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의 유토피아를 찾는 마술사
-권영상론-
이 정 석(시인, 아동문학평론가)
1. 들머리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색깔을 지니고 싶어 한다. 개인의 장신구부터 옷차림새, 머리 모양새, 음식 솜씨 등 자신의 특색있는 고유의 독창성을 가지고자 애쓴다. 특히 젊은이들은 남과 비슷하게 보이거나 동일하게 보이는 것을 대단히 싫어한다. 어찌 젊은이뿐이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자기 생명의 존엄성을 타인의 그것과 비교하여 유사성이나 동일성으로 폄하, 치부한다면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만큼 주체성이니, 개성이니 하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
특색있고 차별적인 고유한 상품의 그것을 브랜드(Brand)라고 하고, 개인의 내면의 독특한 색깔이나 향기를 인품(人品), 인격(人格)이라고 하고, 한 민족의 가치있는 물질이나 정신의 총체를 문화(文化)라고 하고, 문학가들의 독특한 글투를 문체(文體)라고 한다. 이 모두를 거칠게 하나로 집약하여 표현한다면 고유 스타일 즉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명한 미키마우스, 아기공룡 둘리, 함평 나비, 마이크로 소프트사, 코카콜라 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에서도 김소월의 민족적 서정시 경향, 황순원의 간결체 소설 등 독특한 문학 정체성의 향기도 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세상에는 고유 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혹시 문학인 중에서 자신의 문학적 정체성이나 독특한 이미지, 개성, 문체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까? 놀랍게도 문학적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시인이 있다. 바로 권영상(權寧相 1952~ )이다.
정체(正體)가 정체(停滯)를 낳을 줄 몰랐다. 내 눈은 항상 그런 소재(註-작고 보잘것 없는 것이 아름답고, 존재의 참다움을 지니는 소재임)에 매달렸고, 그런 소재들의 바깥으로 탈출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나의 정체성(正體性)을 찾음과 동시에 나는 그들에 얽매이는 정체성(停滯性)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생명성은 끝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 지금의 나를 부인하고 새로운 나를 찾으려는 시도로 꽉 차 있는 것이 생명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지금(註-1996년 경) 정체성의 늪에 갇혀 있다. 한 가지 스타일에 빠져 똑같은 것을 찍어내는 듯하는 작업이 나를 절망케 한다.
권영상 시인의 문학적 정체성을 부정한 고백 속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들어 있다. 하나는 정체성(正體性)을 획득한다는 것보다는 정체성(停滯性)에 빠지는 것을 더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다양한 문학적 실험을 해 보겠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자신에 대한 혹독한 채찍이요, 안이한 자신에 대한 질타요, 자기 변신을 위한 싯뻘건 인두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를 부인하고 새로운 나를 찾으려는 시도로 꽉 차 있는 것이’ 권영상 자신의 ‘생명성’을 찾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권영상이 문학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기 목소리가 분명한, 정체성을 확립한 시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은 문학적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수시로 다양한 색깔을 보여주는 변화무쌍한 시인으로 거듭나겠다는 다짐이라고 할 수 있다.
1979년에 문단에 등단한 권영상 시인은 현재(2008년 여름)까지 12권의 동시집을 출간하였다.
제1동시집 ?단풍을 몰고오는 바람?(1981)
제2동시집 ?햇살에서 나오는 아이들? (1985)
제3동시집 ?동트는 하늘? (1987)
제4동시집 ?한해를 살면? (1987)
제5동시집 ?버려진 땅의 가시나무? (1988)
제6동시집 ?밥풀? (1991)
제7동시집 ?벙어리장갑? (1992)
제8동시집 ?납작납작한 코끼리? (1993)
제9동시집 ?아흔아홉 개의 꿈? (1996)
제10동시집 ?신발코 안에는 생쥐가 산다? (1999)
제11동시집 ?월화수목금토별요일? (1999)
제12동시집 ?실끝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지? (2004)
권영상의 동시 문단 30년을 시 경향에 따른 시대 구분을 하면 최창숙의 언급처럼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고향인 강원도에서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1979년 등단부터 제4동시집『한해를 살면』이 출간된 1987년까지이며, 제2기는 제5동시집 『버려진 땅의 가시나무』출간된 1988년부터 제9동시집 『아흔아홉 개의 꿈』이 나온 1996년까지 ‘특정 정치인 중심의 역사가 아닌 민중 중심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소외받고 보잘 것 없는’ 소재들에게 관심을 둔 시기이다. 제3기는 1999년 제10동시집 『신발코 안에는 생쥐가 산다』부터 현재까지 놀랍고 재미있는 발상의 동시, 다양한 문학적 실험을 하고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12권 각각의 동시집을 읽어보면 시대 구분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처럼 느껴진다. 왜냐면 동시집 하나하나가 모두 개성이 있는 동시집이어서 같은 문학적 성향을 가진 몇 시기로 묶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기의 동시들은 몇 가지 측면에서 매우 공통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시기를 3등분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특이한 권영상의 제2기(1988~1996) 문학적 특성을 나열하면 첫째로 ‘소외받고 작고 보잘것 없는 소재들’을 통해 자신의 사회 현실 의식을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지적대로 길바닥에 떨어진 열쇠, 단추구멍, 굴뚝, 휴지조각, 버려진 너트, 구석자리 등 쓸모없거나 일반 사람에게 관심이 적고 멀어진 다양한 소재를 통해 힘없는 민중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둘째, ‘무력적 정치현실에 직면’하면서 가졌던, 시인의 고민스런 내면적 자아의식을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로 거울, 강물, 국물이 든 숟가락, 세수대야물, 그림자 등을 통해 심층에 쌓여 있던 방황과 자기부정, 소외 등을 찾아 자신의 삶이나 생활 자세를 끊임없이 추스르고 있다.
