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뜰이 쓸기 싫다고 낙엽을 원망해서야

권영상 2017. 11. 26. 16:25

 


뜰이 쓸기 싫다고 낙엽을 원망해서야

권영상



자고 일어나면 마당에 낙엽이 뒹군다. 하루 이틀이 아니다. 배롱나무 잎이 한 동안 떨어지더니 매실나무 잎이 시나브로 졌다. 11월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중국단풍나무 단풍잎이 성가시도록 떨어졌다. 성가셔도 보통 성가신 게 아니다. 꽃복숭아나무 파란 잎도 한 몫 한다. 한 번에 폭 쏟아지는 게 아니고 찔끔찔끔 떨어진다.

중국단풍나무는 창가에 심었다. 처음 나무시장에서 나무를 고를 때 산딸나무라는 이름표를 보고 샀다. 초록이 무성해지는 유월, 충주호가 가까운 어느 버스휴게소 뜰에 핀 산딸나무꽃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초록숲에 홀연히 피는 순백의 꽃빛이라니!



그 때 그 꽃을 떠올리며 창밖 좋은 자리에 산딸나무를 심었다. 근데 1년이 가고 2년이 가도 꽃 피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산딸나무인 줄 알고 심은 나무는 산딸나무가 아니고 중국단풍나무였다. 그렇다고 한참 잘 자라는 나무를 옮겨심을 수도 없고 해 그냥 두었다. 그늘이 좋고 가을이면 튤립을 닮은 잎이 붉게 익어 꽃보다 못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떨어지는 낙엽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침마다 갈퀴질을 한 뒤 비질을 하였다. 그냥 두고 보는 일도 좋은 줄 알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같아 보기 흉하다. 게으른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마음 쓰였다. 마당을 어지럽히는 것은 중국단풍나무만이 아니다. 마당가에 선 뜰보리수나무도 가세한다.



시골에서 자랄 때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지는 마당부터 쓸게 하셨다. 시골집 마당귀엔 아름드리 오동나무가 서 있었다. 여름이면 그 밑에 자리를 깔고 땀을 식히거나 책을 읽거나, 방학숙제를 했다. 오동나무가 꽃 필 때면 그 보랏빛 향기를 즐겼다. 오동나무잎에 뚝뚝 지던 장맛비소리는 어린 나이에도 싫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동나무가 싫었던 건 낙엽 때문이다. 낙엽은 가을에만 떨어지는 게 아니다. 나무의 성장이란 게 새잎을 피우고 묵은 잎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보니 낙엽은 끝없이 만들어져 나무 밑을 어지럽힌다.



그런 까닭에 하룻밤 자고나면 마당은 떨어진 오동잎들로 너저분했다. 농가의 마당이란 건 또 얼마나 큰가. 곡물 타작을 하고, 타작한 곡물을 말리는 역할을 하는 너른 마당을 식전에 혼자 쓰는 일이란 힘들다.

오동나무 베어요.”

어린 나이의 나는 드디어 아버지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오동나무가, 마당이 보송보송해지는 걸 방해한다는 말을 어른들한테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 일어나셔서 논밭일을 보고 들어오신 아버지는 내 비를 받아쥐고 마당을 다 쓰신 후에 나를 타이르셨다.

마당 쓰는 일이 힘들다고 나무를 탓하면 안 된다.”

그 말씀을 끝으로 아버지는, 더는 마당 쓸기에 게으른 나를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건 아버지도 겪어보셔서 알만한 문제였을 테니까.



지금도 마당을 쓸 때면 잠시 허리를 펴고 그때 그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린다. 낙엽 쓰는 일이 힘들다고 나무를 원망하면 무엇할까. 나무가 피워주는 꽃을 사랑하고, 나무가 내어주는 그늘의 서늘함을 누렸다면 당연히 낙엽이 가는 뒤를 보살펴 주는 것도 사람의 몫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별것 아닌 작은일에 빠져 괴로워할 때가 많다. 작은일 때문에 큰일을 그르칠 때도 있다. 그때 작은일이 싫다고 오동나무를 베었다면 우리 집은 더 이상 오동나무댁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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