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길들여온 것들
권영상
창문을 열었다. 날이 흐려 우중충하다. 멀리 동해안 지방에 비 온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그 영향인가 보다. 어제가 입동이다. 벌써 시골 풍경이 으스스하다. 길 건너편 언덕의 참나무숲 참나무들이며 집마당의 배롱나무와 산딸나무가 잎을 다 떨군지도 오래다.
아침 먹은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설 때다. 집 앞에서 애들 떠드는 목소리가 난다. 내다보니 옆집 김형이 배추를 팔았나 보다. 배추밭에 애들이 잔뜩 모여 있다. 시내 모 학교 축구부한테 배추를 팔았단다. 축구부원 십여 명이 뽑아놓은 배추를 차에 싣느라 떠들썩했다. 우중충한 아침 분위기가 살아나는 듯 했다.
물 끓는 주전자에 생강 한 움큼을 집어넣고는 마당으로 나왔다. 이런 날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집 주변 가을 설거지다. 낫을 들고 텃밭의 고추대궁이부터 베었다. 여기저기 심어놓은 들깨도 베었다. 들깨 터는 시기를 놓쳤더니 박새며 곤줄박이가 날아들어 다 까먹었다.
마른 꽃대궁이들이 또 눈에 띈다. 원산지가 멕시코인 프렌치 마리골드다. 울타리를 따라 빙 둘러가며 심었는데 정말 보기 좋게 잘 자랐다. 꽃도 너무 잘 피어주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프렌치 마리골드는 내가 사는 집을 환하게 떠받쳐 줬다. 해바라기도 볼만 했지만 마리골드만큼 집을 빛낸 꽃도 없다. 꽃도 꽃이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향기는 놀라웠다. 가끔 방안에서 일을 하다 머리가 아프면 마당에 걸어 나와 꽃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면 한 순간이다. 탄산수를 마신 것처럼 허브향이 두통을 시원하게 없애주었다.
그 꽃대가 다 말랐지만 나는 쓰러진 것만 베었다.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그때에도 마리골드의 화려했던 여름을 기억하기 위해 나머진 그대로 두었다. 조금만 베는데도 벨 때마다 내 살을 베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다.
그러고도 벨 것들이 또 있다. 밭 가생이에 난 코스모스며 망초, 쑥대궁이들이다. 날아든 가랑잎과 마른 풀도 다 거둬들였다. 그들을 고구마를 캐고난 빈 밭에 쌓아놓고 불을 놓았다. 푸슥푸슥 연기가 오르더니 이내 불이 붙는다. 나는 불가에서 한 걸음 물러나 괭이를 짚고 섰다. 불기운이 뜨겁다.
올해 안성에 내려와 처음으로 일년 시골살이를 했다. 그러느라 풀들과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이 불더미에 던져진 망초, 한 길씩 벌떼처럼 크던 쑥대궁이, 뿌리가 질긴 실버들, 소리 없이 번져가던 돌콩덩쿨, 지칠 줄 모르고 잔디밭을 파고들던 바랭이와 토끼풀.
그들은 나의 가장 잔인했던 적이면서 친구다. 그들은 도회에서 오만하게 살아온 나를, 자신뿐이 모르며 살아온 나를 이리저리 쥐고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화려한 도시인들의 달변과 달리 아련한 풀 향기로, 또는 돌 틈을 비집고 살아나오는 오롯한 얼굴로, 궁뚱망뚱한 눈길로 나를 달래거나 내 조급한 성미를 천천히 누그러뜨렸다. 그 어떤 명저와 달변으로도 바꿀 수 없는 나를 그들이 바꾸었다.
나는 그렇게 그들에게 졌다. 패하고도 나는 행복했다. 그들은 언제나 비폭력적이었으니까.
그들이 불속에서 사라지고 잔해만 남을 즈음 떠들썩하니 배추를 싣던 아이들도 다 가버렸다. 시골은 다시 우중충한 처음의 배경 속으로 돌아갔다. 쟁기를 정리하고 수돗가에 앉아 손을 씻었다. 일어나며 보니 베지 않고 둔 마른 꽃무더기 밑에 프렌치 마리골드 어린 꽃이 있다. 두어 가지를 끊어들고 방에 들어와 물 컵에 꽂아 식탁 위에 놓았다.
생강물이 끓고 있는 주전자에서 물 한 컵을 따라들고 마리골드와 마주 앉았다. 매운 생강차를 후후 불며 식은 쪽 생강 물을 한 모금씩 넘긴다. 이제 이 집엔 마리골드와 나, 단 둘이다. 마리골드는 여태 말이 없다. 나도 그렇다.
그러고 보면 나를 길들인 것이 또 하나 있다. 이 말할 수 없이 고요한 침묵이다. 휴대폰 전화통화가 없는 날이면 말 한마디 없이 하루를 살곤 했다. 나를 휩싸고 있는 이 침묵이 나를 길들였다. 소음 많은 세상에서 이쪽으로 왔을 때 나를 길들여준 가장 가까웠던 벗은 이 침묵이었다. 침묵을 통해 늦게나마 내 인생의 안쪽을 들여다본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굴뚝 연기 (0) | 2014.11.13 |
---|---|
씨 뿌리는 사람의 도덕성 (0) | 2014.11.13 |
조금 모자라는 듯한 인생 (0) | 2014.11.03 |
낙엽을 쓰는 아침 (0) | 2014.10.31 |
방에 들어온 벼메뚜기 (0) | 2014.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