셋째는 들풀이나 들꽃을 끌어들여 민중의 팍팍한 삶과 끈질긴 저항 그리고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영상 동시문학의 제2기(1988~1996)를 사회현실 참여시기로 정리한다면 제1기(1979~1987)는 서정적 자연 찬미 시기, 제3기(1997~현재)를 아직도 진행 중이므로 정리하기는 어려우나 해학과 익살 등 파격적인 동시 실험 시기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평론에서는 그의 서정적 작품 경향은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므로 생략하고 제2시기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인 ‘들풀’을 통해 권영상 시인이 천착한 민중의식과 자아의식을 살펴보고, 제3기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낯설게 하기, 해학과 익살을 통해 얻어지는 깨닫기를 훑어보고, 초기부터 지금까지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시인의 아버지 생각하기에 대하여 주마간산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2. 민중 의식과 자아 의식 찾기
풀들 중에서 이름이 없는 풀은 없다. 식물학자들의 손에 의해 거의 모든 풀들은 학술적으로 고유한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에 ‘이름 없는 풀’이란 없으며 다만 ‘이름 모를 풀’이 있을 뿐이다. 사람에게도 누구나 고유한 자기만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이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단지 상대방의 이름을 모를 뿐이다. 들에서 터를 잡고 사는, 수많은 이름모를 풀들을 우리는 보통 싸잡아 ‘들풀’이라고 부른다. 아울러 우리는 이름이 가진 수많은,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들을 함께 ‘민중’이라고 한다. 보통 들풀의 강인한 생명력을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민중의 질긴 생명력을 말한다. 그래서 들풀이나 민중은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권영상은 1980년대 후반, 거처가 서울이라는 공간으로 바뀌고 차츰 무력적 정치 현실과 직면하게 되면서부터 무단적 정치 현실이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게 되었으며, 민중 중심의 역사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정체성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글에서 고백하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제5동시집부터 최근 제12동시집까지 들풀들을 지속적으로 제재로 삼아 노래하고 있다. 비를 맞고 있는 들풀, 바람과 맞서는 들풀, 잘려진 들풀 등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들풀들의 생태적 특징에서 민중의 삶과 동일한 요소를 찾아 심도있게 표현하고 있다. 들풀에 대한 시인의 접근 방식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데 제2기의 작품 속에서는 들풀을 통해 감정이나 생각을 직설적으로 풀었다고 한다면 2000년 이후에 등장하는 들풀에 관한 작품에서는 감정이 매우 절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① 풀들을 베고 난 자리에 나가보면/풀들은 장마비가 그치는 사이로/다시 차 올랐다.//낫날에 파랗게 커오르던/꿈을 베이고도/들풀은 화내지 않는다.//아픈 상처일수록/우리들보다 더 먼저/용서할 줄 아는 이름 없는 들풀들.//가득히 차 오르는 풀숲에서/우리들보다 더 먼저//손을 내밀고 기다리는/노란 들꽃들의 웃음.
-「풀들이 보내는 악수」 전문 (제5시집)-
② 들꽃은/바람을 맞으며 산다.//들꽃은 따로이 집이 필요없다/촛불과 등이 필요없다/이슬을 맞을 줄 알고/비와 바람을 맞을 줄 알면 된다.//들꽃은/바람을 비켜서지 않는다/비와 바람을 비키지 않는다.//들꽃은 긴 어둠 속에서도/아침을 기다리기 위해/지치지 않는다.//그렇기에 들꽃은/쓰러져도 아름다운/들꽃으로 남는다.
-「들꽃」 전문 (제6동시집)-
③ 바람이/심하게 불어도/풀들은/바람을 보고/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바람이/불면 불수록/바람을 항해/풀들은 등을 돌린다.
