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권영상론 -최창숙

권영상 2017. 11. 18. 10:43



문학에 놓인 징검다리, 권영상

최창숙 (동화작가, 아동문학평론가, 문학박사, 필명 최정원)


--이 논문은 2007년 <한국아동문학학회지>에 수록되었고, 그해 4월 28일 서울교육대학교 인문관에서 세미나 주제로 발표되었다.


1. 신산한 삶의 승화, 아동문학.



작가와 그의 삶은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자신의 삶의 궤적과 가치관을 작품 속에 여과 없이 노출시키는 작가이건, 삶이 준 경험을 다른 형태로 승화시키는 작가이건 한 작가가 살아낸 삶은 분명 작품이 뿌리 내린 토양이라고 할 수 있다. 권영상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그가 살아온 녹록치 않은 삶은 열쇠로서의 역할을 한다. 특기할만한 것은 그가 추구하고 실험하고자 하는 바는 이제까지 토속적(?)인 삶을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펼친 작가군이 흔히 보이는 작품들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향토를 원천으로 호흡하는 나무로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그 뿌리를 기반으로 도시에서 그늘을 만들고자 하는 억센 거목이 되기를 추구한다고나 할까. 이런 의미에서 그는 굳이 나누자면 언급한 작가군 중 후자에 속한다고 하겠다.



논자는 여기서 그의 작품을 동시론과 동화론으로 구분하여 논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러두고자 한다. 그는 동시인, 동화작가라고 구분되기보다는 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하여 독자와 소통하고자 추구했던 작가로서 그의 가치관과 창작의도를 때로는 동시라는 도구를 통해 또 때로는 동화라는 도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까닭이다. 본인이 동시인이라고 보는가, 동화작가라고 보는가에 대한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동화를 쓰거나 동시를 쓰거나 작가란 자신의 정신세계를 독자에게 전해주는 도구로서 어떤 것이 가장 적합할까를 생각하고 그에 따라 창작을 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동시인이라거나 동화작가라고 잘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동시인으로서 많이 알려졌으며 그것이 자연스럽다. 아직 동화라는 장르는 써온 연륜이 그리 길다고 볼 수 없으므로 지금도 신인같은 자세로 열심히 쓸 뿐’이다. 저자와의 대담과 그의 작품집 정독을 통해 논자는 그의 창작관 내지는 문학관을 “징검다리론”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즉 작가는 문학이라는 세계로 독자, 특히 어린이들을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권영상의 지론(持論)이다.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외진 곳으로도 쉽게 건너갈 수 있도록 놓인 소박한 도구, 징검다리. 大橋 建設이라는 역사(役事)를 일으키기 위해 시간과 땀과 비용을 들이는 동안 양안(兩岸)에서는 서로 교통하지 못하는 이웃들이 고통을 당하듯이 아동문학 작가들이 어린이들에게 평생 남을 교훈을 주려고 시도하는 동안 아이들은 문학이라는 기슭에 이르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마음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과 필요한 그 순간에 바로 소통하고자 했던 작가이기에 논자는 이 소론을 읽는 독자들이 권영상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에 가교(架橋)라는 어색하고 번듯한 단어가 아니라 정겨운 토속어, 징검다리라는 이미지의 연상작용을 일으켜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동시작가와 동화작가로서의 길을 동시에 걸음으로써 이 작가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이런 역할을 자처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현재 생존해 있는 작가의 전기적인 자료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논자는 저자의 작품연보 및 저자를 통해 얻은 자료만으로는 부족하여 2시간 여 동안 그의 삶의 궤적 및 창작관에 대해 대담을 함으로써 그 녹취내용을 자료로 삼았음을 밝혀둔다. 


2. 권영상의 삶과 결부된 창작 경향 혹은 시기구분

권영상은 1952년 음력 3.1일 강릉의 초당에서 3남 3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한창 부모의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 아직도 응석받이로서 귀여움을 받아야 할 나이에 어머니는 10여년 간의 투병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농사일을 도우며 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된다. 또래들이 부모의 돈으로 학교에 다니고 응석받이로 행복하게 성장기를 지내는 동안 그는 바다가 보이는 들판에서 소를 먹여야 했다.

그는 막연히 누군가 그 생활에 버팀목이 되거나 구원해 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소년 시절을 보낸다. 여기서 구원해주는 사람이란 개인 권영상에게 경제적 도움을 준다거나 출세를 시켜줄 수 있는 인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작가 개인에 국한되지만은 않은, 소외된 계층,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희망을 주는 초인적인 어떤 존재와의 조우를 갈망했다는 뜻이다.

후에 논하겠지만 이 시기의 갈망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형상화된다. 이 시기를 극복하고 그는 강릉상업고등학교를 거쳐 1975년 강릉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게 된다. 그 해 다시 관동대학교 국어교육과에 편입학하여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시작했으며 1986년 3월에는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1987년, 『윤동주 시의 원형적 탐구』라는 논문이 통과됨으로써 성균관 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가 서울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1980년대는 우리 사회 역시 시대적 아픔을 지닌 폭압기였으며 민주화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었던 때이다. 이 때 배문중학교에 부임하게 된 권영상은 그런 시대와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그의 근무지 역시 빈곤한 도시소외계층을 품고 있던 곳이다. 소외계층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는 이 시기에 과연 아동문학이 현실과 동떨어져 자연과 동심을 노래하는 데 그쳐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소외받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동시로 쓸 수 있는 방법은 소외받은 소재를 가지고 시를 쓰는 방법밖에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 시기 저자의 글쓰는 경향은 동시집 ’밥풀‘에 나타난다. 그 후 그는 다시 한 번 변화를 겪게 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 그는 독자들이 동시를 외면하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결과 동시가 어린이들의 진짜 삶과 동떨어진 채, 이슬, 바람 같은 자연적 소재만을 다루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권영상 : 바람이니 별이니 이슬이니, 이런 것들은 사실 그렇게 썩 (아이들에게)관심있는 소재가 아니란 말야, … 순수성을 주제로다가 드러내야지 그런 소재로다가 자꾸 심어줘선 안되잖아, 그죠? 그 인식을 바꿔보자, 우선 연과 행이 없는 시를 만들어보자, 이 기본 고정관념을 바꾸자 그거죠. 이 고정관념을 바꾸려면, 시인의 고정관념을 바꿔보자. 그러려면 우선 재미있어야 된다, 뒤집기를 해야 된다…,


