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필요한 만큼 받는’ 햇살의 미학
- 권영상 론-
전병호 全炳昊 (시인, 아동문학평론가)
Ⅰ. 들어가며
권영상은 2009년 한 해에 두 권의 동시집을 냈다. 『구방아, 목욕 가자』(사계절, 2009)와『잘 커다오, 꽝꽝 나무야』(문학동네, 2009)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열세 번째와 열네 번째 동시집이 되는 셈이다.
권영상은 1979년《아동문예》에 동시「새」가 추천 완료되고, 강원일보 신춘문예(1980)와 《소년중앙》문학상(1982)에도 각각 동시가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아동문예》에 동시 천료를 받은 1979년을 등단 년도로 치면 2009년은 등단 31주년이 된다. 그는 등단 31주년을 자축하듯 2009년 한 해에 두 권의 동시집을 펴냈다.
그는 그동안 동시집 14권만을 낸 것이 아니다. 동화집도 냈고, 수필집도, 그림책도 냈다. 그는 동시 이외에도 꾸준히 영역을 넓혀 1993년에는 「쥐라기 아저씨와 구두」로 ‘MBC 동화대상’을 받았으며, 1991년 <시대문학>에 시, 1990년 <한국문학>에 수필이 당선되기도 했다. 이렇듯 여러 장르에 이름을 올린 그이지만 그의 문학의 본령은 동시라는 생각이다. 동시야말로 그의 문학 정신의 진수를 보여주며, 그가 실제로 가장 열정을 쏟아온 장르이다. 그는 동시집 ?아흔아홉 개의 꿈?의 머리말에서 ‘글 하나에 자신을 바치며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내가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를 묻고 싶을 때면’ 펜을 들었다면서 ‘글은 나를 바르게 살게 하는 채찍’이고 ‘작은 나의 신앙’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자세로 왕성한 창작 의욕을 발휘하고 있는 ‘변함없는 현역’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외삽적 요인만 고려해 본다고 해도 그는 앞으로 몇 권의 동시집을 더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등단 30여년에 14권의 동시집을 내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다작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먼저 시인의 뜨거운 문학적 열정을 느끼게 하는 것만으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권영상의 시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원형질의 언어가 몇 개 있다. 풀, 아버지, 온달, 햇살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햇살이다. 햇살은 초기 시에서부터 열네 번째 동시집 ?잘 커다오, 꽝광 나무야?에 이르기까지 빈도 높게 나타나는 시어이다. 그러니까 햇살은 그가 평생에 걸쳐 삶의 전환기마다 새로운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 핵심적인 시어인 것이다.
그동안 권영상의 시 세계에 대하여 살펴 본 글이 몇 편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전기적 고찰 방법을 중심으로 그의 시 세계에 접근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와 달리 햇살이라는 시어가 시기별로 어떻게 쓰였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의 시 세계에 접근하려고 한다. 이것이 누구 못지않게 왕성한 필력을 발휘해 온 그의 시 세계를 들여다보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이다.
Ⅱ. 시기별로 본 햇살의 변용 양상
1. 씨앗을 따라 같이 묻힌 봄 햇살
그는 두 번째 동시집 『햇살에서 나오는 아이들』의 ‘책 끝에’ 이렇게 쓰고 있다.
첫 번째 동시집을 내고 5년 만에 다시 책을 내는 동안 나는 주로 햇살과 하늘과 별들을 썼고, 최근에 와선 고구려의 온달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이 시의 전편을 통해 참다운 인간의 진실한 마음을 되찾아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첫 번째 동시집 『단풍을 몰고 오는 바람』을 내고 나서 두 번째 동시집 ?햇살에서 나오는 아이들?을 내기까지 그는 주로 ‘햇살과 하늘과 별’들을 썼다고 한다. 햇살과 하늘과 별은 그가 동심의 세계를 표출해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택한 시적 제재이다. 그는 햇살과 하늘과 별을 통해 동심의 눈으로 바라본 순수 서정 세계를 그려내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중에서 햇살은 또다른 시적 의미를 지니는 시어로 확장․변용된다.
태양에서 보는/지구의/제일 첫 페이지//옛날//햇살은/여기에서부터/덧신을 벗고/마을로 걸어왔다.
