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방희 시조집 <꽃에 집중하다>
권영상
올 2월의 어느 날. 아침부터 봄눈이 무덕무덕 내렸다. 그 무렵 나는 3호선 신사역에서 내렸다. 우산에 내리는 눈이 무거워 몇 번이나 우산 잡은 손을 바꾸어 가며 길을 걸었다. 그날 시조 아카데미 <유심>에 초대되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박방희 시인을 만났다. 알고 보니 박시인은 거기 <유심>을 통해 시조를 쓰고 있었다.
그날, 거기서 만나 나중에 헤어질 적에 박시인이 내게 시집 한권을 주고는 경부선 열차를 타야한다면서 부랴부랴 나갔다. 나는 함박눈을 맞으며 거기서 우리집까지 전철로 다섯 역을 걸었다.
그리고 눈이 그치고, 비가 오고, 더운 폭염이 오고 가고, 9월의 해가 뜨는 요 며칠 전이다. 책더미를 정리하던 중에 잊고 지내던 박방희 시인의 시집을 다시 만났다. 시집인가 했더니 <꽃에 집중하다>는 시조집이다. 손을 놓을 수 없을 만큼 시조가 실하고 굵직하다. 옆에서 슬쩍슬쩍 바라본 그의 모습처럼 시인의 시도 대범했다.
시가 너무 감성에 치중하면 사람 마음을 혹해버리는 죄를 저지른다. 감성보다는 시인의 큼직한 세계를 엿보는 일 또한 재미 중의 재미다. 무쇠 소가 무쇠 풀을 우적우적 뜯어먹는 우직한 풍경을 바라보는 일만큼 즐거운 독서가 어디 있을까.
어느 날 인터넷에 내 이름을 검색하니
간밤에 무슨 성도 돌아가시다, 가 뜨고
모르는 여러 사람들이 명복을 빌고 있다.
그것 참 나 모르게 내가 죽어 추모되다니
나 말고 또 어떤 이가 내 이름을 썼겠지.
뜻밖에 듣는 부음에 내가 내 명복을 빈다.
박시인의 ‘어느 날 죽다’이다.
마치 서포의 소설 <구운몽>을 읽는 듯 아찔하다. 성진이 팔선녀를 희롱한 죄로 인간 세상에 귀양을 가는 날, 사자가 이끄는 대로 구름을 타고 아랫세상을 향하던 중에 저기 아래 한 초가를 내려다 본다. 그 집 마당에 할머니의 순산을 돕는 탕약을 다리는 할아버지가 있다. 집 밖에선 마을 사람들이 수군댄다. 세상에도! 예순 먹은 할머니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다니!
그 풍경을 내려다보던 사자가 성진이를 재촉한다. 네가 그 할머니의 무남독녀로 태어날 아들이라 하며 산통을 하는 할머니 뱃속으로 성진을 데리고 들어간다.
이 광경이야말로 성진이 장차 자신이 탄생할 상황을 들여다보는 모습이다. 어쩐지 그게 마치 죽은 내게 조문을 온 이들을 내려다보는 이 시와 너무나 흡사하다. 우리가 어느 날 부재한 뒤의 풍경이 저러하지 않을까. 낯모르는 아내의 친구들이, 아들의 동료들이 나의 명복을 빌어주러 오고, 그걸 내려다보는 나조차 험난한 인생을 살다간 내가 가여워 나를 위해 명복을 빌어주는.
우리는 날마다 죽는다. 날마다 발 아래 심연의 굴헝 앞에서 절망하면서도 아침이면 운 좋게 눈을 뜬다. 그러나 날마다 눈을 뜬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사는 이승이란 그런 곳이다. 나 모르게 내가 오고, 나 모르게 내가 가는 쓸쓸한 곳이다.
시 속의 나하고 ‘이름만 같은’ 그는 누구일까. 타인일까 아니면 슬픈 나일까. 시인은 나 몰래 떠나가는 나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날마다 명복을 비는 연습을 한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듯 시인은 그런 연습을 좀체 두려워하지 않는다.
뱃속에 있던 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다
더 넓어진 놀이터에서 아이도 부쩍 자라
마당은 해와 바람이 통하는 또 다른 자궁
작은 집 속에서 큰 집으로 나온 아이
어미랑 숨바꼭질하며 까르르 웃는데
여자는 제 안의 아이를 바깥에서 찾는다.