최창숙 : 그러니까 연과 행이 없고…
권영상 : 그 다음에, 우선 시 속에 유머가 들어가 있고…,
최창숙 : 유머가 포함되어 있고…,
권영상 : 비판정신이라든가 뒤집기를. 뒤집기 같은 걸 해야 해. 극적 반전(이라고나 할까)? 그런 반전 같은 것들을 집어넣어 가지고 짧은 시 속에서도 좀, 어떤 서사성도 가지면서 서사성이 가지고 있는 반전의 재미, 이런 것들을 찾아내 보자, 그래서 어떻게든지 아이들 쪽으로 가고, 아이들이 한 번 읽고 재미있다 하고 그 다음엔 버려도 좋아. 서가에 꽂혀 가지고 몇 십 년 그 자리를 지키는 그런 책을 난 원하지 않아요. 그런 동시도 필요하지만 일회용 동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일회용 종이컵 먹고 버리잖아요? 그러나 그 종이컵이 아무런 역할을 못하는 것 같지만 이쪽 자판기에서 내 입으로까지 날라주는 소중한 역할(논자가 말한 전달자로서의 역할, 징검다리로서의 역할이다.)을 해요. 그 컵이 없으면 못 먹잖아? 그러니까 동시도 일회용 같은 걸 가져야 된다, 시가 꼭 그렇게 근엄해야 되냐 그거야. 시가 근엄할 필요는 없다, … 시는 소박하면서도 재미있으면 그뿐이다. … 버리면 또 다른 애가 그걸 집고 또 읽을 거다 말이야.”
(2007년 4월 2일(맞죠, 선생님?) 배문중학교에서 작가 권영상과의 대담 녹취록
대담자 : 권영상, 최창숙)


이 대담 내용 중에 권영상의 창작에 대한 최근의 가치관이 함축되어 있다. 그는 ’읽히는 동시‘를 쓰고자 시도한다. 『월화수목금토일별요일』이나 『신발코 속에는 생쥐가 산다』 『실 끝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지』 같은 시집은 이런 가치관을 반영하여 탄생된 작품집들이다.



요약하자면 권영상의 창작경향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질곡을 반영하듯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 단계는 자연과 동심을 노래한 시대이며 1987 년 서울에 올라오기 전까지 강릉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쓴 작품들, 즉 첫 동시집 <단풍을 몰고 온 바람>(창조의 샘)에서 <햇살에서 나오는 아이들>(아동문예), <한해를 살면>(대교문화), <벙어리 장갑>(계몽사)까지가 여기에 속한다.

둘째 단계는 소외계층의 현실을 담아내고자 한 시대인데 1987년부터 1997년까지 지속된다. 작품집으로는 <납작납작한 코끼리><상서각), <버려진 땅의 가시나무>( 남광출판사 ), <밥풀>(동화문학사 ), <아흔아홉 개의 꿈>(미리내)을 발간하기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들 작품집에는 서울에 온 후 군부폭압의 정치현실에 눈 뜨기 시작하면서, 문학이 현실을 탐구하는 한 방편이라고 생각한 작가가 현실참여를 시도하며 쓴 시들을 싣고 있다.

셋째 단계는 이야기 동시집을 내기 시작하는 1999년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를 논자는 징검다리로서의 작가 시대로 명명하고자 한다. <월화수목금토일별요일>(재미마주),<신발코 속에는 새앙쥐가 산다>(문원), <실끝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나>(국민서관) 등이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동시집들이다. 이 시기는, 삶의 체험과 교훈을 독자에게 전하고 문학의 세계로 독자를 이끄는 도구, 즉 징검다리로서의 작가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지금 이 시기는 여러 가지 집필상의 시도(실험)의 과정이라고 보면 좋겠다.


다음 장에서 권영상의 작품을 시대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시가 곤충의 성장곡선처럼 급격하게 계단식으로 변화한 데 반해 동화는 포유동물의 그것처럼 변화는 있으나 연속적이다. 1993년 MBC 동화대상 단편부문 당선자가 된 이후 쓴 동화들 속에는 초기 시 속의 자연사랑과 초인을 기다리는 갈망, 현실에서 소외된 작은 것들의 아픔이 입체적으로 모두 다 녹아 있다. 이 사실은 권영상이 동시인으로서 가지는 성향과 동화작가로서 가지는 성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기보다 서사문학과 운문문학이 가지는 특성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라는 것이 논자의 생각이다.