- 「바닷가」 전문
동해의 일출을 연상하게 하는 시다. 어둠을 가르고 솟아오른 아침 해가 쏟아내는 햇살이 바다를 건너와 마을로 들어오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덧신은 구두가 젖거나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구두 위에 덧신는 얇은 고무로 만든 씌우개이다. 햇살은 바닷가에 이르러서 ‘덧신을 벗고‘ 마을로 걸어 들어왔다.
이 시에서 보듯 그는 햇살을 인간화했다. 인간화한 햇살은 순수 동심의 서정 세계를 추구하는 그의 페르소나에 다름이 아니다. 인간화한 햇살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이제까지 보아오던 그런 평범한 세상이 아니었다. 새로운 것이 보였다. 기왕에 보던 것들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그는 이것을 동시의 언어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참다운 인간의 진실한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동시를 쓸 것으로 보았다.
해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해는 고대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 이르기까지 인류에게 가장 추앙 받는 신성한 사물이다. 이 해가 내쏘는 광선이 햇살이다. 따라서 햇살은 시작이고 희망이고 생명의 상징이다. 더구나 넓고 깨끗한 동해에서 밤새 씻고 솟아올라 온 해가 내쏘는 광선이니 얼마나 신선하겠는가. 그는 이 세상에서 햇살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동시를 씀으로써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아기가/꽃씨를/ 심을 때,//햇살도/몇 조각/따라 묻혔다.//어두운/흙갈피서/꽃씨눈을 틔워/파란 새싹으로/밀어 올리기 위해//아무도/모르는 사이/꽃씨 곁에 묻혔다.
- 「꽃씨를 따라간 햇살」 전문
아기가 꽃씨를 심을 때 ‘햇살도/몇 조각/따라’ 묻히게 됨으로써 햇살은 어두운 흙 속에서 ‘꽃씨눈을 틔워 /파란 새싹으로/ 밀어 올리’는 원천적인 힘이 된다. 그는 이런 햇살의 힘을 가진 동시를 쓰고자 했다.
햇살 속에/개구장이 아이들이 숨어 있다./아침이 깨어날 적부터/빛살 속 맑은 창을 뛰어나와/온 세상을/쏘다니는 아이들.//커다란 수채물감을 들고/이파랑이마다/작은 바람도 곁들여 그리고/꽃잎엔/상긋한 내음도/마저 그린다.//골목을 뛰어가면 그 골목대로/강길은 그 강길대로/쓰윽쓱 그리는 아이들.//해처럼 빨갛게 닮은/작은 개구장이들이/저마다/빛살 끝에 해를 묻혀선/옷사품에 감추어 돌아다닌다.//산 비탈/늦잠꾸러기 바람에겐/파랗게 옷자락을 물들여 놓고/가버린 햇살.//아침이 오는 길목에서는/개구장이들이 재잘대는/웃음소리가 들린다./눈부신 물감 냄새가 난다.
-「햇살에서 나오는 아이들」 전문
햇살 속에서 개구쟁이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침이 깨어날 적부터/빛살 속 맑은 창을 뛰어나와/온 세상을/쏘다니는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이 수채물감을 들고 와 그리기 때문에 사물들이 어둠 속에서 잃어버렸던 형체와 색깔들은 되찾는다. 그는 햇살 속에서 ‘눈부신 물감 냄새’를 맡고, ‘개구장이들이 재잘대는 웃음소리’를 듣는다. 햇살 속에서 나오는 아이들은 그의 시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환상의 아이들이다. 말하자면 요정과 같다. ‘어디론가 뿔뿔이/흩어졌다 되돌아오는/아이들은//마을 구석구석/햇살을 펴고 오는지/목소리들이/더 밝다.(「햇살을 펴는 아이들」 일부)’는 이 희망에 넘친 아침의 풍경을 구체화한 것이다.
해님이 주시는/빛살 중에서도/민들레는 노란 빛깔만 골라/옷을 지어 입는다.//담녘 따스한 곳에/물레를 걸어두고/노오란 실파람만 뽑아/옷을 지어 입는다.
