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함께 그려낸 빛과 그림자의 무늬
권영상
코딱지를 돌돌돌 말아서.
꼭꼭꼭 눌러서. 빈대떡처럼 납작납작 눌러서. 그래선 강아지 밥그릇에 뚝뚝뚝 수제비처럼 뜯어 넣었어. 그랬더니 강아지가 밥을 먹다 말고 그러잖겠니.
-오늘은 밥이 짭짤한데. 왠지 간이 맞어.
이 이야기 동시는 내 10번째 동시집 <신발코 안에는 새앙쥐가 산다>(문원, 1999)에 실려 있는 ‘나만 모르게’이다. 어린이들이 참 재미나게 읽은 동시다. 이 동시집엔 이야기 동시 63편이 실려 있다. 이 동시집을 내고 나는 많은 어린이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주로 그들이 내게 들려준 찬사는 ‘근데 왜 이렇게 재미난 동시를 쓰셨어요?’였다. 때로는 엄마 손을 잡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찾아온 어린이들도 있었다.
아동문학 강의들 듣는 대학생도 여럿 찾아왔었다. 어린이들과 달리 이미 어른이 된 그들의 질문은 달랐다. 동시는 어린이들이 읽는 시이니까 행과 연이 있어야 하고, 주제를 음미할 수 있는 의미가 있어야 하고, 교육성도 고려해야 하는 건데 동시가 이래도 되느냐는 거였다. 동시에 대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의 동시들은 대개 지나치게 의미추구에 전념하느라 독자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동화는 약진하는데 동시는 장르 자체의 존립이 불안했다. 1996년, 한 달간의 인도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달라졌다, 그럴 듯한 말로 그럴 듯하게 점잔을 빼는 동시를 버렸다. 동시에 나를 지배해온 동시에 대한 고정관념도 버렸다.
떨어진 감잎에 강아지가 똥을 눈다. 감잎이 그 순간 두 눈을 꼭 감고 온몸을 옹크린다. 콩, 강아지 똥이 떨어진다. 강아지 똥에서 찡, 흩어지는 냄새. 강아지가 침을 뱉듯 쨀끔 오줌을 눈다. 바람이 강아지와 함께 코를 막고 저만큼 달아난다. 그 사이 감잎이 강아지 똥을 받아 돌돌돌 감싸 안는다. 오, 귀한 것! 하고.
역시 같은 동시집에 실린 동시 ‘감잎은 정말 착해’이다.
동시가 일회용 반창고쯤이면 안 될까, 가지고 놀다가 버리는 장난감쯤이면 안 될까. 별 영양가는 없어도 껌처럼 달콤하고 가벼우면 안 될까. 배꼽 잡고 한번 웃어볼 정도면 안 될까. 그런 질문 끝에 만든 동시집이 고정관념을 벗어던진 <신발코 안에는 새앙쥐가 산다>이다. 근데 의외로 어린이들이 좋아했다. 두 편 모두 교사용지도서에 실렸고, 같은 해에 출간된 <월화수목금토일별요일>(재미마주)의 ‘그애 앞에 서면’은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밥상을 들고 나간 자리에
밥풀 하나가 오도마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바깥을 나가려든 참에 다시 되돌아보아도
밥풀은 흰 성자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
바쁜 발걸음 아래에서도 발길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밟히면 그 순간 으깨어지고 마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도 없이
이 아침, 분주한 방바닥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이 어린 성자의 얼굴로.
이 동시는 1991년에 출간된 6번째 동시집 <밥풀>(동화문학사)의 표제시다. 이해인 수녀님이 중앙일보 ‘나를 흔든 시 한 줄’에, 또한 그분 저서 <기쁨이 열리는 창>(마음산책)에 소개하면서 알려진 동시다.
이 시에는 언제 밟힐지 모르는 약자인 밥풀과 언제 밟을지를 예고하지 않는 강자인 발의 대결구도가 있다. ‘발’은 군부와 연계된 권력자들이다. 군부독재 시절 나는 퇴근을 하면 남대문로나 세종로에 나가 매일같이 시위 대열에 끼어들었다. 직장에선 ‘데모꾼’ 소리를 들었다. 길고 긴 시위는 명동성당 옆 중앙극장 골목 계단에 은신해 밤을 새운 이튿날, 대통령 직선제 선언으로 끝이 났다.
