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꿀꿀한 날의 군고구마

권영상 2017. 12. 3. 15:47

꿀꿀한 날의 군고구마

권영상




춥고 꿀꿀한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기온이 계속 내려가고 있다. 창밖엔 바람이 분다. 해는 게으른 사내처럼 한 번도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무거운 구름은 연실 산 너머 동쪽으로 이동 중이다. 눈이라도 내리려는지 하루 종일 우중충하다. 일몰이 가까워오는 이런 시각엔 의욕조차 없다.



“안에 사람 있어요?”

그 무렵이다. 누가 부르는 소리가 난다. 문을 여니 옆집 이형이다. 이형이 장갑 낀 두 손안에 담아온 걸 내 앞에 내민다. 군고구마다. 휴지 한 장 위에 고구마 네 개를 받쳐왔다. 집에 난로를 들여놓았단다. 그 기념으로 구어봤는데 맛보라고 가져왔단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이형이 넘겨주는 군고구마를 휴지 째 받았다. 군고구마 뜨거운 열기가 내 손으로 넘어왔다.



“날도 꿀꿀한데 겨울 추억을 맛 보세요.”

그러고는 돌아섰다.

정확히 군고구마 세 개와 구운 토란 하나다.  꿀꿀하던 나의 저녁이 금방 따스하게 바뀌었다. 군고구마 껍질을 벗겨 한입 물었다. 잇몸이 데일 정도로 뜨겁다. 속이 노란 호박고구마다. 요 잘 익은 군고구마가 축 쳐진 나를 달아오르게 한다. 구운 토란은 눈에 익은 놈이다. 내가 키운 놈이다. 지난 가을 토란을 캐어들고 제일 먼저 찾아간 게 이형 집이다. 이걸 어떻게 다듬고 조리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느라 좀 드린 건데 그게 이렇게 따끈하게 익어서 구운 토란으로 돌아왔다.



“정말 낭만적인 사람이야!”

군고구마를 먹고 난 찬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어느 날, 잘 아는 친구가 난데없이 시골 우리 집을 찾아왔을 때다. 대접할 게 마땅찮아 난감해 하는 내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그때에도 이형이 바깥에서 나를 불렀다.

“포도를 좀 따왔어요. 손님 오신 것 같아서.”

오토바이를 타고 농장에 달려가 따왔다며 포도 한 바구니를 건넸다. 옆집 이형은 요 앞 산 너머에 포도농장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 막 익는 첫물을 아깝잖게 따주었다.



나는 야채 통에 넣어둔 맥주 두 통, 감 두 개를 집어 들고 이형 집을 향했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꿍짝꿍짝이다. ‘나팔바지에 빵집을 누비던 추억속의 사랑의 트위스트.' 이형이 좋아하는 뽕짝이 울리고 있다. 마당이 들썩거릴 정도다. 이형은 볼륨을 잔뜩 높여놓고 듣는 흘러간 가요를 좋아한다. 어떨 땐 한나절 내내 틀어놓는다. 텃밭 상추들이 노랫소리에 웃자랄까 걱정될 정도다. 그러나 다행인 건 이형 집이 돌아앉아 있어 우리집에선 전혀 들리지 않는 점이다.



“날이 꿀꿀해서 기분전환 좀 하려구요.”

이형이 내가 가져간 맥주를 받아들며 노래의 볼륨을 낮추었다. 이형도 오늘 같은 날은 나처럼 의욕이 떨어지는 모양이다. 이형의 등 뒤로 거실에 놓은 난로가 보인다. 들어와 손 좀 녹이고 가라한다. 손사래를 치고 나오는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온 동네를 주름잡던 그대애애!’ 노래 한 자락이 흘러나왔다.

돌아오는 대로 그 기분으로 발장단을 치며 밥을 짓고, 시금치국을 만들고, 생선을 구웠다. 늦은 밤 잠자리를 펼 때에도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를 흥얼거렸다. 이형이 준 군고구마와 상하이, 상하이 덕분에 그 꿀꿀한 저녁과 밤을 잘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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