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아평 가을호)
문학은 시대를 그리는 무늬다
권영상
문학은 시대를 그리는 무늬다. 이 말을 나는 믿는다. 문학이 동시대인의 땀과 눈물과 아픔과 고충, 그리고 꿈을 그려낸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테다. 그 말에 동의하려면 시인은 시대가 흘러가는 물길을 보는 눈과 작은 일에도 공감할 수 있는 공감력을 지녀야한다. 시가 때로는 웃음을 만들고, 가족과 지구와 우리가 처한 현실을 거론하거나 공동체 유대감을 이야기 하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문학이 그 시대 사람들의 아픔과 고뇌와 절망과 희미하나마 그 시대인들의 소망을 짜내는 무늬이기 때문이다.
여름호가 너무 일찍, 지난 3월 중순에 쓰여졌기에 그 후 쏟아져 들어온 봄호와 여름호 양이 너무 많았다. 아쉽기는 해도 봄호는 접기로 했다. 봄호로 동시 전문지 <동시먹는 달팽이> 창간호도 나왔었다. 무려 35편의 신작동시가 실렸다. 너무 반가운 일이다. 창간을 축하한다. 하지만 창간호 언급과 문학적 기여에 대해서는 후일 전문 평론가들의 언급이 있으리라 믿고 봄호라는 이유로 제외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이번호도 인용할 동시(15편) 편수를 늘렸다. 발표된 동시 편수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수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지면 관계로 좋은 작품을 손에서 내려놓는 일은 동업자로서 정말 못 할 일이다. 결국 계절 평을 하는 나의 목소리를 줄이고 대신 인용시를 늘렸다. 이미 발표된 시이긴 하지만 한 번 더 읽어보는 기쁨을 드리고 싶어서다.
1. 간명한 시가 좋다
따닥따닥/ 자판 위를 말이 달린다// 또박또박/ 모니터에 발자국이 찍힌다
-박승우의 ‘말 발자국’ 전문 <시와 동화> 2018년 여름호
하늘엔/ 달 혼자// 마당엔/ 나 혼자// 나마저 들어가면/ 달은 혼자 뭐하나
-이오자의 ‘혼자’ 전문 <동시먹는 달팽이> 2018년 여름호
한 사람이 웃으면/ 세 사람이 웃고// 한 사람이 아프면/ 세 사람이 아프다.// 지구에서 전염이/ 가장 빠른 곳
-이영애의 ‘식구’ 전문 <어린이책 이야기> 2018년 여름호
봄볕 속에 숨었다가/ 솔솔 기어 나와/ 살살 꼬드긴다//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따라간다/ 끄덕끄덕 따라간다
-우남희의 ‘졸음’ 전문 <어린이책 이야기> 2018년 여름호
우당탕퉁탕!// 훤한 대낮에/ 큰 도둑 들었네// 순식간에/ 찜통더위만 훔쳐/ 후다닥 달아나는/ 소나기
-김현숙의 ‘도둑’ 전문 <동시먹는 달팽이> 2018년 여름호
다섯 분의 시를 소개했다. 주제와 상관없이 모두 간명한 시들이다. 긴 시들이 서사의 즐거움을 준다면 간명한 시들은 그들대로 번쩍, 하는 전율의 쾌감을 준다. 짧은 시의 핵심은 사물의 속성이나 사회 현상을 단번에 간파하는 순간성에 있다. 전율 효과를 높이려면 그 안에 해학이나 위트 비틀기 알레고리 등의 빛나는 기술이 동원되면 좋다.
박승우의 ‘말 발자국’을 보자. 시인은 워드 프로세싱 하는 일을 말이 글자판 위를 달린다고 보며, 모니터에 형성되는 글자를 발자국이라고 본다. 가타부타 설명이 없는 기습적인 은유다. 공감력을 쉬이 이끌어낼 만큼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이런 시는 직관의 놀라움과 기쁨을 맛보면 된다. 그게 왜 그거냐고 따지면 더 이상 시가 힘을 잃는다. 물론 시를 읽는 맛도 떨어진다.