-「풀들은」전문 (제8동시집)-
① 「풀들이 보내는 악수」는 들풀들의 생명력은 무력에 견디면서 오히려 풀 자신들을 무참히 베어버린 살인자나 탄압자에게 웃음과 화해의 손을 내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② 「들꽃」에서는 어렵고 험한 어떤 환경에서도 비굴하게 타협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 끝내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들꽃의 장엄한 승리를 보여주고 있으며, ③ 「풀들은」에서는 들풀과 적대적인 관계인 바람과는 대결, 비타협의 불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2기에 창작된 이 세 작품에서는 시인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감정이나 생각을 여과되지 않고 직설적으로 토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④ 흙바람이/ 풀들의 머리채를 쥐어 흔든다.// 사납게/ 휘몰아칠 때에도/ 풀들은 바람과 맞서지 않았다.// 바람이 가면/ 가는 대로/ 허리를 낮추며 흔들렸다.// 그런 때에도/ 가만히 풀섶을 뒤지면/ 풀섶 밑은 고요했다.// 그 고요한 자리에/ 숨겨 놓은/ 풀종다리의 귀여운 알들.// 오. 고놈들을/ 감추어 내려고/ 풀들은 바람에 순종했다. -「풀들은」 전문 (제9동시집)-
동시 ④ 「풀들은」에서는 앞의 ①~③ 창작시기 보다 늦게 창작되었는데, 들풀에게 화자의 시선이 있지 않고 풀숲에 숨어있는 ‘풀종다리의 알’에 있다. 작품의 차원이 달라져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약자에 대한 사랑이나 희생을 주로 그렸다고 할 수 있다. ‘흙바람’으로 상징되는 반사랑적 존재와, ‘풀들’로 나타난 이웃이나 부모들과, ‘풀종다리의 알’로 표현된 약자나 어린이가 이 작품의 중요한 세 축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시어는 바람과도 대결하지 않은 ‘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순종은 소극성이나 비굴성이 함축되어 있지만 2연에서 ‘바람과 맞서지 않았다’는 시행으로 보아, 능력의 부재로 인한 부정이 아니라 자발적 의지에 의한 부정으로 비굴성보다는 희생성을 더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적 화자의 눈이 앞부분에서는 주어로 쓰인 ‘흙바람’에게 있다가 뒷부분에서는 ‘풀들’이나 ‘귀여운 알들’로 옮겨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중간에서 사동형과 피동형이 혼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작품과 김수영의 「풀」을 대비하여 동시가 아동문학적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권영상의 입장으로 보면 김수영의 「풀」과 비교한 점이 작품의 창의성을 의심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것으로 오해할지 모르겠지만.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로 시작되는 김수영의 「풀」은 한국 시사를 빛내는 수작이다. 이 시에는 민중의 저항을 상징하는 ‘풀’과 불의를 상징하는 ‘바람’이 서로 극복할 수 없는 갈등으로 대결하고 있다. 독자들을 팽팽한 긴장감으로 몰아가고 있다.
김수영은 ‘풀-바람’의 대결 구도 속에서 철저하게 ‘풀’의 입장으로 민중의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그에 비하여 권영상의 「풀들은」은 전술한 것처럼 세 축이 서로 대결하고 있지 않고 ‘풀들’이 순종하여 포용과 희생으로써 화합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즉 권영상은 ‘흙바람-풀들-풀종다리의 알’이라는 삼각 구도 속에서 오히려 시적 화자의 눈높이를 풀종다리의 알이 있는 낮은 풀섶에 더 머물게 해서 자연과 인간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함께 어울려 사는데 없어서는 안될 화해와 타협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동문학이 지향하는 점이 무엇인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으며, 또한 동시가 가지는 특성이 어떤 것인지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⑤ 방금/ 손수레가/ 지나간 자리// 바퀴에 밟힌 들풀이/ 푸득푸득/ 구겨진 잎을 편다. -「들풀」 전문 (제12동시집)-
동시 ⑤ 「들풀」은 2연 6연으로 된 아주 짧은 작품이지만 많은 의미가 담긴 동시이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들풀의 자생력에서 생명의 역동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지니는 서정성도 뛰어나지만 작품에 내포된 사회성도 김수영의 「풀」에 못지않다고 할 수 있다. 손수레와 대립되는 들풀의 의미를 굳이 새기지 않더라도 분명 동시의 한계를 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푸득푸득’이라는 시어에서 보이는 생명력은 수많은 말이 필요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어를 이 작품의 화룡점정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가장 최근에 창작된 ⑤ 「들풀」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인의 뜨거운 감정이나 직접적인 생각이 드러나지 않고 냉철한 가슴에서 우러난 차분한 어조를 띠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으로써 시인의 현실의식도 더 내밀해지고 견고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6동시집 ?밥풀?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권영상의 내면의식에 대한 단면을 보여 주는, 매우 흥미로운 동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암울했던 80년대를 지나면서 시인으로서 과연 자신은 존재의 이유가 무엇이며, 무슨 역할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강한 의구심, 반성, 자괴감 등이 드러나 있는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동시집 표지 ?밥풀? 제목 아래 ‘작은 것을 더욱 아끼는 시집’이라는 부제가 붙이고 있는데, 일상에서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런 작은 소재를 통해 소외되고 밀려난 민중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특히 자신의 무기력한 모습 속에 숨어있는 강한 자아의식을 대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⑥ 흘러가는 물에/머리를 감고/물속을 들여다본다.//물은 흐르는데/물 아래/나와 함께 머무르는 얼굴.//시간처럼/물은 멀리멀리/흘러가는데//물속엔/아직도 떠나지 못하고/혼자 남은 사람//어디서/많이 본 듯하다.
