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 내가 말한다>
사유의 자유로움
권영상
나팔꽃이
기어코
처마 끝까지 올라갔다.
낮달에
매달릴 모양이다.
손을 뻗쳐올리는 것 좀 보아.
아니,
그 손을 잡으려고
기우뚱하는 낮달을 좀 보아.
동시집 <나만 몰랐네>(문학과 지성사)는 지난해에 출판되었다. 그 이전에 출판된 <잘 커다오, 꽝꽝나무야>(문학동네), <엄마와 털실뭉치>(문학과 지성사), <아, 너였구나>(국민서관) 등은 비교적 무거운 느낌이 드는 동시들이다.
동시를 쓸 때마다 염려하는 게 있다. 동시가 너무 가볍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동시는 어린이를 주된 독자로 하지만 어른에게도 쉽게 읽혀지는 시다. 그때 어른들에게 ‘그래, 이게 동심의 시구나!’ 하는 감동을 안겨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욕심 때문인지 모른다. 내 동시가 조금 무거웠던 게 사실이다.
<나만 몰랐네>는 거기서 벗어나려 애썼다. 눈 딱 감고 가볍게 쓰기로 작정했었다. 가벼우면 뭐 어떻고, 가벼워 하늘로 날아올라 영영 사라지고 만단들 뭐 어떨까 하는 배짱이 있었다.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종이컵, 그런 역할을 내 동시에게 맡겼다.
위의 동시는 그 동시집에 실린 ‘나팔꽃’이다. 시를 무겁게 하려는 귀신이 그래도 조금 달라붙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조금만이라도 시적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그다지 어려운 동시는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웅덩이물에 사는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어 먼 개울로, 또는 그가 살던 세계와 전혀 다른 뭍으로 뛰어오르듯 사람도 그와 다를 게 없다. 인용한 시 속 나팔꽃은 안 그럴까. 나팔꽃에게도 위로 위로 자꾸만 기어오르려는 본능이 있다. 그걸 보면 그도 우주의 다른 세계와 만나고 싶어할 게 분명하다.
나팔꽃이 처마 끝에서 발견한 건 저 하늘 높이 걸려있는 낮달이다. 그를 향해 나팔꽃이 길게 손을 뻗쳐올린다. 그 손을 잡아주기 위해 낮달이 지구 쪽으로 기우뚱한다. 나는 그 장면에서 시를 멈추었다.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이, 한 행성과 또 다른 한 행성이, 한 세계와 또 다른 한 세계가 서로 손을 내밀어 잡으려는 그 순간, 그 관계 맺음의 순간을 잔상처럼 오래오래 남기고 싶었다.
나비들이
소 발자국에 고인
빗물에 모인다.
나비 날아간 뒤에 가 보니
거기 하늘이 있다,
파란.
그쪽 나라로 가는
창문인 줄 알았나 보다.
‘창문’이다. 내 머릿속엔 이쪽의 세계가 있고, 또 하나 저쪽의 세계가 있다. 그 두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통로는 어딘지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나비의 옷을 입고 그 세계로 넘어가려는 시도를 해본다. 그 통로가 하필 하늘에서 내린 빗물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무렵, 나는 아직 한번도 가보지 않은 저쪽의 세계가 궁금했다. 저쪽의 이념과 저쪽의 사상과 저쪽의 계절과 저쪽의 도덕, 저쪽의 인류와 저쪽의 사랑......
이쪽과 저쪽을 두루 자유로이 넘나드는 사유의 자유를 나는 꿈꾼다. 그때가 되면 나의 동시는 더욱 가벼워질 테고, 소통 또한 쉬워지겠지, 한다.
<강원아동문학>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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