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다양한 변주
권영상
장성한 소나무 숲길 만큼 좋은 길이 또한 없을 성 싶다. 그 늠름한 나무들이 뿜어내는 숲의 향기에 우리는 절로 압도 당한다. 나무란 그 자체가 공간과 시간성을 가지고 있다. 5밀리의 나무의 시료만으로도 그 나무가 살아온 역사를 읽어낼 수 있다고 한다. 나무가 겪었을 홍수와 가뭄과 혹독한 추위와 맹렬한 더위, 그리고 전란의 흔적도 탐독할 수 있단다. 그 점에서 나무는 충분이 그 존립 자체만으로도 긴 이야기를 가지는 존재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아프고 힘들었던 세월에 귀를 기울이며 걸을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위안과 벅찬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메마른 들에서 만나는 작은 들풀들, 그들이 생존해내는 모습도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여린 풀이 피워내는 들릴 듯 말 듯 풍기는 향기는 소나무 숲에서 겪는 경험과 또 다른 맛이 있다. 사소한 생의 기쁨을 배우게 된다. 그들의 생은 비록 짧지만 그들은 나무가 보여주는 느슨하고 긴 생애를 짧고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몰입의 능력이 있다. 그러기에 들풀의 생애는 긴밀하고 함축적이며 잠언적이다.
시 또한 그렇지 않을까 싶다.
시어를 깎아내고 또 깎아내고 나면 남는 그 몇 안 되는 언어로 우주를 말하는 짧은 시의 힘은 잠언적 성격에 가깝다. 시는 궁극적으로 언어를 넘어서려는 성질이 있다. 그게 불립성이다. 인간이 지닌 언어라는 도구 이전의 의식에 가 닿으려는 예술이 시이며 시는 언어가 가 닿으면 이미 시들어버린다. 그 점에서 짧은 시는 서늘하거나 날렵하거나 매섭다.
이번호엔 그 어느 때 못지 않게 짧은 시들이 많았다. 어쩌면 겨울로 가는 냉한 기온이 시인의 언어 절제를 부추겼을지 모르겠다.
1. 차가운 절제미
학꽁치는/ 바다가 보낸 은빛 만년필
-김이삭의 ‘학꽁치’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7년 1 0월호
생밤/ 한 알/ 깨물면// 소리가/ 더 맛있다// 오도독
-김 현숙의 ‘오도독’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7년 10월호
한밤중 찰방찰방 초침 소리. 선 채 잠든 벽에 걸린 시계 초침이 혼자 깨 있다. 복숭아뼈까지 차는 선득 차가운 시냇물을 찰방찰방 건너는 중이다.
-이상교 ‘초침’ 전문 <시와동화> 2017년 가을호
세 편 모두 짧고 이미지가 번득인다. 시는 시간이 숙성시켜 만들어내는 산속 은자의 언어이다. 압축이 요구된다. 이들 시 모두 쏘는 듯한 강한 이미지를 갖는다.
김이삭의 ‘학꽁치’ 는 단 두 줄이다. 시란 간촐한 것인데 자꾸 군더더기 수사를 입혀 비만하게 만드는 것은 시인의 발설의 욕망 탓이다. 젊은 시인의 자제력이 놀랍다.
반짝이는 학꽁치의 날렵하고 길다란 외모와 은빛 만년필의 길다랗게 풀어내는 문장이 닮았다. 학꽁치는 그 스스로 파도치는 바다에서 살아내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 그에게 빗대어주는 ‘은빛 만년필’의 은유는 너무도 절묘하여 반짝인다.
김현숙의 ‘오도독’은 ‘오도독’이라는 맨 마지막의 청각이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이미저리의 행보가 절제적이다. 시 구성이 단정하면서도 치밀하다. 특히 2연의 ‘소리가/ 더 맛있다’는 계산적이다. 청각을 미각의 방향으로 몰아가는 척 하면서 3연의 ‘오도독’이라는 소리말을 툭 내놓는 반전의 기교에서 읽는 즐거움을 준다.
이상교의 ‘초침’은 다시 읽을수록 서늘하다. 그리고 왠지 힘든 길을 가는 외로움이 묻어난다. 한밤중 초침이 혼자 깨어 있다. 아니다. 시인이 혼자 깨어 있다. 시계의 초침이 복숭아뼈에 차는 시간의 강물을 건넌다. 아니다. 시인이 홀로 차가운 새벽의 시간을 가고 있다. ‘선득’이라는 2음절로 시의 무게를 신산함과 을씨년스러움으로 단번에 이동시키는 힘이 놀랍다. 짧은 시의 매서움이 느껴진다.