-「나」전문 (제6동시집)-
⑦ 밥상을 들고 나간 자리에//밥풀 하나가 오도마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바깥을 나가려든 참에 되돌아 보아도//밥풀은 흰 성자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바쁜 발걸음 아래에서도 발길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밟히면 그 순간 으깨어지고 마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도 없이//이 아침 분주한 방바닥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나이 어린 성자의 얼굴로.
-「밥풀」전문 (제6동시집)-
동시 ⑥ 「나」는 흐르는 물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시대에 맞춰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고 있는 자아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흐르는 물은 내면적 자아를 들여다 보는 거울 같은 매개체라고 할 수 있으며, 암울한 80년대에 대한 일종 시인의 부채의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권영상 시인의 방황이나 고민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제6동시집의 표제 작품인 ⑦ 「밥풀」에서는 시인의 결연하고 단호한 내면의식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먹다가 우연히 흘린 한 알의 ‘밥풀’이 ‘밟히면 그 순간 으깨어지고 마는 두려움’을 이기고 앉아 있다. ‘밥풀’을 죽음도 불사한 매우 결연한 ‘성자’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분주한 방바닥에 앉은 ‘밥풀’ 대신 권영상 시인 자신을 대치시키면 어떨까. ‘밥풀’은 권영상 시인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3연의 ‘나가려는 참에 되돌아 보아도’는 상당히 중요한 시구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시적 화자가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나가려는 참에’의 주체가 어투로 보아 ‘나’라는 1인칭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되돌아 보아도’는 반성, 각성, 숙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나가려는 참에 되돌아 보아도’는 떨어진 ‘밥풀’을 통해 내면적 자아를 발견하는 시인의 의도적인 주시 또는 순간적인 자아성찰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밥풀’은 시인과 동일한 인격체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 동시 ⑦은 때가 되면 전사(戰士)가 되어 큰일을 완수하여 ‘성자(聖者)’가 되겠다는 시인의 결연한 자아의식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의 무서운 자기 선언인 것이다.
3. 낯설게 하기
현대사회에서는 일련의 새로운 인식 추구라는 인간의 심리적 특성을 자극하기 위해 예술, 건축, 상업 등 사회 전반에서 의도적으로 과장된 낯선 모습을 이용한 경우가 아주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누드 컴퓨터도 그렇고, 철골 구조가 보이는 건물이 그렇고, 안이 들여다 보이는 찻집도 그렇다. 즉 이런 기법은 기계적으로 기억되고 인식된 현상과 사물을 생소하고 낯선 것으로 바꾸어서, 대상을 새롭게 또는 정확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낯설게 하기는 일상화되어 있는 우리의 지각이나 인식의 틀을 깨고 대상이나 사물의 모습을 낯설게 하여 그것의 본래의 새로운 모습을 찾는 것을 말하는데 ‘고정관념 깨기’, ‘삐딱하게 보기’, ‘시치미 떼기’ 등은 낯설게 하기와 동일한 의미로 쓰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권영상 시인은 과감하게 동시문학에 낯설게 하기를 도입하고 있다.
“자, 모든 고정 관념을 버리자구. 시는 엄숙한 것만이 아니거든. 시는 고상한 것만이 아니라구. 뭔가 주려고 하는 시는 딱 질색이야. 그런 거는 너무 많이 들었잖아. 고상한 체 하는 것도, 분위기 잡는 것도 질색이야. 그런 것는 어른들한테나 던져 주라구. …… 그래서 나는 남들과 똑같은 시를 쓰지 않기로 했어. 그 많은 시들 중에서도 내 빛깔의 시를 지키기 위해서.…… ”
권영상 시인은 ‘엄숙한 것’, ‘고상한 것’, ‘뭔가 주려는 것’, ‘분위기 잡는 것’이 바로 고정적인 일상, 낯익은 사고이며, 깨뜨려야 하는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고정 관념을 깨뜨리는 행위는 인식의 대전환이나 발상의 전환을 전제로 한다. 권영상의 제2기 때부터 슬슬 시작한 ‘낯설게 하기’를 제3기 제10동시집 『신발코 안에는 생쥐가 산다』에 들어와 파격적인 도입하고 있다. ‘어?’하고 읽다가 보면 ‘아!’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기계적인 인식의 틀을 과감히 깨뜨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⑧ 바퀴를 단 학교는/없을까요.//봄이면 버들잎이 피는/개울가에,/여름이면/파도소리 시원한 바다에,//가을이면/과수원길 옆/파란 하늘을 보는 그곳으로,/겨울이면/철새가 날아오는/얼음장 위로/우리들이 밀고다닐/바퀴를 단 학교는 없을까요.