-「민들레·1」 전문
나뭇잎에 모여 앉아/햇살들이/초록물을 빚어낸다.//한 나절/소낙비를 맞고 왔는지/물냄새가 나는 햇살들은//반짝이는/은빛 손으로/초록물을 만든다.
-「초록이 번지는 6월」 일부
「민들레·1」과 「초록이 번지는 6월」은 햇살이 하는 일을 더 구체화해서 보여준다. 그것은 사물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원초적인 형체와 색깔을 되찾는 일이다. 빛이 있어 사물은 색깔을 가질 수 있다. 「민들레·1」을 읽어보자. 민들레가 노오란 옷을 입은 것은 ‘담녘 따스한 곳에/물레를 걸어두고’ 햇살 속에서 ‘노오란 실파람만 뽑아’ 만든 실로 지은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햇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빛의 굴절에 의해 일곱 빛으로 분산되는 과학적 지식이 배경이 되고 있다. 그는 ‘노오란 옷→노오란 실→물레→햇살’로 이어지는 과정을 유추해가며 상상력을 펼친다. 「초록이 번지는 6월」 역시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나뭇잎이 햇살을 받아 푸르러지는 것을 보고 ‘물냄새가 나는 햇살’들이 나뭇잎에 앉아 ‘반짝이는/은빛 손으로/초록물을 만’드는 것임을 유추해낸다.
우물가/숲터에 숨어/애기빛살을 터는 새떼들.//어머니는/우물 속/수북한 새소리를/동이 가득 길어//숲길을 나오실 때//햇살이 일렁이는/푸른 하늘로/촐랑촐랑/새소리를 날리신다.
-「어머니가 긷는 아침」 전문
지금 어린이의 눈에는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로 비춰지겠지만 나이 든 세대에게는 새벽 어둠을 헤치고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어린 광경이다. ‘애기빛살을 터는 새떼들’이란 아침 햇살 속을 날아오르는 새떼를 그린 것이다. 어머니가 동이 가득 새소리를 담아오는 아침은 풀잎처럼 싱그럽다. 동심의 눈에 비친 아름다운 세상이다.
이처럼 그의 초기 시 세계는 온통 햇살의 이야기로 넘쳐난다. 그야말로 햇살 잔치이다. 햇살이야말로 동심을 표출해내기에 가장 적합한 감정의 등가물이었던 것이다. 그가 햇살 잔치를 벌이는 무대는 꽃밭이며, 계절은 봄이다. 때는 아침이며 등장인물은 아기 또는 아이들이다. 그렇다. 아이들은 복수로 존재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더 행복하다.
2. 골목 구석에 잠깐 들렀다 가는 도시의 햇살
1991년 ?밥풀?을 펴낸 시기에 오면 그의 시 세계는 많은 변모를 보이게 된다. 초기 시세계에서 보여주던 밝고 활기에 넘치던 시적 분위기는 어느 덧 사라지고 그늘진 도시의 골목 구석이 배경이 되어 있다.
아침이/ 가장 늦게 찾아오는 곳입니다.//천천히/골목길을 밟아오던 햇살도/그저 잠깐 들렀다가 갈 뿐/이내/그늘이 내리는 곳입니다.//그런 곳으로/가랑잎이/떼를 지어 모여듭니다.//바람이 추울 때면/서로 등을 부비며/밤을 지새워도/가랑잎은/그런 구석진 그늘이/되레 포근한가 봅니다.
- 「골목 구석」 전문
골목 구석은 ‘아침이 가장 늦게 찾아오는 곳’으로 햇살이 ‘그저 잠깐 들렀다가’ 간다. 도시로 이주한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시에서 시대 상황을 직접적으로 그려낸 시는 찾기 어렵다. 그렇지만 풀을 노래한 몇 편의 시에서는 행과 행 사이에서 숨겨진 시대적 고뇌를 감지할 수 있다. 「골목 구석」에서 시적화자는 바람 따라 날리는 가랑잎에 감정을 이입했다. 그래서 가랑잎들이 ‘바람이 추울 때면/서로 등을 부비며/밤을 지새’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참 쓸쓸한 장면이다. 그 때문일까. 가랑잎은 ‘구석진 그늘이/ 되레 포근’하다고 한다.