3. 권영상의 작품세계

① 자연과 동심을 노래한 시대

그가 월간 <아동문예>에 3회 추천 완료되면서 등단한 1979년부터 30년 가까이 지속되어 온 작품활동 기간 중에 비교적 짧은 첫 시기는 권영상의 서정시인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권영상의 서정성이 돋보이는 작품들, 대부분의 동시인들이 추구해 왔던 투명하고 서정성이 짙은 작품들은 대부분 이 때에 쓰여졌다. 1985년에 간행된 <햇살에서 나오는 아이들> 서문에서 유경환이 “우리들의 삶과 그 삶의 주변에서 아름다움만 골라, 그것을 고운 서정으로 다독이는 놀라운 솜씨를 지닌” 시인이라고 격찬하며 인용한 “꽃씨를 따라 간 햇살”은 그의 서정시인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주는 특별한 작품이며 권영상을 논하는 자들이 반드시 인용하는 시이기도 하다.

《아기가/꽃씨를/심을 때,//햇살도/몇 조각/따라 묻혔다…》

그의 재능은 이 시집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4월의 하늘”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보리가 패거든/우리/하늘을 보러 보리밭 둑길로 나가자./…문득 쳐다본 거기에/새파랗게 깨어진 4월의 하늘을 보러/》

보리의 파릇하고 신선한 이미지와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자라는 정직함이 맑고 푸르고 한없이 너른 봄하늘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언어로 그리는 한 폭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다. 푸름과 푸름의 연속을 막는 솜사탕 같은 흰 구름 몇 가닥. 그것으로 인해 더욱 하늘의 새파람이 도드라지는 조어의 기술을 통해서 말이다. 투명한 것들은 깨질 듯 조심스럽고 더럽혀질까 두려운 탓에 순결의 상징인 흰 빛 구름조차도 금간 듯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이 감각적인 시어는 단지 시상을 이미지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식민지 농군이 피 흘리며 가꾼 ‘가르마 같은 보리밭길’이나 보릿고개에 주린 배를 채우려 욕심껏 심어놓은 구한말 보리이삭이 연상되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국민들에게 있어 4월은 자살률 높은 선진국 국민이 풍요함 속에서 외치는 “잔인한 달”과는 정서적으로 대점(代點)에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있어 4월은 독재자들이 총칼로 배고프고 억압된 민중을 향해 총을 쏘아 그 가슴을 깨지게 만든 달이며 푸른 하늘 때문에 선연한 핏자국이 더욱 선명한 달인 것이다.

시인이 이 당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글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어는 훗날 그의 현실참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실마리가 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 시기에 쓰여진 그의 시는 시상, 시어의 투명함과 짙은 서정성을 유지한다.


《봄이면/종달새들이//초록/보릿잎을 물어올려/봄하늘을/쓰윽―./보리밭으로 만들더라.…때로는/갓깨어난 아지랑이까지/물어날라//가물가물/그만/어지럼증을 나게 하더라.》-“종달새” 中에서.
《실달이 뜨는 이 한낮/낮별들은/저녁맞이 초롱불을/만들고 있을 게다.》- “낮별들” - 中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서정성이라는 주머니에 들어간 이 시어들은 사실 그의 현실참여를 싹틔우는 씨앗들이다. 그의 시를 찬찬히 살펴보면 풀 하나도 별하나도 그냥 피고 뜨는 법이 없고 누군가를 위해 존재의미를 준비하고 있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들,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시인이 부여한 특별한 존재의미. 이들 선하고 힘없는 존재들이 후에 억센 어깨로 그들을 보듬어주고 막아줄 초인을 기다리게 한다. 그리고 이 시집에서는 그 초인의 초기 이미지로 온달이 나타나고 있다. 그가 그리는 특별한 의미의 초인 이미지가.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삶의 가치에 대한 깨달음은 교훈이라는 이름으로 정제되어 입에서 나가는 순간 잔소리가 된다. 그래서 상징으로 가득 찬 시는 비교적 이런 교훈의 위험에서 동화보다는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의 발문에서 김원기가 지적했듯이 작가들은 때로 “정말 우리에게 동시는 소중한가?”, “동시는 우리에게 왜 소중한가?”와 같은 의문을 문득 가지게 된다.

권영상에게 있어서도 이런 의문들은 다음 시기로 전환시키는 화두가 되었으리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논자와 관점은 다르지만 이런 의문을 제기한 김원기는 권영상의 속내를 갈파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권영상에게 있어 이 아름다운 시어들과 동심을 일깨우는 소재들은 상투적인 시 쓰는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잃어보았기에 그 소중함을 아는 이의 진솔한 독백인 것이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그가 노래한 작은 것들은 수십 년 동안 같은 소재로 쓰여진 작품들 사이에서 낭중지추(囊中之錐)로서 떠오르는 것이다. 작가가 서울로 거처를 옮기면서 위에 언급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 시인에 의해서 강릉시절은 막을 내린다.



