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동해와 나란히 걷는 경포 8경길

권영상 2016. 11. 23. 12:12

동해와 나란히 걷는 경포 8경길

권영상




강릉에서 모임이 있었지요. 내게는 문학 모임이, 아내에겐 동창 모임이 있었답니다. 같은 날인 11월의 토요일. 모처럼 아내와 가을이 저무는 영동고속도로를 달려갔지요. 모임이 끝나면 봉화 충재고택에 갈 것을 약속하고 차에서 내려 서로 다른 길을 갔네요.

이튿날엔 약속대로 아침에 만났지요. 송정의 한 솔숲 음식점에 들어 아침을 마치고 바닷길을 돌아 출발하려 했습니다. 근데 해송숲길 어디쯤에서 아내는 잠을 자겠다며 차를 세웠답니다. 간밤 동창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한숨도 못 잤다는 거네요. 참 어이없는 일이지요. 어떻게 술 한 잔 안 마시고 밤을 새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아내를 차에 두고 나는 바다에 나가기로 했습니다. 바다라 해봐야 바로 코 앞, 1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입니다. 바다로 가는 내 바짓가랑이를 누가 부여잡습니다. 솔향길입니다. 솔향길 중에서도 ‘경포 8경길’. 경포호 방해정에서 출발해 선교장, 오죽헌, 허균 생가, 초당 숲길을 걸어 송정해송길, 한송사 옛터까지 가는 길입니다.

초당이 고향이니 경포 8경길 중에서도 초당숲길까지는 그 정체를 잘 알지요. 그러나 그 이후의 지금 내가 서 있는 송정해송길은 처음입니다. 나는 바다로 나가던 걸음을 돌려 해송길로 들어섰지요. 호젓한 길이네요. 솔향 깊은 길이네요. 찰싹이는 바다를 끼고 나란히 가는 짭잘한 길이네요.



나무가 서 있는 숲길이라면 다 좋지요. 그래도 솔잎 노랗게 익는 해송숲길은 별나지요. 공기가 싸늘할 만큼 맑고 깔끔하지요. 솔내가 몸안의 어두운 것들을 싹 씻어주지요. 감정에 기울었던 나를 온전한 자리로 되돌아서게 해주지요. 무엇보다 세상에 지친 정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지요.

솔잎 익는 구불구불한 해송숲길을 따라 걷습니다. 솔숲 모롱이를 돌자, 여지껏 들리지 않던 파도소리가 쏴아, 귓바퀴에 와 닿습니다. 또 한 구비를 돌자, 파랗게 귀를 적시던 파도소리가 뚝, 사라집니다. 나는 파도소리와 숨바꼭질을 하며 해송숲길을 걸었지요.




바다가 정 그리워지면 해송길을 벗어나 바다 모랫길에 들어서지요. 파도가 그려놓은 물결 자국 끝에 하얀 조개껍데기들이 별처럼 몰려나와 있습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조개껍데기를 주어봅니다. 대부분 깨어지고 닳았습니다. 그래도 다 예쁩니다. 다 곱습니다. 명주조개며 접시조개, 작은 달팽이조개,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빨갛고 쪼꼬만 참가리비, 그리고 등에 동그란 구멍이 뚫린 돌조개......

한참을 줍고보니 손안이 조개껍데기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 많은 조개껍데기가 지금 내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깝지만 하나하나 있던 자리에 되돌려줍니다. 답답한 도시의 내 책상 위에 놓여지는 것보다 그래도 바람 거칠고 추운 여기 이 바다가 더 좋을 테니까요. 나는 내 손에 든 것들을 다 비우고 일어섰습니다.



저쪽에서 바다낚시를 하는 두 분이 있습니다. 나는 훨씬 가벼워진 마음으로 천천히 그분들을 향해 걸어갔지요. 봉지 속에 복어 십여 마리가 거품을 뽁뽁 물고 있습니다.

“밀복이라우. 요새가 밀복철이지요.”

얼굴을 모자로 온통 가린 남자분이 바다와 이야기하듯 한 마디 합니다.

다시 해송숲길로 들어섰습니다. 안목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이내 돌아섰지요. 차에서 잠자고 있을 아내가 걱정이 되었지요.



올 때에는 못 보던 갯완두풀을 보았네요. 소나무 그루터기 밑에 숨어떠는 보리사초도 보았네요. 무릎을 꿇어 싱겁게 그들 잎에 손 끝을 대어보았지요. 마음을 말끔히 비운 선승의 언어처럼 싸늘합니다.

발걸음을 빨리 합니다. 그러다가 파도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천천히 가는데, 아내가 저쪽에서 나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5분을 걸었는데 하룻밤을 자고난 것처럼 머리가 맑아졌어.”

도시의 일상에 지친 아내의 몸이 솔향과 파도소리에 되살아난 모양입니다. 그러는 아내를 데리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지요. 온몸이 푸르러진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