‘뱃속 아이를 마당에서 찾다’라는 연작시조다.
사람은 영겁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이승과 저승과 내세라는 자리를 옮겨가며 산다. 그렇게 보는 것이 불교적 윤회다. 뱃속에 있던 아이가 마당에서 논다는 말도 그러하다. 자리가 바뀌었을 뿐이다. 이 이승에서도 우리는 머물던 자리를 떠나고 맞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크게 보면 그게 고통도 슬픔도 아닌 윤회 안에서 자리를 옮겨 이동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내 불행이란 것이 어찌보면 보다 크고, 너그럽고,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한 노정에 놓인 한 순간의 행불행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요만한 일상을 산다고 불평하지만 작은 집(자궁)이 큰 집(번뇌의 세상)보다 못 한 것도 아니고, 한 생각 비켜나면 불평이거나 행복이랄 것도 없는 것에 우리는 놓여있다. 그런데도 사람이란 것은 너남없이 그 본연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남엣것과 비교하거나, 비교의 결과물을 놓고 스스로 고통에 빠진다. 제 안의 본디 소중한 자아(아이)는 보지 못하고, 세속의 잣대로 재어놓은 통속의 눈으로 자신을 본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그 방향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자리를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몸보다, 이파리보다, 꽃에 집중하는 나무
거멓게 말라터진 몸뚱이는
내버려두고
오로지 꽃 피우는 데만 몰입하는 벚나무
푸른 잎
생략하고
치장도
생략하고
꽃에만 전념한 선택과 집중으로
수만 개, 망울을 맺고, 보듬어 키우다가
팡팡팡 펑펑펑
절정에서 터트린
저 함성, 저 폭발
저 만개, 저 아수라,
마침내 두둥실 떠오른
눈부신 극락 한 채!
‘꽃에 집중하다’는 이 시조집의 표제시다.
극락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닌 이승에 있는데, 그걸 어떻게 만들어내느냐는 전적으로 내 손에 달렸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의 극락을 내 손으로 만들려하지 않는다. 먼저 간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극락 속에 끼어들고자 한다. 그 점에서 괜찮은 내세를 찾는 사람들은 안일한 존재들이다. <천로역정>이 말하는 천국이나 불교가 말하는 극락은 모두 이렇다. 거기엔 꽃이 만발해 있고, 절대자가 있고, 그는 그를 따르는 선량한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그들과 함께 좋은 날마다 산책하고, 이야기하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그래서 고통도 배고픔도 없는 세월을 보내는 곳이 그곳이다.
당신이라면 그곳에 가겠는가. <모모>를 쓴 미하엘 엔데는 그런 곳이 내가 갈 곳이라면 나는 안 가겠다. 천국과 지옥 말고 내가 갈 곳은 없는가? 엔데는 그렇게 천국의 문을 가로막고 선 자에게 물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극락도 천국도 내 안에 내가 만드는 1인 공화국이다. 그걸 만드는 법을 이 시는 알려주고 있다. 오로지 한 가지 일에 몰입하라고. 줄기와 잎과 꽃을 한 날 한 시에 다 갖는 벚나무가 없듯 그 모든 걸 다 가지려 하고서는 천국에도 극락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그 점에서 나의 천국과 너의 천국은 다르다. 일군의 무리가 모여사는, 일군의 무리가 모두 행복한 천국이란 없다. 그건 천국이 아니라 또 다른 속세이거나 고통없는 연옥일 뿐이다.
저 함성, 저 폭발/ 저 만개, 저 아수라.// 마침내 두둥실 떠오른/ 눈부신 극락 한 채!
박방희 시인의 극락은 이렇다. 꽃 하나에 진중히 몰입한 끝에 마침내 극락을 얻는다.
그러나 극락이라는 것은 내 마음 안에 있기 때문에 지었다가 또 허물었다가를 반복한다. 오늘은 즐겁다가 내일은 그 즐거움을 이어가지 못해 슬퍼한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우연히 어찌어찌 하여 다시 극락을 짓고, 그것을 금이야 옥이야 달래어 데리고 살다가 내 욱하는 성미 때문에 놓치고, 후회하고.
그게 인생인 걸 보면 극락인 것도 없고 아닌 것도 없다는 말이 옳다. 타인이 보기엔 나의 삶이 분명 극락인데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하여 괴로워한다. 오직 깨우침이 있을 뿐이다.
박방희 시인의 극락을 오늘 하루 잠깐 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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