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가위와 은빛 알미늄 빗
권영상
이발소에 가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길 건너 아파트 상가에 이발소가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 이발사는 ‘어서 오세요’ 그 말도 소리내어 하지 못할 정도로 얌전했다. 면도를 해주는 여자분은 그의 아내였다. 그 무렵이 이발소가 사라져가던 때라 고객은 주로 학생들이거나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 같은 이들이 전부였다. 미용실에 들어설 자신이 없던 나는 머리칼 자라는 게 걱정이었다.
아파트 상가에 있던 이발소마저 문을 닫고 말았다.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미용실 문을 열었다. 그러나 미용실에 맛을 들이면서부터 미용실이 좋아졌다. 머리를 빠르게 커트해준다는 점이다. 이발소가 전형적인 머리형을 고집한다면 미용실은 곱상하고 참한 머리를 만들어주었다.
미용실을 들락인지 벌써 오래 됐다. 근데 요 며칠 전, 우연히 서울 근교 작은 소도시에서 이발소를 발견했다. 그때 나는 한겨울에 핀 들꽃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 발길을 멈추었다. 이발할 마음의 준비가 없었고, 또 이발할 때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 옛날의 미닫이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 긴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던 하얀 가운의 중년 이발사가 ‘어서 오세요’하며 일어섰다.
나는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이발소의 큼직한 옛날식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흰 가운을 입은 이발사에게 내 머리를 맡겼다. 그는 따스한 물수건으로 내 머리칼을 충분히 적신 뒤 가위와 빗을 들고 뒷머리부터 손을 댔다. 가위에 묻은 머리칼을 떼어내기 위해 가위로 빗등을 때리는 소리가 그만 정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때가 13살 때쯤이다.
그 무렵 나는 이발소가 아니라 담 너머 뒷집형님에게 머리를 맡겼다. 뒷집 형님에겐 이미 출가시킨 자식이 있었지만 내게는 형님뻘이었고, 친형들도 그분을 형님이라고 불렀으니 13살 나도 형님이라 불렀다. 뒷집형님 이발 솜씨는 남 못지 않았다.‘형님, 머리 깎으러 왔어요’ 하면 뒷집형님은 넓은 마당에 앉을개가 둥근 의자를 내어놓고 거기 앉게 하셨다. 이윽고 하얀 앞가리개 천을 내 앞에 가려주시고는 물었다.
‘어떤 머리를 해 줄까?’그 형님이 가지고 계신 아이들 머리 스타일은 두 가지였다. 빡빡머리와‘보통머리’인 상고머리. 보통머리를 깎아달라는 내 요구에 뒷집형님은 수동식 바리캉으로 밑머리를 밀고 난 뒤 가위와 빗으로 현란하게 머리를 치셨다. 빗은 은빛 알미늄 빗이었는데 형님은 머리칼이 붙는 가위와 알미늄 빗을 번갈아 두드리셨다. 그때 그 두 금속이 부딪는 소리와 리듬은 지금도 내 기억 저편에 아련히 남아있다.
가위질이 다 끝나면 붓으로 비누곽에 거품을 북적북적 내어 밑머리를 쪽 따라가면서 거품칠을 하셨다. 거품이 배어드는 동안 가죽허리띠에 면도날을 슥슥슥 세워서는 사각사각 머리밑 면도를 하셨다. 이발비는 가을에 아버지가 한 번에 몰아 갚으셨다. 뒷집형님에게 머리를 맡기던 일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이미용법으로 파출소를 들락이시던 뒷집형님은 끝내 그 일을 접으셨다.
그 후, 나는 이미용 면허를 가진 이발소를 드나들었지만 뒷집 형님의 가위와 빗이 현란하게 만들어내는 커트 실력은 보지 못했다. 서울 근교 소도시의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를 들으려니 그 옛날의 뒷집형님이 생각난다. 도시에서 이발소가 사라져간다. 가위와 빗이 부딪히는 소리마저 사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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