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처럼 매운 동시가 좋다
권영상
동시라는 음식을 잘 만드는 일은 어렵다. 공은 공대로 들여 보지만 그 맛은 늘 별로다. 실제로 계절마다 발표되는 수많은 동시를 읽어보면 그 어려움을 안다. 동시를 떡볶이 만들 듯 만들 수는 없을까. 떡볶이 싫어하는 사람 없다. 식성 까다로운 이를 빼면 누구나 다 좋아한다. 떡볶이 먹을 땐 말도 필요 없다. 입으로 불고, 혀끝으로 까불어대며 맛있다! 맛있다 하면 된다. 아무리 땀나고 더워도 매운맛을 놓칠 수 없다. 매울수록 혀가 좋아한다. 혀는 자꾸만 짜릿한 걸 원한다. 혀는 자신을 학대하듯 매운 미각을 즐기며 그 매운 맛에 집중한다.
다 비워버린 접시를 보면 한바탕 큰일을 치르고 난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진다. 정말 암만 먹어도 물리지 않는 게 떡볶이다. 가끔 동네 국대떡볶이에 들러 떡볶이 한 접시를 먹을 때면 생각나는 게 있다. 나도 떡볶이처럼 매운 동시 좀 잘 쓸 수 없을까?
떡볶이는 재료비가 많이 드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재료도 간단하고, 요리법도 간단하다. 몇 가지 안 되는 재료를 넣고 불로 가열하면 끝이다. 그런데 비해 동시는 조리 시간도 길고, 요리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그야말로 공은 공대로 들이지만 혀끝을 까불대며 호호 불어대며 맛있게 먹어주는 이가 별로 없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매운 것을 좋아한다. 난초 향기도 매운 향기일수록 더 값지고, 고결함도 매운 고결함이 더 숭고하다. 손맛도 매운 손맛이, 이별도 매운 이별일수록 품격 있다. 동시도 그럴 게 뻔하다. 오감을 지독히 자극하는 매운 동시가 좋다. 그래서 매운 떡볶이처럼 임팩트((impact)한 동시를 선호한다.
1. 별을 보는 법
캐나다 사는/ 도로시는 거미가 무섭고/ 시리아 사는/ 다랄은 총소리가 무섭고/ 진수는/ 괴물이 무섭다// 요르단 사는/ 자스민은 시리아로 돌아가 할머니를 만나는 게 꿈이고/ 뉴질랜드 사는/ 로키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게 꿈이고/ 희주는/ 가수가 되는 게 꿈이다// 도로시 다랄 진수/ 자스민 로키 희주/ 모두/ 아홉 살이다.
-강기화의 ‘두려움과 꿈 보고서’ 전문 <동시마중> 2017년 5,6월호
우간다에서 온/ 아밀라의 피부는/ 어두운 초콜릿 빛깔.// 하지만 몸처럼/ 마음도 어두운 건 아냐.// 웃을 땐 입속에서/ 새하얀 이가/ 반짝!// 말할 땐 덩달아/ 마알간 눈동자도/ 반짝!// 반짝반짝!// 얼굴에서/ 별이 돋지.
-문성란의 ‘얼굴별’ 전문 <열린아동문학> 2017년 여름호
두 작품 모두 세계성을 띤다. 캐나다가 나오고 우간다가 나온대서 세계성을 띤다는 말이 아니라 인류 보편적 가치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두 작품 모두 생명체가 처한 환경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존재성은 어떻게 빚어지는가에 대한 질문과 해답에 집중한다.
강기화의 ‘두려움과 꿈 보고서’는 보고서답게 팩트를 제시하면서 독자들에게 이 진술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를 해독하게 한다. 똑 같은 아홉 살 나이의 두려움과 꿈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거미책에 열광하는 캐나다 도로시에겐 거미가 무섭고, 내전이 일상인 시리아의 다랄에겐 총소리가 무섭다. 현실이 일그러지고 왜곡된 우리나라의 진수는 당연히 괴물이 무섭다.
자스민의 꿈도 이해가 가고, 로키의 꿈도 이해가 간다. 근데 시인은 희주의 꿈을 통해 뭔가 비정상적인 우리 현실을 꼬집는데 이게 이 시의 핵심이다. 세계 무역 10위권 국가니 3만 불 진입이니 어쩌니 하는 우리나라에 사는 진수의 꿈은 왜 고작 가수일까. 우리나라 청소년 대다수의 꿈이 연예인이라는 사실에 봉착한다면 이건 심각하다. 아이들을 짓누르는 기형적인 괴물이 우리 사회에 존재함을 은밀히 암시하고 있다. 한때 우리 청소년들의 꿈은 ‘대학 가는 거’였다. 그리고 지금은 ‘가수’다.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쏠림 현상을 ‘보고’ 한다.