이오자의 ‘혼자’도 그렇다. 하늘에는 달이 혼자 떠있고, 이 지상에는 그 달을 나 혼자 본다는 전제가 있다. 달을 보고 있는 게 왜 너 혼자냐고 그 전제를 허물어뜨리려 하면 시는 존재할 수 없다. 달은 달이 아닌, 내가 끝까지 보아주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누구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인의 아픈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형태상으로만 짧아서 짧은 시가 되는 건 아니다. 독자의 마음을 한 순간에 탁, 건들어주고 빠지는 여운의 미를 지녀야 한다.
이영애의 ‘식구’는 명언명구의 기능을 한다. 식구란 ‘이런 것이다’ 라고 한 마디로 단정하는 금언성 말이다. 그래서 ‘아, 그렇구나’ 하는 명언의 설득적 힘을 이 시가 보여주고 있다. 우남희의 ‘졸음’은 졸음과 졸음에 빠져드는 순간순간의 모습을 의인화의 방식으로 절묘하게 잘 연결하고 있다.
김현숙은 대체로 짧은 시에 능한 시인이다. 소나기 끝난 뒤의 서늘해진 자연현상을 큰도둑이 찜통더위를 훔쳐갔기 때문이라고 보는 간파력이 돋보인다. 도둑이 도둑인 줄 알았는데 그게 소나기였다는 반전의 시적 계략이 숨어있다.
2.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현실
키보다 큰 총을 메고 있는/ 소년병// 기자가/ “왜 군인이 되었어요?”/ 묻자,// “포탄이 날아와 집이 부서지고 식구들이 다 죽었어요. 집도 식구도 없어요.” /대답한다.
-공광규의 ‘민다나오 소년병’ 전문 <동시마중> 2018년 여름호
신발끈/ 풀었다/ 묶었다// 우산을/ 폈다/ 접었다// 기다렸는데// 도경이랑/ 우산 쓰고 가는/ 짝꿍
-김금래의 ‘비 오는 날’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8년 6월호
나는 줄에 매달려 종일 집을 지키지요/ 그렇다고 강아지처럼 먹을 걸 달라거나 짖지는 않아요// 따르르, 따르르....//가끔 노래를 불러서 가족들을 내 앞에 서게 했지요/ 그래서 누가 누구와 친한지 대충은 알았지요/ 요즘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자기 방에서 자기 핸드폰으로 소곤거리고/ 어쩌다 거실에 모여 있어도 문자 메시지나 카톡을 주고 받느라/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는 나만들어요// 그리고 가끔 이런 말도 듣지요/ “이젠 집 전화 필요없잖아? 그냥 없앨까 봐.”/ 그럴 때마다 나는 금방이라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아 텔레비전 뒤에 납작 엎드려 있지요/ 그런데 죽으란 법은 없나 봐요/ 이 집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요/ “싫어. 엄마! 짜장면 시킬 때는 이 전화로 해야 돼./ 나 유치원 때부터 단골이라 빨리 갖다 주잖아.”// 정말 다행입니다/ 짜장면이 나를 살렸습니다
-서금복의 ‘짜장면 전화기’ 전문 <시와 동화> 2018년 여름호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세상은 조용할 날이 없다. 하루도 총소리 그치는 날이 없고, 하루도 굶주림과 가뭄에서 벗어나는 날이 없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란 아프다. 타인을 아프게 해야만 내가 아프지 않을 것처럼 늘 타인을 아프게 하며 산다.
공광규의 ‘민다나오의 소년병’은 식구들과 집을 포탄에 모두 잃어 오갈 데가 없다. 의탁할 곳 없는 소년은 아무 이념도 사상도 없이 군인이 되어 제 키보다 큰 총을 들었다. 전쟁은 이렇게 하여 그치지 않는 악순환처럼 인류를 아프게 한다.