-「굴러다니는 학교」전문(제6시집)-
⑨ 찬물을 끼얹지 마./쑥쑥 살아오르는 기분들이 놀라/움츠러들잖니./찬물을 끼얹지 마./그러나 코뿔소가 놀라 아기 코뿔소로/움츠러든다면 그거 어떻겠니./커다란 거인이 놀라/난쟁이가 되고,/할아버지가 놀라/오줌싸개 아기로 움츠러들 수만/있다면/휙- 찬물을/끼얹어도 되겠지./우리네 무서운 할아버지들도/아마, 그건/좋아하실걸.
-「찬물 끼얹기」전문(제8시집)-
⑧ 「굴러다니는 학교」와 ⑨「찬물 끼얹기」는 고정관념 깨기를 시도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제2기 때 창작되었으며, 이미 이때부터 권영상 시인의 낯설게하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8동시집에는 ⑨ 동시 외에도 「납작납작 코끼리」,「능금나무 아래에서」,「오리발」,「구멍으로 들어오시는 철공소 사장님」,「63빌딩을 원두막으로 만들어서」,「벼룩시장」,「쥐는 높은 곳에」,「그믐날 밤에 놀란 아이들」등이 있고 제9동시집에는「털보 목수」등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⑩ 길거리에 누어 놓은 예쁜 강아지 똥, 아기가 떨어뜨린 밥풀 몇 알, 생선뼈 서너 마디……. 그런 게 다 내밥이야. 그러니 내밥을 건드리지 말아줘. 공중을 날다가도 배가 고프면 나는 제일 먼저 거기에 가 내리지. 내 밥이니까. 더럽지 않냐구? 천만에. 이세상 그 무엇도 그보다 부럽지 않다구. 그걸 먹으면 집 안마당을 아흔아홉 바퀴나 돌 수 있어. 거위 등을 타고 온종일 놀 수 있어, 그러니 제발 내밥을 건들지 말아 줘. 그게 내 소원이야. 웃기지 말라구? 그래. 파리인 내 마음을 네가 어떻게 알겠니! -「누구에게나 다 소원이 있다」전문(제10동시집)-
⑩ 「누구에게나 다 소원이 있다」는 사람들이 인식하는 ‘강아지 똥’에 대한 경도된 사고를 ‘파리’의 입장에서 여지없이 깨뜨리고 만다. 더러움이란 다만 인간만이 가지는 주관적인 생각과 태도일 뿐이다. 경천동지(驚天動地)는 도치된 현상을 경험했을 때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지고 있는 고정 관념을 버려야만 생기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고정 관념을 깨는 행위로 생명을 구한 훌륭한 인물이 발견된다. 송나라 때 「자치통감」을 지은 대학자 사마광이다. 사마광이 어렸을 적 친구들과 물이 가득 찬 큰항아리 주위에서 놀다가 한 아이가 항아리에 빠져 모두 당황했는데 사마광이 침착하게 돌로 항아리를 깨서 그 구멍으로 친구를 구출했다는 것이다. 빠진 아이를 물 항아리 위에서 건지지 않고 돌로 항아리를 깬 후 항아리 옆구리에서 구하는 사마광의 행위 속에 기계적인 사고의 위험성과 참신한 발상의 위대성을 극명하게 대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고정 관념을 벗어 던지면 인간의 정결한 ‘밥’과 파리의 맛있는 ‘강아지 똥’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 대상이 되는 것이다.
⑪ 아래층에 할머니 집이 있다면 좋겠다. 그 아래층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면 더욱 좋겠다. 그 아래층에 치킨집이 있고, 그 아래층에 중국집이, 그 아래층에 만화가게, 그 아래층에 수박밭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 바다에서 헤엄치다 싫증나면 수박 하나 먹고, 수박 먹다 싫증나면 만화책 보고, 만화책 보다 배고프면 자장면 먹고, 치킨 먹고. 쓱쓱쓱 입 문지르고는 아이스크림 먹고, 할머니 집에 올라와선 옛날 이야기 듣고, 옛날에 옛날에 도깨비가 있었는데 대추나무에 올라가 대추를 따먹다가……. 할머니 무릎 베고 스르르 잠들 수 있다면 좋겠다. 참 좋겠다.