권력과 물질이 지배적 가치관으로 자리 잡은 시대에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시인은 부적응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시인의 처지를 반영하듯 이 시기에 쓴 시에는 햇살이 등장하는 시가 불과 몇 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등장하는 햇살도 핵심적인 시어로 기능하지 못하고 단순한 장식적 수사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이때는 그가 현실적으로도 매우 바쁘게 사회생활을 영위하던 때이기도 했다. 거대한 사회 조직과 맞선 그는 보잘 것 없이 작고 나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인식해야 했다. 그래서 얻은 심한 무력감 탓일까. 이 시기에 쓴 시에서는 시적화자가 힘겨워하고 극심한 피로감을 내보인다.
이때 그는 자신의 내부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현재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가랑잎처럼 그늘진 구석으로 내몰려있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에 몰두한다.
길가에 내어놓은/ 거울 가게 거울에서/내 얼굴을 봤다.//거울 속/얼굴 뒤켠에/내가 걸어온 길이 보인다.//이 작은/ 거울 속에/ 그대로 드러나는 나의 길./낯선 세상 같으면서도/웬걸/낯에 익었다.//내 얼굴 뒤켠으로 난/좁다란 그늘길/외롭지만 늘 걸어온 길이기에/정이 깊다.
- 「거울 가게 앞에서」 전문
우리가 아무 생각도 없이/살아가는/이 하루의 뒤켠에서//하루살이는/눈물처럼 소중한/빛과 바람과 그리고 목숨을/누리다 간다.
-「하루살이」 일부
「거울 가게 앞에서」와 「하루살이」 같은 시는 그 당시 그가 가진 고뇌가 무엇이었는지를 엿보게 한다. 그것들은 존재 탐구의 시로 요약된다. 거울이란 다름 아닌 내면을 들여다보는 상징이다. ‘거울 속/얼굴 뒤켠에/내가 걸어온 길’을 볼 수 있으려면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좁다란 그늘길’을 간다. 그 길은 외롭지만 늘 걸어온 길이라서 오히려 정이 깊다고 한다. 그가 관심을 갖고 보는 것은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니다. ‘좁다란 그늘길’을 가면서 만나는 ‘작고 사소한 것’들이다. 그래서 그는 ?밥풀?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작거나 사소한 것들을 위하여 시를 쓰는 일을 나는 잊지 않았다. 그것은 참된 것은 언제나 보잘 것 없는 생명 속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찾는 것은 ‘참된 것’이다. 그는 참된 것은 ‘보잘 것 없는 생명 속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다. 마침내 그는 이런 시를 쓴다.
단추공장 앞길에/ 떨어져 누운/ 단추.//햇빛은/ 알 수도 없이 높은 곳에서/이 단추공장 앞길로/부서져 내린다.//산등성이에 올라/마을을 보면/골목 아이들이 손톱만한데//산 등성이보다 더 높은 하늘/그 하늘 높은 데서 해님은/단추공장 앞길에 떨어져 누운/ 이 작은 단추구멍에까지/햇살을 부어내리신다.
-「단추공장 앞에서」 전문
단추 구멍은 작은 눈을 비유할 때 곧잘 쓰인다. 시인은 단추공장 앞길에 떨어져 있는 단추를 발견한다. 단추 공장이라면 영세업자가 운영하는 소규모의 공장일 것이다. 그 공장 앞길에 떨어져 누운 단추라니! 얼마나 소소한 존재인가. 그런데 그 단추를 산등성이보다 더 높은 하늘에서 해님이 찾아내서 단추 구멍으로 ‘햇살을 부어내리’는 것을 본 것이다. 그에게는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인가. 참으로 은혜로운 햇살이었다. 그가 그늘진 도시 속에서 햇살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한없이 쏟아지는/햇빛 중에서도/나는 내 몫의 빛만 받겠습니다.//강물처럼/가득한 이 햇빛도/민들레꽃을 피워내는데엔/꼭 필요합니다.//햇빛이 소중한만큼/내게 꼭 필요한/내 몫의 빛만 받겠습니다.//들판엔 지금/새 생명들이 태어납니다./그들에게는 따뜻하고 부드러운/햇빛이 모자랍니다.//그들을 위해서/나는/이 한없는 햇빛 중에서도/소중한 내몫의 빛만 받겠습니다.