문성란의 시 ‘얼굴별’이 추구하는 것은 인류는 피부색과 상관없이 평등하다는 가치다. 이것은 동시에 인류 보편적 가치이기도 하다. 우간다에서 온 아밀라의 피부는 초콜릿 빛이지만 그에겐 흰색 피부인들이 갖지 못한 새하얀 이와 마알간 눈동자를 가졌다. 아밀라가 그런 까닭은 아밀라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 때문이다. 그들은 검은 대륙에서 살아내느라 내면 깊숙이 맑고 순수한 영혼을 별처럼 키워왔다. 아밀라의 얼굴에서 별을 볼 줄 아는 시인의 특별한 감수성이 아름답다. 시가 쉽고, 군더더기 없고, 이미지의 균형감이 돋보이고, 산뜻하다. 우리가 늘 만나는,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다인종의 문제를 품격 있는 동시로 잘 승화시키고 있다.
2. 도시로 간 아이들
참, 외롭겠다/ 산 아래 초등학교가 폐교된 지 오래/ 밤에는 뻐꾸기가 울고/ 새벽에는 산비둘기만 운다/ 비가 오면 오솔길// 훔뻑 운다
-김수복의 ‘오솔길’ 전문 <어린이책 이야기> 2017년 여름호
4층, 영어 학원 버튼을 눌렀는데/ 스피커에서/ 6층, 이란다.// 4층, 밖에 없는 건물인데/ 6층, 이라니……. // 학원 건물/ 오르락내리락하던/ 엘리베이터도 나처럼 신물이 났겠지.// 학원 말고/ 어디론가/ 딴 데로 가고 싶었겠지.
-김현욱의 ‘고장 난 엘리베이터’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7년 8월호
위의 두 편의 시는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 현실의 단면을 씁쓸하게 보여준다.
김수복의 ‘오솔길’에 나오는 초등학교의 배경은 산 아래다. 학교 주위엔 밤이면 뻐꾸기가 울고, 새벽이면 산비둘기가 운다. 비 오면 오솔길은 비에 ‘훔뻑’ 젖는다. 학교는 생물학적 자연환경과 공존한다. 그들 소재의 배열은 김현욱의 시와 달리 수평적이며 평등한 관계다.
아이들은 새 우는 소리를 들으며 바뀌어가는 계절을 느끼고, 정서적 안정감을 얻고, 비 오는 오솔길을 걸으며 자신의 삶을 우주와 연계시켜 본다. 이런 사유의 경험이야말로 자연스러운 또 하나의 학습이다. 교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학습과 교실 밖에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이상적인 교육의 장이 ‘산 아래 초등학교’다. 근데 그 학교가 문을 닫았다. 학교는 지금 참, 외롭다. 외로운 학교를 두고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도시로 도시로 이주했다.
김현욱의 ‘고장 난 엘리베이터’의 배경은 도시다. 도시로 온 아이들은 행복한가. 그들은 학교가 아닌 학원에 주력한다. 학원은 ‘산 아래 학교’와 달리 도심의 빌딩 4층에 있다. ‘산 아래 학교’가 수평적 환경이라면 학원은 수직적 환경에 놓여 있다. 더 이상 탈출구가 없는 마지막 층 4층이다. 내용으로 보아 아이들은 누군가의 강요로 다니기 싫은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다. 빌딩 안에서도 학습의욕은 없고 밖에서도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을 만큼 학습의욕이 없는 인위적인 환경에 시달린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를 보며 화자는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부에 ‘신물’을 낸다. 이것이 표류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초등학교 현주소다.
3. 산 말과 죽은 말
가게 가서 오이 사와라/ 우리 아들 착하지/ 씻고 얼른 숙제해라/ 우리 아들 착하지/ 반찬 투정도 안 하고 잘 먹네/ 우리 아들 착하지/ 빨랑 불 끄고 자라/ 우리 아들 착하지/......나는 우리 아들 착하지/ 이 말이 귀신 소리 같다......./ 으으으으으으 ~
-김창완의 ‘귀신소리’ 전문 <동시마중> 2017년 7,8월호
송암 할배가 하늘엔 수제비도 많다고 해 쳐다보니/ 양떼구름만 가득 떠 있다// 양떼구름이라고 고쳐 말해주었는데도/ 귀 어두운 할배는 오늘 또, 수제비라고 말한다// 다음에는 내가 먼저 큰 소리로/ 하늘엔 수제비도 많다고 또박또박 말해주어야겠다
-장동이의 ‘수제비구름’ 전문 <동시마중> 2017년 5,6월호
화자와 청자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말이 있다. 상대에게 용기를, 짜릿한 감흥을, 질주 본능을. 창조적 충동을 자극하는 말이다. 이들 말이 산 말이라면 죽은 말 중에는 관용어도 있다.
김창환의 시 ‘귀신소리’에는 관용어가 있다. 엄마는 아들에게 끝없이 지시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 아들 착하지’를 남발한다. 그 말은 청자인 나를 ‘우리 아들 착하지’로 만들어 버렸고, 끝내 소름 끼치는 ‘귀신 소리’가 되고 말았다. ‘우리 아들 착하지’란 말은 ‘고분고분 말 좀 잘 들으라’는 단조로운 표현을 좀더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지만 그 약효가 다한 죽은 말이다.