② 현실참여 시대 - 소외계층의 현실 작품화 시절

한정된 지면에서 논해야 하므로 이 시기에 나온 시집 중에서 작가의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시 몇 편만을 인용하기로 한다. 위에서 언급한 초인, 그 ‘누군가’는 권영상의 서사동시집인 『동트는 하늘』에서는 역사 속 위인의 이름을 빌어 나타난다 . 이 시집은 첫째 시기에서 둘째시기로 넘어가는 전환기, 과도기 작품들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는 환웅, 이사부나 원효,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같은 삼국유사 속 인물들을 통해 우리 역사를, 그리고 그 어려운 역사 속에서 민중과 함께 한 그들의 애환을 노래한다. 이런 인물들이 보듬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는 동시집 『버려진 땅의 가시나무』 에 이르러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작고 힘없지만 소중하게 지켜야 할 것들. 권영상은 머리말에서 후에 자판기 종이컵에 비유한 자신의 창작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 시집 안엔 내 마음 안에서 언제나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눌리어만 살던 말들이 세상에 대한 나의 안타까운 마음들과 함께 들려나와 있다. … 어리숙한 듯하면서도 느리게 천천히 마음 깊은 데로 스며들어 가는 시들을 쓰고 싶었다.》

세상이 보잘것없이 여기나 그 존재가치를 시인이 이 시집을 통해 가르쳐 준 것들을 열거해 본다. 단추구멍[늘 단추 뒤에 가리어만 살아/부끄럼을 잘 타는 단추 구멍.//그 빈 단추 구멍 하나가/아무일 없이 다니던 이 길을/이토록 부끄럽게 할 줄이야.], 고목 뒤에 숨겨진 “잃어버렸던 햇살”, “하늘”, “이웃”[고목을 자른 날], 작은 발자국[“만남” 중에서:고개를 들면/하늘이 저렇게 맑아도/ 얼뵈지 않던/내 얼굴을//누구인가 두고 간/이 작은 발자국 안에서 만나다.], 신발[언제나/발 밑에 밟히며 살아도/…산다/꼭꼭 밟히면서도/마주 보는/기쁨이 있어.], 마침표[혼자 있을 때는/작고 외로운/섬이지만/…너의 말을/반듯하게 맺어준다.], 버려진 땅의 가시나무, 그리고 바보라고 불리다 바보같이 적의 화살에, 혹은 적을 가장한 정적의 화살에 죽은 바보 장군 온달. 이 세상에서 상처받은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마침표가 되고 싶다. 그 희망으로 버거운 삶을 버텨낸다.

한 사람을 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듯이 작가도 시대구분으로 전반적인 작품을 깨끗이 동강낼 수는 없는 법이다. 이 시집에는 아직은 “아카시아”같은 서정성이 짙은 작품들이 혼재해 있다. [아카시아:…밤이면 달빛처럼//하얗게 밀려 내리는/아카시아 향기.…가만가만 그 길을 걸어 와/옷을 벗으면….] 그러나 동시집 『밥풀』은 현실참여적인 특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집이다. 발에 밟혀 사라질 위험을 무릅쓰고서 먹힐 것을 거부하고 밥그릇을 뛰쳐나온 밥풀이 여기 실린 모든 소재와 주제를 아우른다고 하겠다. [밥풀: 밥상을 들고 나간 자리에/밥풀 하나가 오도마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밟히면 그 순간 으깨어지고 마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도 없이….] 소외계층이 살아내야 하는 삶의 신산함을 시인은 이렇게 토로한다.

《…나는 어쩌다/외로운 들길을 걸어야/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그런 농부의 아들이 되었을까.…하필이면/멀고도 고된 들길 끝/그런 집에서 살게 되는 걸까.》[출전]

이런 서러움은 세상을 바꿔보고자 하는 행동으로 전환된다. “들풀은 들불이 되기 위해[시 제목]… 봄부터 바람과 함께 큰다.” 그렇게 커서 작은 것들도 자기의 목소리를 내게 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다. 시인이 현실참여를 하게 된 이유이다. “고무줄”에 나타난 작고 힘없는 것들의 분노와 아픔[고무줄:…아무리 작은 도막이라도/당기면 화를 낸다.…]을 대변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이 파장을 “새”에서 경고한다.[새는 날아올라 하늘 속에 뛰어들었다./…새 한 마리가 흔드는/가을 하늘이/철철철 물소리를 낸다.] 밟히는 것들은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으나[페달: 은빛 반짝이는/바퀴살이/강길을 달릴 수 있는 것은/발밑에서 짓밟히는/페달의 아픔이 있기 때문….]


강한 자들, 페달을 밟아 자전거를 돌리는 이들은 페달의 힘을 모르고 자신이 힘이 있어 그런 줄 알고 살아간다. 시인은 시를 통해 이를 알리고자 한다. 시인은 노래할 뿐 이들을 지킬 수는 없다. 그래서 시인은 “민주화의 맨 뒤에 섰지만… 민주주의의 진화를 위해…[대담 녹취록 중에서 인용]” 우회적 글쓰기에 몰두한다. 시인은 바람 같은 존재이다.[바람의 무게: 마른 잎을 굴리며 가던 바람이/슬그머니/저울 위에 선다./…힘센/바람에게/무게가 없다.] 작은 것들을 지킬 수는 없으나 그들의 마음과 그것들을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자들의 마음에 들풀을 들불로 지필 수는 있다. 비록 스스로 굴러가는 척, 힘 있는 척 하지만 보이지 않는, 무게도 없는 공기들의 밀어올림이 없다면 어떻게 낙엽이 그리고 연이 굴러가고 높이 떠오를 수 있을까.

이 작은 공기들을 한 방향으로 밀어주는 바람의 역할이 바로 시인의 역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권영상은 동시집 <아흔아홉 개의 꿈>을 끝으로 보이지 않으나 불을 지피는, 바람과 같이 자신의 무게는 없지만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여주는 작품 쓰기를 시도한다.

