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하룻밤

권영상 2017. 11. 1. 10:50

하룻밤

권영상

 

    

 



우연찮게 동해안 조그마한 포구를 찾았습니다. 본디 가기로 한 곳은 인제에 있는 백담사였습니다. 정확히는 백담사가 있는 수렴동 계곡이었지요. 아내와 나는 새로 생긴 서울양양 간 고속도로에 들어섰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있으니까, 하고 달렸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안내가 없었습니다. 내비게이션 업그레이드 없이 새로 난 길 위에 들어선 걸 뒤늦게 깨달았고, 우리는 내처 그 고속도로의 종착지인 양양에 들어섰지요.



생소한 길이 아니라는 점이 그만 우리의 부주의를 부추겼지요. 이렇게 하여 산을 놓치고 우연찮게 바다로 왔습니다. 다행히 평일이라 가을바다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유있게, 낙산사와 바다동굴 위에 지어진 홍연암을 보고, 바다가 가까운 곳에 만들어진 오솔길을 걸었지요. 파도 한 점 없는 바다는 들판처럼 파랗고, 가을하늘 역시 목마를 만큼 파랬습니다.

주인 없는 바다라 바다 빛이 더 고운 것 같아.”

푸른 바다 빛을 들이마시던 아내가 그 말을 했지요.



듣고 보니 그럴 듯합니다. 주인 없는 하늘빛이라 하늘빛은 더 곱고, 주인 없는 바람이라 바람은 한없이 맑고, 주인 없는 소나무들이라 솔숲은 더 푸릅니다. 바람은 바람의 것이고, 바다는 바다의 것이고, 솔잎은 소나무의 것이니까 더 아름답다는 말 같았습니다. 바닷가 모래벌에 핀 갯메꽃이 더욱 예뻐 보이는 까닭도 그 꽃이 나의 것이 아닌 갯메꽃의 것이라 더욱 그렇겠지요. 그들 모두는 그들의 것입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키운 바다와 하늘과 나무와 풀의 것들이지요. 욕심이 섞이지 않은 그들의 것은 인간의 것들과 달리 지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저녁 무렵에는 축항에 나가 멀리 설악산 고봉들 위로 지는 노을을 보았지요. 일몰 30여분 전부터 시작된 노을은 일몰이 끝나고도 꽤 오랫동안 하늘을 물들이며 햇빛놀이를 했지요.

우리는 천천히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 나섰지요. 평일이니까 방도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그마한 포구라 방은 있어도 턱없이 비쌌고, 그마저도 서로 밀치듯이 차지하는 바람에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기슭에 잠자리를 구했습니다. 사람의 것들은 이렇게 주인이 있어 서로 밀고 밀치고 그 때문에 언성을 높입니다.



우리는 산기슭 외딴 집에서 별을 보며 하룻밤을 맞았습니다. 참 생각지도 못한 하룻밤입니다. 지구의 이쪽, 동해안 산마을에 와 머물게 되는 이 우연한 하룻밤. 이 밤이 내 생애의 어느 하룻밤일 수도 있겠지만 하룻밤 같은 내 생애인 듯도 했습니다. 길고 긴 세월 속에서 보자면 내가 살고 있는 이 6,70 평생이란 것도 하룻밤 같다면 하룻밤 같을 수도 있겠지요.

밤별을 쳐다보려니 오늘 나의 행적이 또한 그렇습니다. 산으로 갈 계획을 놓치고 우연찮게 바다로 왔고, 바다에서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의 하룻밤이 아닌, 우연찮게 이 산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네요. 내가 살아온 삶이 이렇겠지요. 내가 내 뜻대로 이러이러하게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삶의 기로에서 우연찮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을까요? 나와 동행한 아내는 또 어떤 우연으로 만나져 이 하룻밤 속에 함께 하는 건가요?



"이리로 오길 잘 했네"

아내는 벌써 별을 보는 이 고요한 하룻밤을 아내 좋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바닷가 숙소에 짐을 풀었다면 이런 밤을 맞지는 못했겠지요만 이보다 더 좋은 밤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요. , 살아보지 못한 저쪽의 하룻밤이 그리운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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