그 무렵 내 고민은 억압받는 약자들의 삶을 어떻게 동시라는 그릇 속에 담아낼 수 있을까, 그것이었다. 동시집 <밥풀>의 부제는 ‘작은 것을 아끼는 시집’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약자들을 나는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물들에 비유했다. 동시집의 중심 제재들인 길바닥에 떨어져 밟히는 단추, 구겨진 종잇조각, 몽당연필, 아무렇게나 쓰여진 낙서, 밥풀, 깃털, 하루살이, 성냥개비, 목장갑, 개미, 말뚝 등이 그들이다.
담요 한 장 속에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누웠다.
한참 만에 아버지가 꿈쩍이며 뒤척이신다.
혼자 잠드는 게 미안해 나도 꼼지락 돌아눕는다.
밤이 깊어 가는데 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
내 발을 덮어주시고 다시 조용히 누우신다.
그냥 누워 있는 게 뭣해 나는 다리를 오므렸다.
아버지 ―
하고 부르고 싶었다.
그 순간
자냐? 하는 아버지의 쉰 듯 한 목소리
― 네.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역시 같은 동시집 <밥풀>에 수록된 ‘담요 한 장 속에’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이불 속에서 나란히 누워 잠을 자고 있다. 한밤중 눈을 뜬 아버지는 이불을 내차고 자는 아들의 발을 덮어준다. 잠을 자던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기척에 잠에서 깬다. 아버지의 따스한 부정에 꼼지락 돌아눕거나 다리를 오므리거나 하는 방식으로 고마움을 표하면서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권위로 상대를 지배하고 굴종을 강요하던 사회가 그 무렵의 우리 사회였다. 그러나 내가 꿈꾸던 이상은 서로 잠자리를 보살펴 주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기를 바랐다.
구방아, 목욕 가자.
아빠는 뭐가 무섭다고
혼자 가도 될 목욕탕을
꼭 나랑 같이 가자 하시지요.
구방아, 산에 가자.
아빠는 뭐가 무섭다고
만날 가는 산을
꼭 나랑 같이 가자 하시지요.
넌 이거도 못하냐,
그러며 날 놀리는 아빠는
어디 갈 때면
꼭 나를 앞세우려 하시지요.
구방아, 이모네 가자.
이것 좀 봐요.
사계절출판사에서 2009년에 나온 <구방아, 목욕 가자>의 표제시다. ‘아버지’가 ‘아빠’로 변한 걸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암만 살가운 부정을 보여준다고 해도 역시 아버지는 아버지가 갖는 권위자로 남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좁히기 어렵다.
이 시 속의 구방이와 아빠는 그 이전의 부자관계와 사뭇 다르다. 아버지의 권위나 체통, 위엄을 다 내려놓고 있다. 목욕탕에 갈 때도, 산에 갈 때도 같이 가자고 한다. 아니 길 건너 이모네 갈 때에도 혼자 못 가고 나랑 같이 가자 한다.
아빠는 아들 구방이의 명실상부한 친구가 되었다. 그 친숙미를 살리려 이름도 거꾸로 읽으면 ‘방구’인 구방이다.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았던 국가부도 위기 사태는 1997년에 일어났다. 기업이 연쇄 도산되고,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고, 가계가 휘청거리더니 끝내 그 폭풍이 가정으로 몰아쳤다. 이혼이 급증하면서 가정은 파산되고 어린 자녀들은 길거리로 내몰렸다.
무너지는 가정을 지키자는 심정으로 출간한 동시집이 <구방아, 목욕가자>이다. 구방이를 중심인물로 하는 가족 구성원들 간의 탄탄한 연대의식과 사랑을 중심 테마로 삼았다. 동화로 읽는 동시집을 만든 셈이다.
언젠가는 나도
늠름한 줄무늬 개구리가 되겠지.
지금은 볼품없는 꽁지로
숨죽여 사는 올챙이지만
언젠가는 나도 굵고 큼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겠지.