③ 징검다리로서의 작가 시대

이 시기는 대담에서 스스로 밝힌 대로, 커피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일회용 종이컵이 되어도 좋다는 각오로 창작을 하게 되는 시기이다. 그는 자판기라는, 내용물이 가득한 기계가 고철덩어리로 남지 않게 해주는 아주 작으나 꼭 필요한 일회용 종이컵, 자신을 짓밟더라도 독자들이 문학이라는 정신세계에 가 닿을 수 있도록 물 위에 놓인 징검다리로서의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시행착오가 있게 마련이다. 그가 이 새로운 시쓰기를 통해 추구한 것들이 모두 완성도를 이룬 수작(秀作)일 수는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직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형식과 뒤집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이것이 가벼운 글쓰기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그의 시집은 살아 움직이는 새로움으로 가득하다. 이 시기에 쓰여진 그의 시를 읽을 때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상의 단면,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 그가 이야기꾼으로서, 사물과 고정관념 뒤집기, 아프지 않게 때려 경직된 사고 풀기에 성공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어린이들, 아직 자신의 세계가 단단하게 여물지 못해 상처받기 어려운 이 친구들을 위해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교육의 혜택을 더 많이 받은 아이건 덜 받은 아이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작가의 상상을 들려준다. 작가는 어린시절 작고 못나 놀림대상이 되었던 오리라는 아이를 기억하고 그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시를 써 나갔다. 《…오리가…벼 메뚜기를 잡던 병을 아저씨한테로 홱, 던졌습니다.… “너는 닭에게 주려고 메뚜기를 잡지만 나는 내 동생 먹이려고 잡는단 말야!” 비록 그 때 아저씨의 나이가 적기는 했지만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자의 머릿말이 감동적이다. 오리에 대한 이 부채의식은 후에 어린이에 대한 사랑, 특히 소외된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승화된다.


성인들도 때로는 자신의 잘못으로 빚어진 현실을 부인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사고는 어린이들에게는 더 자주 나타나는데 권영상의 동시인으로서의 혜안은 이런 심리를 재미있고도 예리하게 이야기 시로 풀어낸다.

“체중계에 올라설 때마다 몸무게가/한 눈금씩 커 가는 거야./너라도 괴롭겠지? 나도 괴로워./어쩌면 내가 체중계에 올라설 때 눈금만한 녀석이 숨어있다가 몰래 따라 오르는 게 아닐까.”[월화수목금토일별요일 : “눈금만한 녀석” 中에서 ]

서울이 만든 비정상적인 동네, 강남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 속성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경제적 가치로 과대평가되어 왔지만 인간이 쾌적하게 살아가야 할 조건을 기준으로 하나하나 평가해 본다면 결코 정상적인 곳은 아니다. 대낮에는 한 블럭을 가는 데도 수십 분을 낭비해야할 정도로 교통체증이 일상화되어 있으며 맑은 공기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종일 사람이 북적이고 소음이 멎지 않는다. 그 동네의 경제적 가치를 따질 때 아무도 고려하려고 들지 않는 강남의 괴물같은 본성을 시인은 뒤집기로써 드러낸다. 피해의식과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구호로서가 아니라 작가의 해학으로써다. 그는 높은 빌딩을 짓는 도구를 해체해 등뼈를 만들고 거기에 틀니랑 일상의 도구를 섞어 넣어 부자들이 사는 동네 빌딩 숲을 흔들어보는 상상을 제의한다.

“공룡을 만들어 보자구. 우선은 까맣게 치솟은/아파트 크레인을 뽑아 공룡의 등뼈를 만들자.…그리곤 이랴! 낄낄! 엉덩이를 치면 꿍꿍꿍/압구정동 빌딩 숲을 마구 걸어갈 테지. 어떠니?/공룡 한 번 만들어 보잖을래.”[월화수목금토일별요일:“공룡을 만들어 보자구” 中에서]


④ 세 시기를 꿰는 맥, 동화 - 착하고 우직한 초인을 기다리며

동화라고 소제목을 붙였지만 사실 논자가 말하려는 것은 이야기꾼으로서 권영상이 표현하고자 했던 서사를 장르 구분없이 일컬은 말이다. 그의 서사시나 연과행이 없는 시, 혹은 서사적 내용을 담고 있는 동시, 어디에서나 그가 전달하고픈 초인의 이미지는 늘 잠재해 있다. 구체적으로 몇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면 그가 밟아온, 짧지 않은 작품 활동 기간 동안 그린 초인의 밑그림이 드러날 것이다.

온달과 온달과 온달

첫 번째 시기의 온달

권영상에게 있어 온달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왜 온달인가. 그가 추구해 온 인물상, 즉 초인의 흔적으로 온달을 주저 없이 꼽을 수 있는 것은 작가 권영상이 시재(詩材)로 온달을 편애했기 때문이다. 초기 시집 『햇살에서 나오는 아이들』에도 온달은 7번이나 시제로 채택되었다.

그렇다면 순수한 마음으로 작가의 세계로 뛰어든 권영상이 작품활동 초기에 흠모했던 온달이 그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 시집에서만으로도 추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권영상의 편애는 이런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온달은 “업신여김을 당하여도/들녘 잡풀처럼 암말없이 착한 마음만으로 살았”[『햇살에서 나오는 아이들』 중 “온달님․1”]다. 그는 “배가 고파 느릅순을 삶아먹을망정/허허허허 웃으며”[같은 시]살았다. 그는 영화(榮華)를 탐할 줄 모르는 사내다. 그래서 공주의 청혼에 “나는 싫어라우”[같은 시]하며 거절하다가 결국 첫날밤에 새 신부 족두리도 벗기지 못하고 “달빛에 어울리어 졸고”[온달님․2]있는 그런 사내다.


