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성자

권영상 2017. 10. 25. 10:24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성자

권영상




성자가 없다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사는 게 공허하다고 한다. 그러나 가만 생각하면 성자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성자’가 없을 뿐이다. 공자는 있어도 내가 생각하는 공자는 없고, 부처는 있어도 내가 생각하는 부처 역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게 당연하다.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성자는 어떤 분인가. 그가 대답했다. 세상의 온갖 욕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분. 금욕과 절제와 빈한함을 즐기는 고아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성자가 입을 열면 나의 고민이 일시에 안개처럼 사라지고 어둠 속에서 해가 돋듯 세상을 환하게 하는 인물.

그가 말 하는 ‘그의 성자’다.

그런 성자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가끔 도저히 현실적으로 만날 수 없는 성자를 설정해 놓고 그 안에 갇혀 사는 모순에 빠진다.

그의 성자 찾기는 일종의 허영이다. 마치 백마 타고 오는 왕자를 기다리는 늙은 처녀의 허영과 같다.



그는 외롭고, 답답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그런 까닭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뛰쳐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그만의 성자는 없어도 성자는 이 세상에 많다.

평생을 시장 골목에서 번 돈을 가난한 대학생을 위해 투척하는 나이 먹은 할머니의 어떤 모습은 성자를 닮았다.  발길에 밟힌 들풀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워주는 어린 아이의 손길에도 성자의 모습이 있다. 아들의 생일을 위해 케이크를 훔친 어느 가난한 아빠를 용서해주던 빵가게 아저씨의 이해심에서도 우리는 성자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만인가. 내 화풀이를 끝까지 들어주는 내 친구 또한 어쩌면 소중한 나의 성자이다.



더 이상 이곳은 내게 아무것도 채워주지 못한다며 목마른 사람처럼 샘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들 중에 그가 있다. 그는 먼 길을 걷거나 많은 시간을 여행에 바친다. 때로는 성인들이 태어나고 걷고 깨닫고, 설교하거나 설법한 성지를 순례하기도 한다.

그러고 돌아오지만 목마르기는 떠날 때와 다르지 않다. 시간이 더 흘러가기 전에 그는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또 다시 여행 가방을 싼다. 전보다 더 먼 곳을 찾아 떠나거나, 더 많은 날을 여행하는 일에 바친다. 그러나 떠나갈 때의 기대와 달리 그는 여전히 빈 주머니로 돌아온다.



그가 말한다.

“뭔가 부족해.”

그의 머릿속에는 늘 여러 종류의 마지막 여행지가 있다. 그곳에 가면 뭔가 허전한 것이 채워지리라 믿는다. 그는 또 다시 여행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결행하듯 그가 말하는 마지막 여행길에 오른다. 이번 역시 저번보다 더 먼 곳으로, 더 많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 허전한 곳을 가득 채우고 돌아올 듯이 떠난다. 그러나 지난날에 그랬듯 그는 빈주머니로 돌아오고 만다.

“뭔가 부족해.”

그는 아직도 허전하다.



왜 그럴까. 까닭은 간단하다. 그의 머릿속 호주머니가 그만의 이념으로, 그 만의 세계로, 그 만의 성자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의 머릿속 호주머니는 그가 보고 들었던 무엇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그가 달라지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받아들일 겸손함이다. 겸손하지 않고는 내 곁에 있는 성자를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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