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서

권영상 2014. 3. 31. 12:25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서

권영상

 

 

 

 

 

안성에 내려와 산 지 나흘이 됐다. 매실나무도 심고, 으름덩굴도 꽤 큼직한 놈을 창밖에 심었다. 빈터엔 영춘화 두 그루도 심었다.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엔 이렇다할 울타리가 없었는데, 울타리 대신 측백나무 여덟 그루를 심었다. 그래놓고 나니 헐벗은 집이 모양을 갖추어 가는 듯 했다.

마른 마늘밭에 물도 몇 차례 주어야 했다. 3월 들어 비가 통 오지 않아 땅이 마를 대로 말랐다. 풀거름만 텃밭에 한 바람에 조금만 가물어도 땅이 푸석푸석하다. 감자 네 이랑을 심어놓았지만 땅은 말라만 간다. 어제만 해도 여기 기온이 20도를 넘겼다. 긴팔을 입고 텃밭에 앉으면 땀이 날 정도다.

 

 

 

봄이 왔단 소식을 듣고 고작 두 번 내려왔다 갔다. 그랬으니 봄일이 밀려 쉴 겨름이 없다. 그런저런 일로 벌써 나흘째 안성에 갇혀살고 있다. 말 할 상대없이 혼자 살려니 때로는 심심하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아침에 밥을 차려 먹을 때면 식탁 옆에 둔 라디오를 켠다. 혼자 먹는 밥이 입에 거칠기도 하지만 사람 목소리가 그리워서다. 처음 텔레비전을 들여놓을 때는 심심하면 보리라 하는 마음으로 샀다. 그런데 내려올 때마다 왠지 리모컨에 손이 가지 않았다. 아니 텔레비전 앞에 죽치고 앉아 몇 시간씩 들여다볼 시간이 없기 때문인 듯도 하다.

 

 

 

오늘도 아침밥을 차려놓고 라디오를 켰다. 근데 지지지지, 소음이다. 분명히 어제 음악이 나오는 방송국의 주파수를 맞추어놓고 듣다가 껐는데 또 소음이다. 어찌된 게 들을 때마다 소음이 주파수를 간섭한다. 오래된, 외장이 목재로 된 아날로그 라디오다. 나는 들었던 수저를 놓고 주파수를 맞춘다. 잘 잡히지 않는다. 라디오 방향을 여기저기 바꾸어본다. 그래도 마찬가지다. 안테나 선을 움직여본다. 선이 놓인 쪽의 비타민 통이나 꽃병을 옮겨놓는다. 그래도 여전하다. 나는 음악 듣기를 포기하고 아예 라디오를 꺼버린다.

 

 

 

라디오란 방송국에서 보낸 전파를 안테나로 받아서 음성으로 바꾸어주는 기계다. 그런데 수신하는 쪽에서 주파수를 맞추지 못하면 그 일마저도 불가능해진다.

아침마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서 느끼는 게 있다. 나야말로 아내에게 주파수가 맞는 사람일까, 그 점이다. 서점에 나가 볼일을 보고 집에 탁 들어설 때면 그제야 아차, 하는 게 있다. 아내가 부탁한 책을 안 사왔다. 슈퍼에 가서도 가끔 엉뚱한 물건을 사온다. 아내가 부탁한 메이커가 아니거나 용량이 다른 물건을 사들고 올 때가 있다.

 

 

 

“도대체 당신은 내 말을 제대로 듣기나 하는 거야?”

이 말은 아내가 내게 하는 말 중에서도 아주 즐겨하는 말이다. “남이 하는 말은 잘 들으면서 내가 하는 말은  왜그렇게 못 알아 들을까?” 이 말도 그 중 하나다. 처음엔 나를 타박하기 위해 꾸며낸 잔소리거니 했다. 그러나 그 말도 차츰 들어가면서 아내의 말에 대한 나의 수신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라는 라디오엔 주파수 조정의 문제가 있는 듯하다. 아니면 아내와 주파수가 맞지 않는 거다. 주파수 설정이 잘못 됐든가 고장이 났다든가. 짬이 날 때면 마주앉아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가며 입과 귀를 맞추지 않는다면 대화가 불통되거나 단절되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어찌 생각하면 나의 수신력 때문에 아내가 답답하긴 하겠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편할 수도 있겠다. 자신의 말을 내가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다 듣고 기억한다면 그건 또 얼마나 무서운 부부 사이가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