남들은 쉽게 작은 것들을 알아버리고 또 눈에 띄는 도움이 되지 않는 별, 들꽃, 산다람쥐 이런 것들을 “자랑스러이 잊어”[온달님․3] 갈 때 온달은 “느리잇느리잇 하염없이/ 불러보고도, 미련스리 또 잊어버리고,/잊어버리고도 다시금 또 불러보고 싶어”[온달님․3] 미련스레 자꾸 잊어도 또 외는 우직한 사내다.

그래서 꽉 찬 작은 그릇인 영악한 무리들, 또 우리들은 쉬 그를 “털곰, 임금님, 장군”이라고 부르지만 그는 자신을 “바보”라고 불러주면 좋아한다. 왜 그는 바보로 불리기를 원한 것일까. 그 답은 동화가 말해준다. “온달님․5”의 묘사는 이미 시에서는 권영상이 작품활동의 변화를 두 번이나 겪은 시기에 쓰여진 동화들에 나타난 ‘큰곰’이나 ‘털곰’에 대한 묘사로 훗날 그대로 되살아난다. 뒤에 인용할 인물 ‘털곰’에 대한 묘사를 다음의 발췌문과 비교해 보기 바란다.

“그는 연한 풀꽃 숲을 딩굴기도 하고,/ …무지개를 쫓아다니거나 /하다가도 어디론가 불쑥 사라져 다신 그를/ 만날 수가 없게 되지요./…그렇게 하다가도…/그는 꽃칠갑머리로 나타나 우리에게 /꽃인사를 나누어주지요.”[온달님․5]

“어느해 섣달 풍랑에/…쪽배가 뒤집혀/어부들이 얼음바다에서 허우적대던 일이/있었지요./ … 그렇게끔 성난 바다가 깨어지고 있을 때/누군가 옷을 벗고 허리에 동아줄을 묶는/이가 있었지요./그리고는 겨울 파도 속으로 달려드는 이가 있었지요.[온달님․6]

그러나 사람들은 이 초인을 귀한 줄 모르고 하늘이 대가없이 내려주는 물인 양 마구 흘려 소모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이 시대에 초인은 자취를 감춘다. 바보처럼 베풀기만 하는 초인 온달을 사람들이 박해하는 양을 살피자면 “재채기만 해도/고이헌 감기, 온달놈한테로 가거라!/…귀신 묻은 인형을 봐도/에이 더러운 것, 온달놈한테로 가거라!”라면서 일상적으로 짓밟는 것이다.



두 번째 시기의 온달

이 시기의 온달은 성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는 “달이지면 달지는 곳으로 바람이 가듯가듯… /들풀 우거진 길을 다시 밟아”[버려진 땅의 가시나무 “온달님1”] 우리에게 와서는 “낮달처럼 오련한 웃음을 건네주고”도 “웃음값은커녕, 등 뒤에서조차 오련한 웃음을 더 주”고[같은 시] 간다. 보잘것없는 자 온달만큼이나 지속되는 소재가 있다. 그것은 하루살이의 삶이다. 그의 전 시기를 거쳐 하루살이의 삶을 돌아보는 동시는 어느 시집에서나 발견된다. 어린 독자들을 위해, 작고 힘없는 것들에 대한 배려를 시인은 하루살이의 삶을 이해시키는 데서 시작한다.


들의 서러움을 그들에게 밟히면서 풀어주는 것이다. 그가 구한 이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나 여자를 구할 수 없는 가난하고 비천한 것들의 욕정을 풀어주는 창녀의 모습으로 왔다가 몸을 바치고 땅에 버려져 다시 하늘로 돌아간 어느 보살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는 “문살마다 하얗게 언 새벽.”[버려진 땅의 가시나무 : “온달님2”]

길을 성큼성큼 걸어 “버들개지 한 가질”[같은 시] “ 귓등에 꽂고” 봄소식을 전하면서 가는 선각자이다. 그는 자기 소유의 집 하나를 마련해 놓지 않고 이 산하에 스며들어 떠도는 지킴이이다. 버려진 땅의 가시나무, 온달님 5 : “바람이 허릴 굽혀 불어오면/ 어어둥둥 바람처럼 허릴 굽히고,/ 바람이 소리내어 울고 오면 /어어둥둥 바람처럼 바람처럼 운다.]


그는 자신을 쏜 벌에게조차 용서를 빈다. 비록 해를 끼친 중생이지만 그가 쏘기까지 얼마나 많은 슬픔과 두려움을 느껴야 했는지 헤아리는 것이다. 두 번째 시기의 온달은 인간으로서의 바보를 넘어서서 자신의 피와 살을 기꺼이 내밀고 자신을 삼키는 것들의, 살아내야 하는 슬픔에 자비심을 느끼는 성자의 모습으로 진화한다. 같은시집, 온달님6 : 한 때는 자운영 노랗게 핀 들길에서/꽃벌에 쏘인 발등을 감싸쥐고 앉아/, 눈물을 눈물을 흠뻑흠뻑 쏟으며/ 미안하구려, 미안하구려,/ 꽃벌에게 그리 용서를 비시더라.
보통 인간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고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까닭에 그가 꿈꾸는 초인은 범인들에게는 바보요, 온달인 것이다.

세 번째 시기의 온달 - 동화로 스며들다.

세 번째 시기에 권영상은 비로소 어린이들에게 외면당하는 소재를 과감히 내려놓는다. 온달도 그 중 하나이다. 작가의 마음속에는 육중한 자판기 속, 향기로운 커피분말처럼 온통 온달을 통해 주고 싶어하는 교훈이 자리하고 있지만 작가는 그것을 아이들의 입으로 운반하고자 일회용 종이컵이 되기로 하고 아이들이 온달이라는 강기슭으로 스스로 걸어 도달하도록 작은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그래서 온달은 동시 속에서는 우화의 옷을 입고 온다.