-「할머니 무릎 베고 스르르」전문(제10동시집)-
권영상의 작품 중에서 어린이들의 고정적인 일상을 깨뜨리는 것 중의 최고는 아마 ⑪「할머니 무릎 베고 스르르」가 아닐까. 어찌 보면 어린이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으며, 인간 세상을 닮은 가장 완벽한 어린이 천국이라고 할 것이다. 이 동시는 일자 상승식 구성 방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작품 속에 나오는 세계는 바다의 세계(1층)→ 수박의 세계(2층)→ 만화의 세계(3층)→ 자장면의 세계(4층)→치킨의 세계(5층)→ 아이스크림의 세계(6층)→ 가족의 세계(7층, 8층)로 구분지을 수 있다. 자연(1층, 2층)과 인간(7, 8층)과 물질(4층, 5층, 6층), 그리고 정신(3층, 7층)이 조화롭게 어울린 절대적인 세계를 꿈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지막 ‘좋겠다’의 반복적 표현에서 어린이들의 소망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알 수 있다. 결국 권영상은 낯설게 하기라는 문학적 기법을 이용해 기존의 관념을 부수고 신나는 어린이들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아버지 생각하기
권영상이 1985년 부친을 여윈 뒤부터 그의 작품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제8동시집 서문에서는 ‘아버지에 관심도 빠뜨릴 수 없다. 그것은 남성에 대한 나의 존경심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다루어 볼 만한 끈끈한 맛이 배어 있는 대상이다.’라고 언급할 만큼 현대까지도 권영상 시인이 천착한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그가 남성 우월주의자는 아니다. 그리고 남존여비사상에 찌든 사람도 아니다. 다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아버지 사랑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일 뿐이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의 작품 중에서 아버지를 제재로 삼았던 동시들이 대부분 문학 작품으로서 완성도가 높다는 사실이다.
⑫ 신재화./엄마의 이름을 적을 줄 몰라/아버지는/신재와./그렇게 적으신 일이 있었다지요.//그 후로/아버지는 엄마의 이름을/적으실 때마다//바른 손이 아파서/그러시며/연필을 넘기셨다지요.//아무리 어려운 일도/혼자 손으로/다 해 내시던 아버지가//엄마의 이름을 적으실 때만은/바른 손이 아파서-/그러시며/눈시울을 붉히셨다지요.
-「아버지와 아들6」 전문 (제9동시집)-
⑬ 담요 한 장 속에/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누웠다./한참만에 아버지가/꿈쩍하며 뒤척이신다./혼자 잠드는 게 미안해/나도 꼼지락 돌아눕는다./밤이 깊어가는데/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내 발을 덮어주시고/다시 조용히 누우신다./그냥 누워있는 게 뭣해/나는 다리를 오므렸다./아버지-하고 부르고 싶었다./그 순간/자냐? 하는 아버지의 쉰 듯한 목소리/-네./나는 속으로만 대답하고 돌아누웠다.
-「담요 한 장 속에」전문 (제6동시집)-
⑭ -밀어 드릴까요?/ 마을 할아버지의 짐수레를 보고/ 지나치기가 미안했다./ -누군진 모르겠다만./ 그 말에 짐수레에 손을 얹고/ 천천히 밀었다./ 한참 만에 할아버지가 물었다./ -아버지가 누구신고?/ 나는 머뭇거렸다./ -그럼, 뉘 집에 사시는고?/ -대추나무집요./ 내 대답에 흘끔 돌아다보시던 할아버지가/ -허, 참. 정수 그 사람./ 그러신다./ 할아버지가 말하는/ 정수 그 사람은 우리 아버지다.
-「돌아오는 길에」 전문 (제12동시집)-
⑫ 「아버지와 아들6」에서는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 석자도 쓰지 못하는 아버지의 처지가 독자에게 측은한 생각을 들게 하지만 진실된 아버지의 모습에서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⑬ 「담요 한 장 속에」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말없이 교류되는 사랑과 존경, 신뢰 그리고 끈끈한 가족애가 드러난 작품이다.
⑭ 「돌아오는 길에」는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수작(秀作)이다. 마을 할아버지와 시적 화자인 ‘나’가 노중(路中)에서 전개된 간단한 대화가 대부분인데도 ‘나’의 겸손함과 웃어른에 대한 공경심, 남을 돕는 마음, 착하고 순수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으며, 또 10행 ‘그럼, 뉘 집에 사시는고?’에서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과 13행의 ‘허, 참. 정수 그 사람’에서 진심으로 고마워 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굳이 고맙다는 표현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마움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다. 시골 할아버지의 순박한 모습 그대로이다. 때묻지 않은 순박한 노인과 순수하고 깨끗한 소년간의 짤막한 대화! 두 사람이 작품 속에서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5. 웃어보기와 깨닫기
권영상의 작품 속에는 항상 해학과 익살이 숨어 있다. 해학은 개인, 사회의 부정적 현상이나 모순을 웃음으로써 비판, 조롱, 비난, 공격하는 풍자와는 달리 감미로운 미소를 유발시키고, 즐거움을 주며, 눈물을 없이는 웃지 않을 수 없는 웃음, 악의 없는 익살을 말한다. 해학은 소박하고 자연스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동시의 해학은 내용에 따라 과장된 행동이나 표정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무지 때문에, 서로 대조된 생각과 행동 때문에, 상황의 역전 때문에 동물들을 통한 우의 때문에 등 다양한 경우에 생긴다. 권영상의 작품들은 소박한 일상에서 발견되는 경이로움 속에서 건강한 해학성이 들어 있다.