아픔은 전쟁터에만 있는 게 아니다. 김금래의 ‘비 오는 날’의 시 속 화자는 짝꿍과 같이 우산을 쓰고 가려고 그를 기다린다. 하지만 화자가 기다린 짝꿍은 그러는 내 마음과 달리 도경이랑 우산을 쓰고 간다. 도경이가 같은 여자애라도 그렇겠지만 남자애라면 화자가 겪게 될 아픔은 ‘민다나오 소년병’의 아픔만치 클 것 같다.
서금복의 ‘짜장면 전화기’의 아픔은 조마조마하다. 우리 현실에서 이제는 별 소용없는 줄 달린 전화기가 겪는 아픔이다. 아무 쓸모없어 ‘그냥 없앨’ 지경에 이르지만 다행히도 ‘이 집 아들’의 빠른 배달 욕심 덕에 간신히 살아난다는 이야기이다. 줄 달린 전화기의 위기를 폐기 직전에 놓인 아날로그 세대의 위기로 읽는다면 싸아한 마음을 더욱 심하게 느낄 테다.
3. 서로 다른 꿈의 아름다움
배추 잎엔/ 뽕뽕뽕/ 애벌레가 꼬물꼬물 찍고 간 무늬// 바닷가엔/ 처얼썩 처얼썩/ 썰물이 느릿느릿 찍고 간 무늬// 비 온 날 풀밭엔/ 꿈틀꿈틀/ 지렁이가 온 몸으로 찍고 간 무늬// 다/ 다른 무늬// 넌/ 어떤 무늬를 찍으며 가니,/ 지금?
-유미희의 ‘무늬’ 전문 <동시먹는 달팽이> 2018년 여름호
그때,/ 골목을 헤매던 고양이 한 마리가 철문 앞에 버려진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닭 다리뼈인지 고등어 등뼈인지를 끄집어내고는 한참 두리번거린 이유가// 아하, 그랬구나! //SBS ‘영재발굴단’에서 산동네 사는 준규가 개발한 자동급식로봇 ‘계동밥그릇’을 소개하며, 발명동기가 많은 길고양이들이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든든하게 밥을 먹게 하고 싶어서 라고 한다.
-오인태의 ‘따뜻한 발명’ 전문 <동시먹는 달팽이> 2018년 여름호
오리가/ 날아와/ 앉았다/ 연/못/말/뚝/에/ 꼭 한 번 이 그림을 그려 보려고/ 말뚝은 뻘흙 속에서 꼿꼿하였다//꼭 한번 이 그림을 그려 보려고/ 오리는 아주 멀리서부터 날아왔다/ 물/ 속/말/뚝/그/림/자/에/ 그림자/ 오리가/ 앉아 있다
-이안의 ‘말/뚝’ 전문 <동시마중> 2018년 7.8월호
치열하게 달려오느라 우리는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나만 잘 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쯤 와 보니 그게 아니다. 내가 행복하려면 타인도 행복해야 한다는 유기적 관계망의 원리를 뒤늦게야 알게 됐다. 우리는 지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타인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거나 인정해야하는 낯선 가치 앞에 직면해 있다.
유미희의 ‘무늬’엔 꼬물꼬물 찍은 무늬가 있고, 처얼썩 처얼썩 찍은 무늬가 있고, 꿈틀꿈틀 찍은 무늬가 있다. 그의 ‘무늬’ 속 세상 존재들은 타인과는 다른 자신만의 무늬를 찍으며 산다. 거기엔 서로 다른 존재들의 서로 다른 가치의 아름다움이 구현되고 있다.
오인태의 ‘따뜻한 발명’엔 뜻밖에도 길고양이들이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든든히 밥 먹을 수 있는 자동급식로봇 발명자 준규라는 인물이 나온다. 우리가 길고양이들에게 눈칫밥을 줄 때 준규는 눈칫밥을 먹는 길고양이들이 안쓰럽다. 그는 고양이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인다. 타인을 향한 벽은 그렇게 허물어져 갈등 없는 세상이 된다.