2. 유머 감각을 풍기는 시 두 편
내가 동생 낳아주지 말라고/ 그렇게 계속 말했잖아요/ 저 말썽꾸러기 동생 대신/ 차라리 내가/ 한 번 더 태어날 걸 그랬어요
-최명란의 ‘엄마!’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7년 9월호
넥타이를 맨 염소가/ 길 가까운 밭에서 풀을 뜯고 있다가/ 시골 버스가 다가오자 놀라/ 방죽이 있는 밭 아래도 냅다 뛰었다/ 버스가 다 지나갔는데도 멈추지 않던 염소의 발이/ 방죽에 막 빠지려는 순간/ 넥타이가 목을 꽉 붙들어 주었다// 아빠는 아침마다 넥타이를 매고 풀 뜯으러 간다/ 엄마는 아빠 넥타이가 너무 길다고 다시 매어주곤 한다/ 방죽에 빠질까봐 걱정되기 때문일 거다/ 어떤 날 엄마는 넥타이가 너무 짧다며/ 지각하겠다고 쩔쩔매는 아빠를 억지로 붙들고 고쳐 매 준다/ 풀을 많이 뜯어오지 못할까 봐 그럴 것이다
-곽해룡의 ‘넥타이’ 전문 <어린이책 이야기> 2017년 가을호
두 편 모두 유머에 가 닿아있다.
최명란의 ‘엄마’는 힘든 상황을 한 순간의 웃음으로 건너보려는 의도된 시다. 이 시의 화자는 말썽만 피우는 동생이 싫다. 그 거부감을 이제는 부모에게 푼다. ‘차라기 내가/ 한번 더 태어날 걸 그랬어요’ 라고.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한번 밖에 태어날 수 없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긴 인생을 끝내고 난 뒤에 태어난다면 태어날 수 있다. 근데, 이 시의 웃음의 동인은 그런 생명의 이법을 무시하고 한번 태어난 지금 또 한번 태어나 자신이 동생 노릇까지 하겠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세상을 알기 이전의 순수 상태로 화자를 되돌려놓음으로써 발현되는 웃음을 일깨우고 있다.
곽해룡의 ‘넥타이’는 밥벌이의 고달픔을 희화화시킨 시다. 이 시엔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있다. 넥타이(수염일 듯)를 맨 염소가 그 넥타이 덕에 방죽에 빠지지 않고 살아났다는 앞부분과 그런 인과관계를 발견한 엄마가 아빠가 회사에서 쫓겨나게 될 그 결정적인 순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넥타이(정장) 길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길이를 조정해주는 뒷부분이다. ‘돈을 많이 벌어오지 못할까봐’라는 말을 ‘풀을 많이 뜯어오지 못할까봐’로 희화화시켜 이 시를 더욱 시니컬하게 만든다.
앞의 시는 화자인 ‘나’를 좀 바보스럽게 만드는 데에서 오는 가벼운 웃음을, 뒤의 시는 아빠를 돈이나 벌어오는 사람쯤으로 격하시키는 슬픈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3. 개미를 매개로 하는 두 개의 동시
분홍 큰 귀를 종긋 세우고 뭐 하냐고?/ 촤르르 촤르르 밀물이 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지. 낮에 개미가 귓속에 들어가 간질간질 귓밥 청소를 해 주고 갔거든.
-유미희의 ‘갯메꽃’ 전문 <어린이책 이야기> 2017년 가을호
쉬는 시간에 들은 귓속말/ 개미가 되어/ 공부 시간 내내/ 머릿속을 기어다녔지// “흥진이가 너 좋아한대.”// 흥진이가 너 좋아한대/ 흥진이가 좋아한대/ 너 좋아한대/ 좋아한대/ 좋아!// 머릿속에 기다란 개미굴이 생겼다
-방주현의 ‘귓속말’ 전문 <어린이책 이야기> 2017년 가을호
이 시들은 개미를 주제로 하거나 제재로 삼은 시가 아니다. 개미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는 시들이다. 물론 실제의 개미가 아닌 관념 속에 존재하는 개미다. 개미는 작다, 부지런하다. 좁은 틈을 비집고 다닌다는 개미의 관념적 속성을 빌리고 있다.
유미희의 ‘갯메꽃’의 개미는 막혀있는 공간을 뚫어 바깥 세계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개미에게 부여하고 있다. 갯메꽃이 밀물이 건너오는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건 개미가 귓밥 청소를 잘 해주었기 때문이라는, 상상하며 읽는 즐거움을 주는 시다.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장콕도의 시가 연상되는 세련된 시다.