⑮ 코딱지를 돌돌돌 말아서,/ 꼭꼭꼭 눌러서, 빈대떡처럼 꼭꼭꼭 눌러서, 그래선 강아지 밥그릇에 뚝뚝뚝 수제비처럼 뜯어 넣었어. 그랬더니 강아지가 밥을 먹다 말고 그러잖겠니./ 오늘은 밥이 짭짤한데. 왠지 간이 맞어.
-「강아지만 모르게」 전문(제12동시집)-
기타를 못치는 외삼촌은/ 라디오에서 기타 소리만 나오면/ 딩가딩가 기타치는 시늉을 한다./ 까닥까닥 어깨를 추어올리며/ 햇빛 몰아치는 해변으로 가자!/ 그러며 노래한다./ 한 손으로 기타 줄 잡고/ 또 한 손으론 연실 기타 줄 치는/ 시늉을 하며/ 햇빛 몰아치는 해변으로 가자, 그런다./ 엄마가 시끄럽다며 뛰어나와/ 얘, 기타 하나 사주랴! 그러면/ 외삼촌은 머쓱해 가지고/ 꾸부정히 들어간다, 제 방으로. -「외삼촌」 전문(제12동시집)-
상수리나무 타고 놀다가/ 바락바락 노래하다가 바락바락./ 것도 심심하면/ 뚜루루, 나무 아래로 뚜루루, 오줌을 눈다./ 칫칫칫칫, 상수리 잎에 떨어지는/ 칫칫칫칫, 오줌 소리에/ 상수리나무가 소스라친다./ 앗 뜨거! 앗 뜨거!/ 것도 모르고 상수리나무 그늘에/ 한숨 자러 온 할배 염소./ 할배 염소 잔등에 픽픽픽,/ 오줌 줄기 픽픽픽 떨어지자/ 할배 염소 삐그덕, 고개를 치켜든다./ 이눔 봤나! 감히 할애비 등판에다!/ 할배 염소가 상수리나무를 들이받는다./ 이거 집에 가기 다 글렀구마.
-「심심하면」전문(제12동시집)-
호박 밭에/ 호박이 큰다./ 자꾸 자꾸 자꾸……// -정말/ 비좁아 못살겠네!// 생쥐가/ 이부자릴 싸들고/ 또 집을 옮긴다.
-「호박 밭의 생쥐」 전문(제12동시집)-
⑮ 「강아지만 모르게」는 전형적인 ‘시치미 떼기’의 형태로 홍소나 포복절도하며 웃는 가가대소, 박장대소와 같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웃음이라고 한다면 「외삼촌」은 과장 행동으로, 허점을 찔러서 악의 없는 웃음을 안겨 주고, 「심심하면」은 처지나 상황의 역전으로 일어난 일 때문에 배꼽잡고 웃을 수 있고, 「호박 밭의 생쥐」는 우의와 어리석음 때문에 잔잔한 미소를 던져 준다.
⑮ 「강아지만 모르게」의 시적 화자는 어린 소년이라고 할 수 있다. 코딱지를 ‘돌돌돌’ 마는 것부터 개구쟁이 짓이다. 수제비처럼 ‘뚝뚝뚝’ 뜯어 강아지 밥에 넣어 준 것이다. ‘왠지 간이 맞어’라는 마지막 강아지 말로써 개구쟁이가 노리는 핵심적인 목적이 완벽하게 달성되었다는 성취감으로 앙천대소하는 것이다. . 시적 화자와 독자 관객은 제3자인 강아지를 보고 웃는 것이다.
「외삼촌」에서는 처음부터 기타를 치지 못하는 외삼촌이 노래를 부르며 기타치는 과장된 행동을 보이다가 어머니의 말 한 마디에 상황이 역전되고 만다. 기타치는 것을 과장되게 흉내내는 모습도 우습지만 어머니 말씀에 기가 죽어 제방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우스꽝스럽다.
「심심하면」에서는 상수리 나무 가지 위에서 오줌을 내갈기며 놀다가 일어난 일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어린 시절 사내아이들에게는 한번쯤 있음직한 사건이 아닐까 하는데 이 작품의 해학성은 세 가지에 있다고 할 것이다. 첫째는 재미있는 의성어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오줌 싸는 소리 ‘뚜루루’, 상수리 나뭇잎에 오줌 떨어지는 소리 ‘칫칫칫칫’, 할배 염소 등에 오줌 떨어지는 소리 ‘픽픽픽’, 그리고 할배 염소가 고개 쳐드는 소리 ‘삐그덕’ 이 소리들이 작품의 해학성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 의성어를 소리내어 읽으면서 평자도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웃음에 실실 나온다. 둘째는 ‘염소 할배’의 등장이다. 염소가 등장함으로 인해 평면적 구조가 입체적으로 바뀌었다. 더욱 염소는 아이의 할아버지 같은 ‘할배’가 아닌가. 독자들은 손자 아이가 나무 위에서 ‘할배’ 등에 오줌을 내갈기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또 얼마나 전율할 것인가. 셋째는 작품의 마지막 시행에 ‘이거 집에 가기 다 글렀구마’를 배치한 점이다. 이 말투에 배어있는 사내아이의 낭패감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 일그러진 사내아이의 표정이 이 마지막 행을 읽는 독자의 얼굴을 가격하는 웃음의 펀치가 아니겠는가!