이안의 ‘말/뚝’에는 말뚝에 오리가 앉은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하는 말뚝과 말뚝에 오리가 앉아있는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하는 오리가 있다. 똑 같은 상황이지만 그 안엔 말뚝과 오리라는 두 시선의 주체가 있다. 다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이상을 그리고자 하는 서로 다른 주체들, 그들이 혼재하여 있어 세상을 바라보는 스펙트럼은 더욱 넓고 아름답다.
4. 아빠와 나
우리 방 천장에 개 한 마리 산다/ 짖지 않는 조용한 개/ 어둠과 빛이/ 적당히 어우러질 때 나오는 개/ 아빠 손으로 불러낼 수 있는 개/ 아빠가 대신 짖어 주는 개// 일곱 살, 드디어 나도 불러낼 수 있게 됐다/ 이제 강아지도 같이 나온다/ 천장엔 아빠 개와 강아지, 둘이 나란히/ 방바닥엔 아빠와 나, 둘이 신나서 멍멍 몽몽
-김미희의 ‘손그림자’ 전문 <동시마중> 2018년 7.8월호
아빠는 퇴근하자마자/ 침대 위에 쓰러져// 그럼 난 아빠 등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 –아빠 맞혀 봐// 사/랑/해// 아빠는 눈을 감고 미소 짓지// 깜빡깜빡 꺼져 가는 아빠한테/ 반짝 불이 들어오는/ 밤
-정연철의 ‘등불’ 전문 <동시마중> 2018년 7.8월호
집안/ 구석진 데서 발견한/ 씨 몇 알// 아빠와 나는/ 무슨 씨인지/ 내내 궁리하다가// 봄이 오면/ 흙에 심어 보기로 결정했다// 이 문제는/ 봄에게/ 흙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성명진의 ‘공부’ 전문 <동시마중> 2018년 7.8월호
서로의 존재를 따뜻이 이해하고, 미흡하나마 서로를 인정해주면서 함께 걸어가는 구성원들 중에 가족이 있다. 그런 까닭에 ‘타인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주제’를 구현하는데 있어 가장 시적 비용이 적게 먹힌다는 이유로 가족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아빠와 나’는 ‘엄마와 나’ 보다 훨씬 그 주제를 생산하는 비용이 덜 든다.
김미희의 ‘손그림자’엔 방바닥에 누운 아빠와 나가 있고, 천장에는 개와 강아지가 있다. 아빠와 나는 방바닥에 누워 천장에 개와 강아지를 만드는 손그림자 놀이를 하고 있다. 가까이 하기에 먼 아빠와 이런 놀이를 한다는 그 상황 설정만으로도 사랑이 담뿍 묻어나는 효과를 얻고 있다.
정연철의 ‘등불’엔 피곤해 누운 아빠 등에 글씨 알아맞히기를 하는 아들이 있다. 피곤한 아빠가 사랑해, 그 글씨를 읽어내느라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시인은 그 미소를, 피곤에 지쳐 깜박깜박 꺼져가는 아빠를 반짝 살려내는 불로 정교하게 비유한다.
성명진의 ‘공부’엔 집안 구석에서 발견한 씨앗을 놓고 아빠와 내가 이름을 알아보려 애쓴다. 하지만 그 대답을 지금 당장 얻기보다 봄이 오거든 땅에 묻어 땅에게 물어보자고 ‘결정’을 미룬다. 가족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와도 얻어낼 수 없는 결정이다. 가족은 그렇게 서로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보태거나 바치거나 하면서 세상에 나아가 더불어 사는 힘을 길러주는 구성원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들은 큰 비용없이 타자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이해라는 주제를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다 썼다. 봄호에서 예견한 대로 칸나가 꽃 필 때 가을호도 마쳤다. 연일 이어지는 폭염도 아랑곳없이 참나리와 살비아가 피고 있다. 이 글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지치지 않는 그들 때문이다. 그리고 읽을수록 시 맛이 도는 좋은 동시들이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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