지금은 좁은 물웅덩이에 갇혀 사는
어린 올챙이지만
언젠가는 나도
더 큰 세상으로 껑충 뛰어오르는
늠름한 줄무늬 개구리가 되겠지.
이 역시 <구방아, 목욕가자>에 실린 ‘언젠가는 나도’이다. 5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지금은 비록 볼품없는 꼬리를 달고 사는 올챙이지만 언젠가는 좁은 물웅덩이를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꿈을 심어주는 동시다.
비록 엄마 아빠와 헤어져 살지만, 비록 외로워 숨죽이고 살지만 언젠가는 늠름한 줄무늬 개구리가 되어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로 개굴개굴 울 수 있는 그때를 꿈꾸는 노래.
이 시에서 놓쳐서는 안 될 말이 ‘껑충’이다. ‘껑충’이란 헤엄쳐 다니는 올챙이로선 감히 넘볼 수 없는 비약이다. 하지만 한 생명이 넓은 세상으로 비약하는 데엔 자신이 의지하고 살았던 꽁지를 버릴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껑충’이 가능해진다.
호박 구덩이에
뒷거름 넣고
호박씨를 묻었다.
참 얼마나 기막힌 일인지
그 냄새나는 구덩이에서
푸른 깃발을
찾아 들고 나왔다.
2012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동시집 <엄마와 털실뭉치>가 나왔다. <엄마와 털실뭉치>는 기획예산부가 후원하는 ‘우수도서’로 선정 되었다. 이 동시는 거기 앞부분에 실려 있는 ‘호박씨’다. 앞의 동시 ‘언젠가는 나도’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가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어 좁은 웅덩이를 벗어나는 거라면 ‘호박씨’는 뒷거름을 넣은 냄새나는 구덩이에서 호박씨가 푸른 깃발을 찾아들고 나온다는 노래다. 두 시 모두 비약과 도약을 노래한다. 인내와 먼 미래에 대한 꿈을 노래한다.
마른 땅을 헤치고 솟는 씨앗의 힘이란 도전적이며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씨앗이 품고 있는 잃지 않으려는 꿈 때문이다. 부모가 아닌 타인의 손에 의해 지금은 힘겹게 산다 해도 내부에 꿈이 있다면 언제든 키워올릴 수 있다는 시이다.
이 땅에 태어난 씨앗이라면 크거나 작거나, 튼실하거나 미약하거나, 좋은 땅에 묻히거나 박토에 묻히거나 그들은 그들의 꿈을 기어코 이루리라는 믿음이 내게 있다.
아주 옛날, 여우는
숲에서 태어나 마을을 오가며
부지런히 살았다.
그간 자식도 여럿 두었다.
벵골여우, 검은여우, 모래여우, 은여우, 삼손여우, 티베트여우……
그러면서도
제 임무를 충실히 다 했다.
그 결과 여우는
이 땅에 이런 말을 남겼다.
여우비, 여우볕, 여우사이, 여우오줌풀, 여우콩……
여우에 홀리다,
여우같다,
여우는 같은 덫에 두 번 걸리지 않는다.
2015년 계간 <오늘의 동시문학>에 실렸던 동시 ‘여우에 대하여’이다. 한국아동문학인 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좋은 동시’다.
여우는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오해를 받아왔지만, 여우는 여우로서 여우에게 맡겨진 하늘로부터 받은 임무를 충실히 다 했다. 그 결과 여우는 수없이 많은 인생의 지침과 명언과 교훈을 이 땅에 남겼다. 여우의 생명이 더없이 아름다운 이유다.
이쯤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나의 길을 돌아본다. 나는 시대와 함께 이 길을 같이 걸어왔다. 그러는 동안 내게 맡겨진 임무처럼 나는 동시를 썼다. 아프게 살아왔건, 추운 땅에서 꿈 없이 살아왔건 나의 동시들은 시대와 함께 그려낸 빛과 그림자의 무늬들이다. 내게 주어진 이 길을 오래 걷고 싶다. 동시 쓰는 일이 좋다.
<어른이 읽는 동화> 2017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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