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봄볕 한 바구니, 행복 한 수레

권영상 2016. 3. 18. 20:40

봄볕 한 바구니, 행복 한 수레

권영상





토요일을 믿고 지난 밤 늦도록 과음했다. 방바닥을 벗어나 바람도 쐴 겸 마당에 나왔다. 봄볕이 곱다. 따스하다. 여기저기 햇빛에 이끌려 다니다가 집을 나와 아이들 놀이터까지 갔다.

나보다 먼저 나온 이들이 많다. 벤치마다 두어 명씩 앉아 담소를 즐긴다. 아직도 겨울인 줄 알았는데 여기만은 아니다. 나도 이들 사이에 끼어들고 싶었다. 다행히 비어있는 벤치가 있다. 앉았다.




저쪽 플라타너스 아래에 앉은 젊은 남자들 셋이 웃음을 터트린다. 봄볕보다 맑다. 끄억끄억, 비좁은 목청으로 튀어나오는 웃음소리가 높다. 막혔던 봄이 터져나오는 것 같다. 이야기 반 웃음 반이다. 이야기가 웃음에 섞여 말마디가 툭툭 잘려나지만 이야기는 또 이야기대로 이어진다.

그들의 웃음 덕분일까. 놀이터를 빙 둘러싸고 있는 쥐똥나무 울타리에 막 푸른빛이 돈다. 건너편 느티나무 우듬지에선 까치가 울고, 직박구리 두 마리가 또 소란스럽다. 직박구리 목청이 본디 무겁고 어두운데 오늘은 아니다. 봄물을 건너가는 노 젓는 소리 같다. 가볍다.




그 무렵이다.

엄마 손을 잡고 나온 아기가 내 곁에 와 한참 머물다 간다. 아기가 머물다 간 곳을 본다. 내 곁에 작은 무인 서가가 서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이름하여 손바닥 도서관이다. 나도 그 앞에 가 섰다. 구청에서 만들어 놓은 서가다. 손바닥만 하지만 얼핏 보아 100여 권의 책이 꽂혀 있다.

책 한 권을 골라 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독일작가 모니카 페트의 ‘행복한 청소부’란 그림책이다. 눈에 익는 안토니 보라틴스키의 풋풋한 그림이 마음에 쏙 들어온다. 책을 열었다. 봄 햇살이 커다란 책장 위로 가득 쏟아진다.





나는 그림책을 읽어나갔다.

‘독일 한 마을에 거리 표지판을 닦는 청소부 아저씨가 있었지요.’

아기가 글을 읽어가는 속도로, 아니 엄마가 읽어주는 속도로 천천히 읽어나갔다.

청소부 아저씨는 글루크, 모차르트, 바그너, 바흐, 베토벤, 쇼팽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을 말끔히 닦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와 아이의 대화를 듣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유명한 음악가의 거리를 알려주는 일이란 걸 알게 된다. 그때부터 청소부 아저씨는 그들에 관한 책을 읽고,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자신이 익힌 멜로디를 따라 휘파람을 불고, 그러며 자신이 하는 일의 행복을 발견해 간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한번 더 읽기 위해 책장에 쏟아지는 햇살이 부서질까봐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그러는 동안 두 명의 어른이 내 곁 손바닥 도서관에 들렀다 갔다. 한분은 쇼핑 가방을 든 아주머니이고, 또 한 분은 베이비 카를 몰고나온 할머니 한 분. 그분들은 햇볕을 등에 지고 한참이나 책장을 넘기다가 떠나갔다.

내가 두 번의 책을 읽는 동안 내게 두 분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한분은 보길도를 거쳐 청산도를 여행하고 있다는 옛 직장 동료이고, 또 한분은 지난 밤 함께 술을 마신 어린이책 출판사 운영자다. 한분은 내게 남쪽 섬 청산도의 보리밭 사진을 보내주었고, 한분은 나처럼 과음 후유증으로 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들은 또 내가 보내준 문자에 놀이터에서 그림책을 보는 동화작가라며 부러워했다.




그러는 동안 놀이터 모래밭엔 비둘기 대여섯 마리가 왔다 갔고, 자전거를 탄 아이들 셋이 놀이터를 서너 바퀴 돌고 갔다.

아이들이 은빛 자전거를 타고 가버린 길을 따라 나도 걸어 나왔다.

우연히 집을 나섰다가 오늘 나는 봄볕 한 바구니, 청소부 아저씨가 준 행복 한 수레를 받았다. 아이들 놀이터에 이런 행복이 숨어있을 줄이야 참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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