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김형의 애창곡

권영상 2017. 12. 13. 14:30

김형의 애창곡

권영상 




“금요일 술 먹을 시간 꼭 좀 비워놓아.”

예전 근무하던 직장 동료한테서 전화가 왔다. 뭐 아무 이유 없이 두 달이든 세 달이든 생각날 때면 만나 저녁도 먹고 술도 먹는 모임이 있다.

그 동료 중에 아내를 잃은 김형이 새 장가를 갔다. 그 바람에 함께 살기 버거워진 김형의 딸이 그만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서둘러 결혼을 한 후 분가해 나갔다. 어쩌면 금요일 모임이 그를 위로하기 위한 모임 같았다.



우리는 약속한 사당역 근처 음식점에 모였다. 김형과 채형, 그리고 박형과 나. 우리는 밥 대신 술부터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좋아서라기보다 그러지 않고는 김형의 아픔을 위로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술을 마시면서도 아무도 김형의 아픈 가정사에 대해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애꿎게 술잔만 서둘러 돌리고 또 돌렸다. 그렇게 빈속에 술을 마시고, 그것이 또 부족해 2차를 가서도 술상을 앞에 놓고 술을 마셨다.



어느 정도 취했을 때다. 누군가가 김형의 이야기를 어렵게 꺼냈다. 이야기라는 게 겨우 ‘힘 내.’라거나 ‘산다는 게 다 그런 거 아닐까.’ 그런 정도였다. 우리들의 위로라는 게 뭐 그런 정도였지 그 이상은 깊숙이 들어가지 못했다.

조강지처와 인생을 호락호락 살아내는 일도 힘들다는데 인생의 중도에서 만난 이를 아내로 받아들이는 데는 고단한 아픔이 필요할 테다. 그 일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의 장성한 두 자식은 서둘러 아버지 곁을 떠났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자식 둘을 내보내고 새 아내를 맞아 사는 김형의 심정은 또 어떠할까.



 “노래방에 가 애창곡 한 곡씩 뽑고 갑시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각에 박형이 일어섰다. 우리는 암말없이 박형을 따라나섰다. 거기를 가야만 오늘의 술자리가 끝날 것 같았다.

우리는 뚜벅뚜벅 근처에 있는 음습한 지하 노래방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자, 나는 노래방 선곡집에서 내가 부를 노래부터 찾았다. 그러는 중에 이미 채형이 한 곡을 뽑았고, 박형도 불렀다. 박수를 치던 김형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김형이 신청한 애창곡의 전주가 흘러나오고 마이크를 움켜쥔 김형이 노래를 불렀다.



 세월따라 걸어온 길 멀지는 않았어도

 돌아보는 자욱마다 사연도 많았다오.

 진달래꽃 피던 길에 첫사랑 불 태애웠고

 지난 여름 그 사랑에 궂은비 내렸다오.


노래를 부르는 김형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컴컴한 노래방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그의 눈가에 번지는 눈물을 보았다. 김형은 인생이 신산할 때마다 어쩌면 이 노래로 자신의 힘든 삶을 견뎌내며 살아왔을지 모른다. 노래가 끝나자, 우리는 표 나지 않게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 노래방을 빠져나와 뿔뿔이 어둠속으로 헤어졌다.



돌아오며 생각해 보니 김형이 부른 노래 가사들이 김형의 삶과 어딘지 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곡절 많은 삶이 노래에 얹혀 풀려나는 듯 내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술을 먹는 내내 아무 말도 않던 김형은 끝내 그런 방식으로 말로 할 수 없는 아픔을 우리에게 전하고 갔다. 그의 행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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