착하다고 말해주면 뭐든 다 통할 것 같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 말이 나에게 ‘귀신소리’로 들리는 까닭은 관용어가 갖는 메커니즘 때문이다. 화자가 무력감에 빠진 닳고 닳은 관용어를 쓰면 이 말을 듣는 청자마저 무력감에 빠지고 만다. 이런 메커니즘에 지친 나는 엄마의 말을 ‘귀신 소리’에 빗댄다. 보통 아이들이라면 ‘엄마가 다 날 위해서’ 하는 말이겠지, ‘엄마니까’ 하는 방식으로 긍정적으로 수용할 말을 이 시의 ‘나’는 아니다. 엄마가 엄마라고 당연히 누리는 권위를 ‘귀신 소리’라며 한방에 부정한다. 이 점이 이 시가 갖는 매운 용기다.
장동이의 ‘수제비구름’에도 두 대조되는 산 말과 죽은 말이 있다. 그것은 ‘나’의 윗세대인 송암할배와 아랫세대인 ‘나’가 쓰는 ‘수제비구름’과 ‘양떼구름’의 다른 점이다. 이 두 세대 갈등의 중심재료는 표준말이다. 표준말을 익히지 못한 윗세대에게 있어 양떼구름은 죽은 말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양떼에 대한 애환이나 애증의 경험이 없다. 양은 우리의 전통 농경문화와는 거리가 멀며 그런 이유로 양떼에 대한 시각적 경험마저 없다. 오히려 그들 세대에겐 구름 이미지를 수제비로부터 빌려오는 게 더 효과적이고 친근하다는 점에서 수제비구름은 살아있는 말이다. 시 전반부의 두 세대 간의 서로 다른 갈등의 소재가 시를 흥미롭게 만들었으나 그 갈등양상의 전개과정 없이 ‘내’가 수제비구름 쪽으로 선회한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4. 타인을 배려하는 일
국밥집 할머니가/ 밥과 고기가 든 뚝배기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가 따랐다가/ 부었다가 따랐다가// 예닐곱 번/ 그렇게// 부었다가 따랐다가/ 부었다가 따랐다가........// 국밥이/ 이팝꽃처럼/ 환하게 되살아났습니다.// 아무도/ 입 데지 않는/ 따뜻한 국밥이 되었습니다.
-김현욱의 ‘토렴’ 전문 <동시마중> 2017년 7,8월호
귀는 없고/ 입도 없고/ 눈만 있는/ 쌀은/ 배고픈 사람 보면/ 그냥 못 지나치고 밥이 된다.
-박혜선의 ‘쌀눈’ 전문 <동시마중> 2017년 7,8월호
위의 두 시 모두 밥이 중심 소재이다. 밥은 예사의 소재이면서 어떤 면에서 작품화가 쉽다는 특징도 있다. 그것은 밥이 갖는 우리만의 각별한 비중 때문이다.
김현욱의 시 ‘토렴’을 보자. 우선 토렴의 사전적 의미는 식힌 밥이나 식힌 국수 따위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여 먹기 좋게 따뜻이 덥히는 일이다. 토렴을 하는 대표적 음식이 국밥이다. 손님상에 국밥을 내가기 위해 국밥집 할머니는 미리 담아놓은 밥그릇에 뜨거운 국물로 토렴을 한다. 예닐곱 번.
‘부었다가 따랐다가’ 하는 이 반복 행위 속에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은 너그러이 스며들고, 그것은 마침내 김현욱이 말하는 이팝나무 꽃으로 환하게 되살아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밥을 내놓는다면 손님은 그 밥으로 하루를 든든히 견뎌내고도 남겠다. 4연은 이 시의 절정이며 미학이 극도로 고조된 부분이다. 시를 깎고 다듬고 형상화해내는 시인의 매운 능력이 돋보인다. 타자에 대한 배려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속을 든든히 채워주고자 하는 데에 그 미덕이 있다.
박혜선의 ‘쌀눈’은 짧은 시다. 그렇지만 그 속엔 짧은 것 이상의 인간을 공경하는 깊은 미덕이 있다. 시인은 한 톨의 작은 쌀 알갱이에서 하필이면 쌀눈을 본다. 그가 쌀에서 쌀눈을 보는 까닭은 쌀눈도 배고픈 사람을 본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의 쌀눈은 쌀의 씨눈이지만 여기에서는 동음이의어인 세상을 바라보는 감각기관인 눈이다. 쌀눈은 오랫동안 사람을 먹여살려온 직무가 있어 배고픈 이를 보면 참을 수 없어 끝내 자신을 버리고 밥이 된다.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려하는가? 이 문제는 시인정신과 맞닿아있다. 시인정신이 곧 문학관이며 시를 옳게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시인의 다른 두 시가 인용되기도 하고, 좋은 시임에도 짝을 맞추기 어려워 인용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작품 완성도가 미흡함에도 인용된 경우가 있다. 인용되지 못한 많은 시들 역시 약간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메시지 전달력이 약하다는 점과 떡볶이처럼 매운 임팩트가 절실하다는 점이다.
<아동문학평론>2017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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