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낙엽을 쓰는 아침

권영상 2014. 10. 31. 17:07

낙엽을 쓰는 아침

권영상

 

 

 

아파트 마당을 쓰는 비질소리에 아침잠에서 깼다. 일어나 창밖을 보니 관리소분이 긴 대나무비로 마당길을 쓴다. 시멘트 블록을 깐 길이라 비질소리가 유난히 싸락싸락 들린다. 비질하는 그분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가을이 깊다. 건너편 살구나무 잎엔 초록물이 다 빠졌고, 그 곁 느티나무도 단풍이 한창 보기좋다. 늘어진 가지마다 윗부분이 따로 물을 들인 것처럼 붉다. 지난 봄 내내 여름 내내 드센 바람과 싸우고 비와 폭염과 싸우던 나뭇잎들이 더는 사는 일에 지친 모양이다. 웬만한 바람에도 꽃 지듯이 우수수 진다.

 

 

 

한 때는 성장을 위해, 또는 생장을 위해 하늘로 치솟던 나무들도 이제는 나뭇잎과 작별해야할 때다. 폐기해 버린 꿈처럼 노란 낙엽들이 비질 끝에 쓸려 무더기로 밀려난다. 이때가 되면 나무들은 작별에서 오는 아픔을 겪는다. 하나씩 하나씩 맨 가지를 드러낼 때마다 하늘도 싸늘하고, 바람도 비도 싸늘하다.

 

 

 

방에 들어와 편운 조병화의 시집 <길>을 뽑아드는데 책갈피에서 낙엽 한 장이 툭 떨어진다. 튤립나무 낙엽이다. 튤립나무라면 우면산 샘물터에 있는 나무다. 언제 어느 해엔가 나는 편운의 시와 산문을 즐겨 읽던 때가 있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무렵 이 시집을 읽다가 튤립나무 낙엽을 끼워 두었겠다. 방바닥에 떨어진 튤립 낙엽을 주워든다. 진한 자주빛이다. 손에 힘이라도 주면 바스라지고 말 듯이 말라있다.

 

 

 

의자에 앉아 시집을 열었다. 혹시 낙엽이 끼워져 있던 책갈피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다. 아니다. 어쩌면 그때 내 시안이 이 시집 속 어느 시에 가 있었는지, 그때도 필시 가을이었다면 나는 어떤 가을과 만나고 있었는지, 실은 그게 궁금했다. 튜립나무 낙엽이 그때 이후로 거기 쭉 머물러 있었다면 적어도 그의 흔적 정도는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 기간이 사랑이든, 슬픔이든, 그 기간이 외로움이든 작별이든 그들이 서로 부비고 껴안고 서러워했다면 그 흔적쯤은 남아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짧았던 날들이라 해도 과거는 지문처럼 또렷이 남는 법.

 

 

 

나는 과거로 들어가는 문을 열듯 시집을 넘겼다.

“지금 어디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 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1987년 동문선에서 나온 시집이다. 여기에 ‘의자·7’이 나오는 걸 보면 재수록 된 듯 하다. 다시 머릿글을 읽어보니 신작이 27편이다.

 

 

 

그 다음 페이지에 ‘시간은 마냥 그 자리’라는 시가 나온다.

“시간은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유구히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변하오며 지나가옵는 것은 사람일 뿐/ 시간은 유구히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 ‘바다’가, 그 다음 페이지에 ‘마음·2’라는 시가 나온다. 나는 천천히 편운이 직접 그린 그림을 보며, 편운이 직접 펜으로 쓴 시를 읽으며 책장을 넘겼다. 그의 봄을 보며, 가을과 바다를 보며, 연꽃과 파이프를 보다가 ‘오산 인터체인지’에서 멈추었다.

 

 

 

내가 찾던 튤립나무 낙엽의 흔적은 거기 있었다. 20년도 넘는 시간의 무게에 눌려 잎과 잎자루의 윤곽과 자줏잎 빛깔이 어렴풋이 묻어있다. 이걸 시와 튤립나무 낙엽의 사랑의 흔적이라 해도 될까. 이걸 시와 튤립나무 낙엽이 만나서 이루어낸 아픔이라 해도 될까. 아니 이걸 눈물이라 해도 될까. 작별을 위한 악수라 해도 될까.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초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 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 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여기 안성 어딘가에 내려와 편운이 혼자 살던 무렵의 시이다.

나무가 하는 작별이든 사람이 하는 작별이든 이런 작별이라면 슬픈 작별이다. “너는 남으로 천 리, 나는 동으로 사십 리” 서로 가는 길이 멀고도 다르다. 어쩌면 이제 이 길에서 ‘그럼’이라는 짤막한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서러운 예감이 인다. 이 생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거나 하는 허전한 작별이다.

 

 

 

편운의 후반부 시들은 대개가 이별과 작별이다. 저쪽 세상으로 떠나기 전 몇 년 동안 그의 시들은 온통 작별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그 시기의 편운의 생은 살아있는 시절이기보다 반은 저승 문턱에 발을 딛고 사는 형국이었다. 편운은 어머니를 마음에 품고 일생동안 외롭게 살았다.

그의 시가 가을의 작별처럼 내 앞을 지나간다.

나는 튤립나무 낙엽을 있던 그대로 책갈피에 넣고 시집을 덮었다. 20여년 전에 이 시집을 펼쳤으니 이제 앞으로 어떤 인연이 있어 20년쯤 그 뒤 이 시집을 연다면....... 그때 내 나이가 생각할수록 아득하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후문에 있는 도루코 빌딩 마당을 그 댁 관리인이 비질을 하고 있다. 비질 끝에 낙엽이 쌓인다. 느티나무 오솔길로 들어서는데 어제도 그제도 만난 남자분이 수북히 쌓인 느티나무 낙엽을 쓴다.

어제도 그랬다.

“안녕하세요.”

건물로부터 먼 여기까지 비를 들고와 말없이 낙엽을 쓰는 그분에게 인사를 했다. 어제와 달리 그분이 인사를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그분과 나 사이에 가을 낙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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