방주현의 ‘귓속말’의 개미는 앞의 시와 달리 ‘쉬는’ 머릿속을 오히려 얽히고 설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틈만 보이면 요리조리 온데를 파고 돌아다니는 쪼끄맣고 바지런을 떠는 개미의 속성을 빌리고 있다. 이 시의 발단은 쉬는 시간에 들은 귓속말이다. 귓속말은 급기야 개미처럼 발발거리며 돌아다녀 머릿속을 개미굴로 만들어버렸다는 테마다. 이 시가 흥미를 끄는 까닭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얽히고 설킨 머릿속 상태를 개미의 속성을 통해 형상화시킨다는 점이다. 모처럼 개미의 역할이 컸다.
4. 말과 말의 유희
말의 종류를 괄호 안에 넣어 볼까?// (얼룩말, 거짓말, 조랑말, 바른말, 양말, 정말, 반말, 참말, 흰말, 고운말, 검은말, 존댓말, 갈색말)// 이 정도로도/ 괄호가 미어터질 거 같은데?/ 말이 너무 많으면/ 입에서 마구간 냄새가 나겠어// 거짓말은 왠지 얼룩말을 닮았을 거 같아/ 검은색이 얼룩인지/ 흰색이 얼룩인지/ 분간이 안 가는 말이잖아// 고운말은 양말이랑 비슷해서/ 따뜻한 콧김을 히히힝 내뿜고/ 정말?/ 정말// 반말은 말 꼬리가 짧을 거 같은 게/ 말이랑 안 닮았을 거야/ 왠지 싫은 녀석// 같은 말이라도 쉽게 나오지 않는 말들은/ 내가 잠들면 입 밖으로 몰래 튀어나와서/ 아프리카 초원처럼 넓은 꿈속을 마구 달린대/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잠꼬대처럼 웅얼거리는 말들이래/ 아빠가 봤대
-김준현의 ‘말에도 뼈가 있을까’ 전문 <동시마중> 2017년 9.10월호
너랑 여수 갔을 때/ 이렇게 쓰인 길이 있었잖아.// 오동도 - 여자만/ 자전거길// “이 길은 여자만 탈 수 있는 자전거길인가 봐!”/ 갸웃갸웃 웃고 있는데/ 누군가 ‘여자만’이란 곳이 있다고 말해 주었어.// 개펄 향기가 바람 되어 부는 곳이라 했어./ 붉게 타는 저녁노을이 하늘에 번지고/ 갯벌에도 드리우면/ 영혼이 물드는 것 같다고 했어.// 우리는 자전거 타고 여자만 까지 가 보자고/ 손가락 꼬옥 걸었지// 네가 옆에 있어서/ 참 행복해.
-임복순의 ‘여자만 약속’ 전문 <동시마중> 2017년 9.10월호
말 그대로 말과 말이 만들어내는 말 유희 시들이다. 우리 말은 소리말이고 첨가어이기 때문에 그 말 특유의 특성이 다양하다.
김준현의 ‘말에도 뼈가 있을까’는 제목 그대로 말(言)과 말(馬)의 장난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다. ‘말’을 소재로 쓰여진 시가 당연히 많다. 그렇더라도 새로이 만들어내는 시는 또 그 시대로의 새로움과 웃음을 선물하기에 충분하다. 다양한 말과 말의 이야기를 끝마치면서 ‘아빠가 봤대’라며 이 어처구니 없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려는 능청스러움 또한 재미있다. 무엇보다 압권은 ‘고운말은 양말이랑 비슷해’이다. 고운 말씨와 고운 털빛의 말은 두 형태의 말이거나 서양에서 들여온 말이거나 스타킹이라는 다의성을 노리고 있다.
임복순의 ‘여자만 약속’도 동음이의의 지명에서 착안한 시다. 이러한 지명은 많다. 화천군의 구만리, 거제시의 망치리, 광주직할시의 방구마을, 거창군의 유령마을.... 등이 여자만과 같은 유형의 지명들이다. 임복순의 시에서 우리가 꼼꼼히 보아두어야 할 것은 4연이다. 시인은 우스개 지명을 단지 우스개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그치지 않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여자만의 서정적 풍경을 그려 4연에 삽입함으로써 시가 단순히 일회성의 웃음으로 끝날지 모르는 우려를 차단했다는 점이다.
우리의 소리말 특성을 잡아내어 다양한 시로 살려내는 일은 어린이 문학을 하는 이들이라면 각별히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이고, 또한 시인의 중대한 임무가 아닐까 한다.
끝으로 박소이의 ‘기차 시계’, 김성민의 ‘강가에 앉아서’, 장세정의 ‘밥알은 가락을 타고’, 김미혜의 ‘인터넷’등을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다.
'문학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료 구독지와 2017년 지역연간집 동시들 (0) | 2018.03.31 |
---|---|
행복한 동심과 은유와 공존의 시들 (0) | 2018.02.27 |
안도감을 심어주는 동시 -이상교 (0) | 2017.11.23 |
권영상론 -전병호 (0) | 2017.11.23 |
권영상론 -이정석 (0) | 2017.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