「호박 밭의 생쥐」에서는 하필 커져가는 호박 밑에 집을 만들어 사는 생쥐의 어리석음에 웃음 항아리에 빠지고 만다. 또 생쥐에게 무슨 이부자리가 있겠느냐마는 그 은밀한 이부자리를 들고 가는 가장 원초적인 이사 형태에서 생쥐의 다급함도 느끼면서 웃을 수 있는 것이다.
6. 마무리
동시 「골목길 걷는 게 나는 참 좋지」에서처럼 권영상 시인은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다. 그의 많은 동시를 읽어보면 따스한 동화를 낭송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동시 「골목길 걷는 게 나는 참 좋지」도 평범한 이웃들의 저녁 이야기들이 동화처럼 펼쳐져 있다. 가난하지만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으며, 따뜻한 식탁의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물씬 풍긴다.
장만영의 「정동 골목」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얼마나 우쭐대며 다녔었나,/ 이 골목 정동 길을./ 해어진 교복을 입었지만/ 배움만이 나에겐 자랑이었다.// 도서관 한 구석 침침한 속에서/ 온 종일 글을 읽다/ 돌아오는 황혼이면/ 무수한 피아노 소리,/ 피아노 소리 분수와 같이 눈부시더라.’로 시작되는 서울 정동 골목길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데, 도서관에서 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적인 정을 표현하고 있다. 「골목길 걷는 게 나는 참 좋지」에서도 장만영의 중산층이 사는 골목길보다는 권영상의 서민층의 사는 골목길이 더 따스하고 인간적이다.
해가 까물 진 뒤의 골목길/ 그 촉촉한 골목길 걷는 게 나는 참 좋지./ 노을에 빨갛게 물든 기와 지붕이,/ 옥상 위에서 장을 익히는 장 단지들이,/ 담장 위에 나란히 키우는 화분들이,/ 저녁 어둠에 천천히 묻혀 갈 때/ 그때가 골목 걷기에 참 좋지./ 슬렁슬렁 집으로 돌아오는 강아지./ 강아지를 위해 얼른 길 비켜주고,/ 자전거를 몰고 돌아오는 아저씨,/ 아저씨를 위해 얼른 길 비켜주고./ 그 때, 뉘 집인가 담장 너머에서 날아오는 소리/ -엄마, 찬장 속 고구마 먹어도 돼!/ 그런 낯익은 목소리가 나는 참 좋지./ 딸깍, 켜지는 담장 낮은 집의 안방 저녁 불/ 그 아래에 둘러앉아/ 밥 먹자. 그러는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가/ 나는 더없이 좋지.
-「골목길 걷는 게 나는 참 좋지」 전문(제12동시집)-
이처럼 그의 작품은 대체로 서정적이고 따뜻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 경향을 한 가지로 규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는 내용이나 형식에서 일정한 것을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론 부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2기의 내면적 자아를 탐색했던 작품 외에 낯설게 하기, 해학과 익살 등으로 웃어주기, 아버지 생각하기 등 다양한 형식과 내용에서 여타 동시인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많이 쓰고 있다.
비록 이 평론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삼국유사 속에 살아있는 ‘역사를 이끌어 가는 또다른 주체들의 질박한 이야기’ 제3동시집 ?동트는 하늘?도 그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듯이 동시집마다 형식과 내용에서 다양한 무지갯빛을 마술사가 되어 보여 주고 있다. 정말 그를 어린이들의 유토피아를 찾는 마술사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광고 문구에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것이 있다. 이 광고 문구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여자는 항상 아름답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듯 하다. 이 문구에다 권영상 시인을 대입해서 ‘권영상 시인의 변신은 무죄’라 하면 그에 딱 알맞은 표현이라고 할 것 같다. 아니 그는 더 강렬하게 ‘권영상의 변신은 필수’라고 자신을 정의해 달라고 할지 모른다.
끝으로 동시 ⑪「할머니 무릎 베고 스르르」와 같은 어린이들의 유토피아를 찾는 마술사 권영상, 생명력을 지닌 작품을 쓰기 위해 무수한 문학적 변신은 필수 과정으로 여기는 카멜레온 권영상이 되기를 기원한다.
※ 참고 논문
○ 노경수(2004), 「서정시에서 서사시 관념시 그리고 동심」,《흙빛문학》40호(여름호)
○ 황정현(2001), 「권영상론」, 『한국현대아동문학작가작품론Ⅱ』, 이재철고희기념논총, 청동거울
○ 최창숙(2007), 「문학에 놓인 징검다리, 권영상」, 한국아동문학학회 정기세미나 자료(2007.4.21.)
-어린이들의 유토피아를 찾는 마술사(이정석, 시와 동화 45호,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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