- 「기도」 전문
「기도」는 햇빛에 관한 시적 사유가 결정(結晶)이 된 시이다. 햇살에 대한 의미 탐색은 그동안 여러 편의 시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마침내 「기도」로 결정이 된 것이다. 그는 들판에 태어나는 ‘작고 사소한 것’들의 소중한 생명을 위하여 ‘나는/이 한없는 햇빛 중에서도/ 소중한 내 몫의 빛만 받겠’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햇빛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겸허함이 아닐 수 없다. 무한정 쏟아져 내리는 햇빛도 ‘작고 사소한 것’들과 골고루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그가 동시를 쓰는 힘의 원천이 된다고 본다.
그 후 1996년에 펴낸 ?아흔아홉 개의 꿈?에서는 다시 햇살이 많은 시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햇살의 이미지도 ?밥풀?의 시기에 비해 훨씬 더 힘차고 밝고 희망적이다.
그 길의 저쪽에서/햇살을 한 묶음 들고/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민들레만큼/키가 쬐끄마한 아이다.(「겨울을 보내던 날」 일부)
아버지다.//아버지!//안개를 걷으며 오신/아버지의 얼굴에서/쫘악-./햇빛이 쏟아진다.(안개 속에서」 일부)
바람과 햇빛이 있는 데라면/그의 품에/조용히 안기고 싶다.(「씨앗」 일부)
바람이 인다./햇살이 흔들린다.//먼먼/어디선가/산꿩이 울고//아기스님의/목탁소리 들린다.(「절 마당에서」 일부)
?아흔아홉 개의 꿈?에서만 뽑아본 몇 구절이다. 햇살이 장식적 수사로 쓰이는 경우가 크게 줄었다. 반면에 핵심 시어로 기능하는 햇살들이 많이 등장했다. 시도 그만큼 희망적인 이미지를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그가 오랜 고뇌 끝에 마침내 원하는 답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세상 살아가는 삶의 원리를 터득했다는 것이다. 「풀들이 보내는 악수」에 잘 나타나 있다.
낫날에 파랗게 커 오르던/꿈을 베이고도/들풀은 화내지 않는다.//아픈 상처일수록/우리들보다 더 먼저/용서할 줄 아는 이름 없는 들풀들.//가득히 차 오르는 풀숲에서/우리들보다 더 먼저//손을 내밀고 기다리는/노란 풀꽃들의 웃음.
- 「풀들이 보내는 악수」 전문
그는 ‘아픈 상처일수록/우리들보다 더 먼저/용서할 줄’ 알고, ‘우리들보다 더 먼저//손을 내밀고 기다리는/노란 풀꽃들의 웃음.’을 보았다. 이외에도 그가 「밥풀」이란 시에서 ‘성자’를 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필연적 이유가 있었던 발견인 것이다.
그러나 ?밥풀?, ?아흔아홉 개의 꿈?을 비롯하여 이 시기에 쓴 시를 읽으면서 필자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시 세계가 너무 빨리 완료되는 것 아니냐는 느낌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독자가 원하는 시적 화자는 일찍 깨달음을 얻은 ‘성자’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이 시대의 진실에 대하여, 삶의 자잘한 문제에 대하여 치열하게 고뇌하는 나 같은 남일 때 더 폭넓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먼저 용서하고 더 먼저 손 내미는’ 것은 삶의 갈등이 제거된 곳이다. 그에게 초월의식은 체질적인 것일까. 그가 초기 시부터 ‘온달님’ 등으로 조숙증을 보인 것도 그 한 이유인 듯 싶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문제적 현실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3. 신발코 안에서 발견한 새앙쥐
자기 부정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추구해온 시 세계를 전면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다. 그만큼 그는 변화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자, 이제 모든 고정관념을 버리자구. 시는 엄숙한 것만이 아니거든. 시는 고상한 것만이 아니라구. 뭔가 주려고 하는 시는 딱 질색이야. 그런 거는 너무 많이 들었잖아. 고상한 체 하는 것도, 분위기 잡는 것도 질색이야. 그런 거는 어른들한테나 던져 주라구. 우리는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가 아니잖아. 거침없이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팔팔한 고기여야 한다구.