 『월화수목금토일별요일』 맨 끝머리를 장식하는 저자의 말은 “거인의 코털을 건드려 봐”이다. 여기서 온달은 ‘거인’이라는 우화의 주인공이 되어서 아이들과 함께 별에도 올라가고 바다 위도 날아간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거인은 “에취”하는 재채기의 힘으로 날기 위해서 날아오를 때면 제 코털을 뽑는다고 한다. 이런 ‘작가의 말’, 권영상이 아닌 다른 이의 글이라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제 온달은 바보의 모습이 아니고 성자의 모습도 아니며 우스꽝스럽지만 어린이들을 무등 태우고 달에도 가고 별에도 가는 친근한 존재로 변화된다. 그리고 그동안 어린이들에게 먹혀들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시인이 천착하던 온달은 대신 작가의 동화 속 캐릭터로 스며들었다.

설인에서 털곰까지.

동화 “물오름 마을의 겨울눈”에서 얼핏 스치는, 인간이 감히 낼 수 없는 힘을 가진 털투성이 설인의 모습으로 권영상의 초인은 그림자를 비친다. 다음에 그는 모래거인으로 나타나 권영상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유토피아에 대해 직설적으로 설명한다. 신분제 사회의 희생양인 인도 어린이들이 주인공인 이 동화에서 작가는 자신의 유토피아를 이렇게 말한다.

“부자도 거지도, 귀족도 천민도 없는 나라…엄마의 뱃속에서 나올 때와 똑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여기는 살아있는 자의 땅이 아니다. 미래를 기다리는 자의 땅이다.”[『대장장이 작은옹당씨』中 “믿어지지 않는 모래거인 이야기” ]

이 나라 국민들은 모두 다 보잘것없는 모래 알갱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이면 엄청난 힘을 낸다. 모래알갱이가 모여 만들어진 모래거인처럼. 이렇게 권영상이 기다리는 초인은 백마 타고 와 광야에서 홀로 외치는 초인이 아니다. 없는 듯 숨어 있다가 나타나 자신의 모든 것을 사르고 다시 바람이나 흙처럼 어딘가로 슬며시 사라져 버리는 존재이다. 권영상의 동화에 등장하는 초인들은 한결같이 그가 동시에서 그려온 온달의 형상화이다.

“그 사람은 그랬다. 남의 일이라도 그렇게 제 몸을 던져 제 일처럼 해 내곤 했다. …그가 어디에서 오고 또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아파트를 세우려고 청솔밭을 밀어내려고 오는 트럭을 밀어내며)“지가 있는 한 솔마을 푸른 소나무를 베어내고 아파트를 세울 수는 없구만요.”
-- [동화집 『순복이 할아버지와 호박순』 中
“큰곰을 기다리며”에서 큰곰에 대한 묘사]

그러나 권영상의 동시에서 흔히 모든 사람이 온달을 놀리고 바보라고 부르듯이 동네에 불이 나거나 힘이 필요할 때만 큰곰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택지개발로 인해 금전적 이익문제가 걸리자 개발을 반대하는 큰곰을 부담스러워 하고 싫어하게 된다. 온달처럼 전쟁에 필요할 때 쓰고 필요 없을 때 용도폐기 당한 것이다.

그래서인가. 후에 나오는 털곰은 우직하지도 두렵지도 않고 밥 한 끼를 위해 꽃을 따러 다니는 천치 같은 사람이다. 한편 문학이론에 매달려서만 평가하자면 바보, 모자른 사람, 땅에서는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걷는 사람이 갑자기 영웅의 풍모로 나타나는 것은 캐릭터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해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털곰은 권영상이 추구하는 초인의 모습이 분명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힘이 필요할 때만 기억하게 되는 홀대받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일관성 없이 바보 같은 사람을 갑자기 영웅처럼 그리는 우를 범했다기보다 바보같은, 온달같은 모습 뒤에 가려진 누구보다도 맑은 성인의 자태를 그린 것이라고 봐야 한다. 작가는 독자가 오판할까봐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마디 거들게 된다.

정말이지 하늘은 공평합니다. 남들이 못 해 내는 일을 바보인 줄 알았던 털곰 아저씨가 해 내게 했으니까요.”[동화집『수피』 中] “털곰아저씨”

4. 미완성의 작가론을 마치며

권영상은 타고난 시인이다. 이야기꾼으로서의 기질보다도 이야기 속에서 시를 발견하게 하는 소질이 더 뛰어나다. 시인이었던 소설가 황순원의 소설문체가 남다르듯 시를 쓰면서 갈고 닦은 문장력을 권영상의 동화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가 쓰는 동화들은 연과 행을 없앤 서사시이다. 그가 즐겨 붙이는 주인공의 이름들은 모두 음운과 상징, 패러디로서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가진다. 앞 문장과 뒷문장을 이어붙이는 기능만을 충실히 수행하는 죽은 문장이 아니라는 뜻이다. 주인공의 이름이 주는 시적인 효과의 한 예를 들자면 “…작은옹당씨의 아버지 중간옹당씨와 중간옹당씨의 아버지 큰옹당씨도 분명 옹당대장간의 대장장이였으니까요.”같은 문장이 그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오리와 달리”의 주인공 이름은 바로 오리와 달리이다. 동화의 제목 “나그네가 된 나무”와 “나무가 된 나그네”도 이런 맥락으로 단어가 의미하는 뜻과는 또 다른 효과를 거두고 있다. “엉겅퀴와 작은멋쟁이나비”의 한 구절은 그대로 시다. 행과 연을 없앤 시. 여기에 적어본다.

