 우리가 여기 와 만났잖아./여기가 어딘데? 여기가 거기지. 호랑이 배 속.
<‘옛날에 호랑이가 살았어’ 전문>
‘옛날에 호랑이가 살았어’ 는 전래되어 오는 옛이야기 가운데 한 구절인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를 살린 이야기 시인데 엄마는 황소도 잡아먹는 힘센 호랑이에게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엄마는 아빠를 호랑이 앞에 던져 주어 잡아먹히게 하고 나마져도 호랑이 앞에 휙 던져 주었다. 마지막에는 엄마 마져도 잡아먹히고 말았다. 이제 세 식구가 모조리 잡아먹히고 말았으니 이야기는 끝 아닌가. 그런데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와 만났잖아./여기가 어딘데? 여기가 거기지. 호랑이 배 속. //’
세 식구 모조리 잡아 먹히고 말아 끝나고 만 것이 아니다. 호랑이 배 속에서 다시 만나 오순도순 잘 살아가고 있다. 마음이 푹 놓인다. 호랑이 배 속에서도 이처럼 편히 잘 살아 가는데 걱정될 무엇이 있을 것인가. 호랑이 배 속 세상임에도 해가 뜨고 달이 지기도 하니 얼마나 기특한 일인지. 호랑이 쓸개를 찾아보자면 찾기도 할 것인가.
엄마가/전화를 거는 중에/내게 수화기를 넘겨 주신다.//아버지, 저예요. 구방이예요./ 나는 수화기 너머에 계신/아버지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아빠, 안녕! 이렇게 해도 될/ 인사를 ‘아버지, 저예요.’ 그렇게 했다.//아버지와 일 년을/ 떨어져 살아오는 동안/나는 그렇게 변했다.//오냐,/ 우리 구방이 의젓해졌구나./아버지의 그 큼직한 손이/내 등을 툭툭 두드려 주실 것 같다.//
<‘떨어져 지내는 동안’ 전문>
정다운 아빠와 일 년 가까이 떨어져 지냈다. 엄마는 아빠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내게 돌려 주었다. 엄마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당연스레 내게 수화기를 돌려준 것이다. 그럴만큼 나도 이제 아빠와 함께 지낼 적의 철없는 아이인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아빠, 안녕!’ 대신 ‘아버지, 저예요.’ 가 입에서 절로 튀어 나왔다. 아버지의 대답 또한 예전의 ‘구방이, 잘 놀았니?’ 대신 ‘우리 구방이 의젓해졌구나.’ 이다. 아버지의 큼직한 손이 두드려 줄 내 등은 얼마나 두터워져 있으며 듬직해 있을 것인가. 나도 이제부터 차츰 철딱서니를 벗어나 의젓한 한 사람의 몫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예전에 할머니에게 들은/옛날이야기들은 다 똑같았지요./맨 마지막은 행복하게 끝났지요./처음엔 슬프다가도/맨 끝에 가면 언제나 행복했지요./할머니, 또 행복하게 끝나는 거야?/ 할머니 무릎에 누운 채 투덜대면/할머니는 이 말씀을 하셨지요./그래, 세상 모든 일의 끝은 다 행복하단다./우리 강아지 인생도 그럴 테지./나는 지금도 할머니의 그 말씀을 믿지요./ 세상 모든 일의 끝은 다 행복하다는.//
<‘내가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 전문>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 살아가게 될 나의 인생은 어떨 것인가. 혹시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내심 불안하기도 하다. 그런 내게 할머니는 조곤조곤 옛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엄마 아빠도 자라면서 들었을 옛 이야기.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콩쥐 팥쥐도 그렇고 해님 달님도 그렇고 흥부 놀부 이야기도 비슷했다. 이야기의 끝에 가서는 심술맞고 못된 쪽은 불행에 빠지고 착한 편은 부자가 되어 아주 잘 살다가 바로 어제 죽었다고도 한다. 끝이 번번이 행복한 것으로 마무리되어 싱겁지만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의 마음은 앞으로 살아가게 될 세상이 아이에게 힘겨운 삶이 될지라도 끝내 희망을 버리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함을 곁들이고 있다.
< 구방아, 목욕 가자> 동시집의 구방이는 구방이만이 아니다. 영주, 쫑아는 물론 희진이, 재익이, 동준이.... 모두에게 읽힐 동시집이다. 목욕탕에 가는 일처럼 예사로 있어온 일에 대해 다시 돌이켜 보게 하는 동시집이다. 눈에 들어오는 둘레의 모든 사물에게 한마디 건네 보고 싶게 한다. 나무는 나무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또 힘 없는 것은 힘 없는 것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 가며 따뜻하게 서로 기대 살아가기도 할 터이니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하게 하는 동시집이다.
(*) 국립도서관 발행 월간지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