그는 인도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란네폴’ 폭포를 보고 고정관념이 ‘꽈다당’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높은 산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이 폭포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2킬로미터도 더 될 긴 협곡의 저승같은 기슭으로 쏟아지는 폭포’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자기가 써온 시도 ‘꽈다당! 하고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깨어지기를 바랐다. 새로운 시가 필요했다. 새로운 감수성으로 시를 쓰고 싶었다. 그것이 ?신발코 안에는 새앙쥐가 산다?와 『월화수목금토일별요일』이다.
이 시집들은 이제까지 펴낸 시집과 완전히 다른 면을 내보인다. 동시집이 아니라 이야기 시집이라고 했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이라는 말도 덧붙여 놓았다. 많은 변화를 모색했다는 증거이다.
특히 ?신발코 안에는 새앙쥐가 산다?는 많은 변화를 담은 시집이다. 우선 시 문장이 경쾌해졌다. 엄숙, 고상, 점잔 등의 덕목을 훌훌 떨쳐버리고 밝고 가볍고 명랑해졌다. 어린이들에게 다가가려면 이렇게 과감하게 변해야 한다고 본을 보이는 듯하다. 책의 지질이나 판형, 인쇄 상태도 밝고 환해졌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내부로부터 와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 변화에도 성공했다. 시적 사고가 자유로워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주목할 만한 큰 변화였다. 고정관념을 온전하게 떨쳐버리지 못한 부분이 더러 보이기도 하나 그의 변신은 대체로 성공적이라고 평가할만하다. 사실 이 정도의 변화도 엄청난 것이다. 자신의 시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성취였던 것이다. 그는 이 변화에 성공함으로써 새로운 시의 지평을 활짝 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햇살이 나타나는 시는 딱 한 편뿐이다.
자, 아침이 왔어요. 밝은 빛의 세상으로 나오세요. 빛의 아름다움을 보며 드리겠어요. 이 노란 민들레꽃도 햇볕이 피웠고, 오색무늬나비도 햇볕이 만들었다구요. 이제 나오세요, 빛의 세상으로. 당신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 드리겠어요. 두더지를 쫓던 사냥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더지를 유혹했다. 그러나 땅 속에 숨은 두더지가 말했다. 그러지 말고 당신이 땅 속으로 들어오세요.
-「두더지와 사냥개」 일부
두더지를 잡으려고 유혹하는 사냥개의 말 속에 잠시 등장하는 햇살일 뿐이다. 왜 이 시집에는 햇살이 주도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기존의 시 세계를 강하게 부정함으로써 갖게 된 과도기적 현상일까.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이다.
4. 손이 천 개라도 모자라는 가을 햇살
2004년 ?실 끝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지?에 이르면 권영상의 시 세계는 또 한 번 큰 변화를 보인다. 변화가 아니다. 등단 초기에 보여주었던 시 세계로 복귀했다고 해야 옳다. 그렇다고 초기 시 세계를 재현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도 어느새 나이를 먹었다. 시의 배경이 되는 계절이 봄에서 가을로 바뀌었고, 꽃씨를 심을 때 따라 묻힌 햇살이 ‘손이 천 개라도 모자라겠다!’ 하고 외치면서 가을 곡식들을 익히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손이 천 개라도 모자라겠다!/안마당 고추 멍석에서 고추를 말리는/가을 햇살이 종종댄다./가을 햇살은 바쁘다./엉덩이 한 번 붙이지 못하고/참깨 멍석으로 겅중 뛴다./뒤적뒤적 참깨를 뒤적이다간 딸깍,/콩깍지 속의 샛노란 콩을 깐다./그것만이 아니다./담장 위에 누운 호박 덩이 익히랴,/모과 둥치 모과 덩이 익히랴,/뜨락 밑의 채송화, 채송화 꽃씨 여물리랴/가을 햇살은 바쁘다./수레를 끌고 들어오는/아버지 어깨 위의 콩메뚜기,/거기에도 깡충 뛰어올라/가을 햇살은 콩메뚜기를 살찌운다./참말이지 손이 천개라도 모자라겠다./가을 햇살은.