《따뜻한 햇살이 맑은 종소리처럼 며칠 동안 쏟아져 내립니다.…처음에는 가는 비였습니다. 꽃향내처럼 부드러운 비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비로소 그가 때로는 온달과, 성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바보의 모습으로 그렸던 초인은 완성된다. 그리고 왜 그리 작가가 방황했는지도 나그네가 된 나무와 나무가 된 나그네의 삶을 통해 보여주며 해답을 제시한다.
권영상의 작품세계가 앞으로 얼마나 더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는지는 논자도 모른다. 다만 지금 그의 삶에서는, 위에 논자가 간단하게 언급한 세 번째 단계가 진행 중이며 갈수록 무르익은 작품 활동을 펴고 있다는 사실이다. 뚜렷한 색을 지닌 세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도 물 흐르듯 변함없이 이어진 맥이 있다면 작품 활동 초기에는 서사시로써 추구했으며 후에는 동화로써 구현하고자 했던 것,


초인(超人)을 기다리는, 초인을 형상화시켜가는 작업이 권영상이 작품을 쓰는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작품이란 그에게 있어 인생자체의 완성이며 한 때 현실에 참여했던 그의 삶이 증명하듯 작품과 동떨어진 언어의 유희로서 머물러서는 안 될 어떤 것이다. 그는 지금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펴고 있고 인생의 정점을 향해 우직하게 걸음을 내딛는 중이다.

진화의 완성이 어디쯤일는지를 점쳐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논자는 믿는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기다리는 초인의 상(像)을 스스로의 인생을 통해 완성해 나가리라는 것 , 그 초인상(超人像)을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어린이들에게 보내주는, 혹은 어린이들이 그의 작품세계로 징검다리를 타고 건너와서 그 초인과 교감을 가지는 지점에 반드시 도달할 것이라는 사실을 .



권영상 약력 및 작품연보

약력
1952년 3월 1일(음)
강릉 초당에서 탄생
1975 - 1981
관동 대학교 국어교육과 편입학하여 마침
1979
월간 <아동문예>에 동시 ‘새’ 등으로 3회 추천받음
1980.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길’이 당선
1982
< 소년중앙 문학상>에 동시 ‘햇살에서 나오는 아이들’이 당선
1987
성균관대학교 교육대학원 마침[《윤동주 시의 원형적 탐구》]
1990
< 韓國文學>에 수필 ‘蘭’이 신인문학상에 당선됨
1991
< 시대문학>에 시 ‘발’외 5편으로 신인문학상 당선



수상경력

1986
한국동시문학상(아동문예)
1987
계몽아동문학상
1989
세종아동문학상(소년한국일보)
1991
새싹문학상
1993
MBC 동화대상
2001
이육사 문학상 수상 거부
2004
은하수 동시문학상 대상


작품집

동시집 출간 목록
1. 1981
< 단풍을 몰고 오는 바람> 창조의 샘 刊
2. 1985
< 햇살에서 나오는 아이들> 아동문예 刊
3. 1987
< 동트는 하늘[서사동시집]> 아동문예 刊
4. 1987
< 한 해를 살면> 대교출판 刊
5. 1988
< 버려진 땅의 가시나무> 도서출판 남광 刊
6. 1991
< 밥풀> 동화문학사 刊
7. 1992
< 벙어리 장갑> 계몽사 刊
8. 1993
< 납작납작한 코끼리> 상서각 刊
9. 1996
< 아흔아홉 개의 꿈> 미리내 刊
10. 1999
< 신발코 안에는 새앙쥐가 산다> 도서출판 문원
11. 1999
< 월화수목금토별요일[이야기 동시집]> 재미마주 刊
12. 2001
2학년이 읽고 싶은 <아주 특별한 도시>(권영상.이상교.박두순)
도서출판 글송이 刊
13. 2004.2.
< 실끝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지> 국민서관
동화집 출간 목록
1. 1994
장편동화집 <숨 쉬는 말촉마을> 대교출판
2. 1995
장편동화집 <내 별에는 풍차가 있다> 두산동아
3. 1995
장편동화집 <춤추는 원숭이 치치> 중앙일보사
4. 1996
장편동화집 <나무도 시를 좋아하지요> 학생과학문고
5. 1996
단편동화집 <도시로 날아온 꽃씨> 학생과학 문고
6. 1996
단편동화집 <다락방 코끼리 아저씨> 책 만드는 집
7. 1997
단편동화집 <물오름 마을의 겨울눈> 국민서관
8. 1997
단편동화집 <대장장이 작은 옹당씨> 오늘
9. 1997
단편동화집 <아버지가 데려온 쑥곰> 대원사
10. 1998
단편동화집 <개미꼬비> 도서출판 문원
11. 2001
단편동화집 <순복이 할아버지와 호박순> 대교출판
12. 2001
장편동화집 <우리도 어른이 된다> 두산동아
13. 2003
단편동화집 <형, 모래모치한테 인사해> 진선출판사
14. 2005
단편동화집 <수피> 도서출판 문원
15. 2007
소년소설 <둥글이 누나> 사계절출판사 



--이 논문은 2007년 <한국아동문학학회지>에 수록되었고, 그해 4월 28일 서울교육대학교 인문관에서 세미나 주제로 발표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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