-「손이 천 개라도」 전문
봄과 아침과 새싹과 아기를 노래하던 그의 시는 이제 가을과 햇살 바른 늦은 오후와 열매와 아버지를 그려낸다. 초기의 시 세계가 새싹의 초록빛과 꽃의 빨간 빛과 민들레의 노란 빛으로 휘황하게 밝혔다면, 이제는 잘 익은 참깨와 호박과 모과의 누런 빛과 잘 익은 고추의 빨간색으로 결실의 기쁨이 충만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알찬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는 봄 일찍 땅을 파고 씨를 뿌려야 한다. 어디 그뿐이랴. 비바람을 이기고 가뭄을 견뎌야 하고 병충해를 막아야 한다. 땀 없이 알찬 수확을 거둘 수 없다. 이제 그의 시를 읽으면 긴 시간 성실한 노동 끝에 알찬 수확물을 받아든 것 같은 느낌이다. 불현듯 시적 사유와 표현들이 유연하면서도 깊이를 얻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꽃씨를 심을 때 파란 새싹을 밀어올리기 위해 같이 묻혔던 햇살은 지금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하다. 「쪼끔만」이 그 답이다.
햇살이 숲 위로 쏟아집니다./쏟아지는 햇살이 아까워/참나무들이 잎을 펼쳐 햇살을 받습니다./그러고도 남은 햇살이/참나무 아래로 떨어집니다./-쪼끔만./거미줄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미가/꼭 필요한 만큼 햇살 조각을 떼어 냅니다./거미가 떼어내고 남은 햇살이/숲 아래 어린 풀잎 위에 내려앉습니다./쪼끔만, 이번엔 꼭 필요한 만큼/풀잎이 햇살을 덜어 냅니다./- 나도 쪼끔만./개미가 있군요, 풀잎 밑을 기는 개미./개미까지 받을 수 있도록/숲은 꼭 맞게 햇살을 나눕니다.
-「쪼금만」 전문
참나무, 거미, 풀잎, 개미가 ‘꼭 필요한 만큼 햇살 조각을 떼어’ 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월적 위치에 있는 사물이 햇살을 독점하는 일은 없다. 마지막 ‘개미까지 받을 수 있도록/숲은 꼭 맞게 햇살을 나눕니다.’란 구절에 이르면 조금씩 쌓여오던 시적 감동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아무리 대가가 없는 햇살이라도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나누어 가질 때 그가 추구하는 동심의 세상은 구현된다.
Ⅲ. 나가며
꽃씨를 심을 때 따라가 묻혔던 봄 햇살은 이제 가을이 되자 ‘호박 덩이 익히랴, 모과 덩이 익히랴, 채송화 꽃씨 여물리랴.’ 멍석으로 담장으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씨앗을 따라 같이 묻힌 봄 햇살’, ‘골목 구석에 잠깐 들렀다 가는 도시의 햇살’, ‘신발코 안에서 발견한 생쥐’, ‘손이 천 개라도 모자라는 가을 햇살’ 등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본 햇살의 모습은 권영상 시인이 살아온 삶과 궤적을 같이 한다.
햇살의 이미지가 밝고 힘차고 활기차게 나타날 때는 그의 삶도 활기에 넘칠 때이다. 이때는 햇살이 나타나는 빈도가 높고 핵심적인 시어로 기능한다. 반면에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햇살이 나타나는 빈도가 급격히 감소하고 시어로서도 부수적인 기능에 멈추고 만다. 그의 시에서 햇살은 ‘참다운 인간의 진실한 마음’을 보여줄 때 가장 밝고 환하게 빛난다.
봄, 여름, 가을을 거쳐 온 ‘햇살’이 겨울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시적 변모라는 것은 평생을 왕성한 실험의식으로 끊임없이 자기 시 세계를 갱신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아마 그는 우리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시를 보여줄 것으로 생각한다. 그때도 ‘햇살’은 핵심적인 기능을 하는 시어로 나타날 것임을 필자는 확신한다.
<아동문학평론>(전병호, 2009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