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꽃씨 온상에 꽃씨를 심고

권영상 2014. 4. 10. 21:11

꽃씨 온상에 꽃씨를 심고

권영상

 

 

 

 

 

지난 2일 꽃씨를 심었습니다.

작년 가을에 안성에 내려와 살기 시작했으니 그때는 꽃을 심기 어려웠지요. 그 대신 여기 저기 다니면서 꽃씨를 받아두었지요. 주머니에 휴지가 있으면 휴지에다 받고, 물건을 사고 받은 영수증이 집히면 영수증에다 받았지요. 그도저도 정 없으면 깻잎이나 풀잎으로 받아 풀대궁이로 둘둘 감아왔지요.

그걸 모두 꺼내 큼직한 봉투에 담아들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안성으로 내려왔습니다. 오는 길에 백암시장에 들러 온상을 만들 비닐과 철주를 샀습니다. 텃밭 양지쪽에 꽃씨 온상을 만들 생각입니다. 잘 키워 집 앞이며 길 옆, 바위틈에 꽃을 좀 많이 심어보고 싶었습니다.

 

 

 

가끔 고향집에 내려가면 집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 피어있는 금잔화를 닮은 프렌치메리골드가 늘 내 눈길을 끌었습니다. 지치지 않고 피는 그 노랑과 빨강의 강열한 빛깔이 나는 좋았지요.

‘나도 시골에 집 하나 생기면.........’

꽃길을 걸어 들어갈 때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댔습니다. 그 자극적인 꽃빛깔이 땅을 갖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킨 걸까요? 정말이지 너무도 운 좋게 퇴직을 하자마자 안성에 텃밭이 있는 집 한 채를 구했습니다.

그 집에 프렌치메리골드를 가득히 심어보고 싶었습니다.

 

 

 

오랫동안 도회의 삶을 살며 나는 어느덧 인생의 나이를 충분히 먹었습니다. 그런 내게 꽃씨를 심으려는 순정이 남아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4월은 지치고 무뎌진 내 육신에 촛불 하나를 밝힙니다. 도회의 빌딩 숲을 돌아나오느라 등이 굽은 내 영혼을 촛불빛으로 흔들어 깨웁니다. 잠든 대지를 깨우듯 4월은 덤덤한 나를 깨워 내 안을 밝혀줍니다. 나는 그 촛불 같은 내 안의 불빛을 따라 꽃씨 한 봉지를 들고 고속도로를 달려왔습니다.

 

 

 

안성에 도착하는 대로 텃밭으로 갔습니다. 텃밭엔 지난 늦가을에 심은 마늘이 파랗게 크고 있습니다. 그 마늘밭 곁에 꽃씨 온상을 만들고, 서울서 가져온 꽃씨 봉투를 열었습니다. 참 꽃씨가 많기도 합니다.

프렌치메리골드며 분꽃, 맨드라미씨도 있고, 채송화, 작약 씨앗도 여섯 개 있습니다. ‘용인 친구 집에서’라고 적힌 금어초 씨앗도 있고, ‘형수님 댁 마당에 피는 보라색 키 큰 꽃’이라고 적힌 이름 모를 꽃씨도 있습니다. 아내가 제 직장에서 얻어온 빨간 꽈리, 딸아이가 내 생일 선물로 사준 접시꽃씨, 그리고 여기저기서 받아둔 나팔꽃씨, 키 큰 민들레꽃씨, 박주가리씨.......

 

 

 

나는 한 줄 꽃씨를 뿌리고는 옆에 놓은 메모지에 순서대로 꽃씨 이름을 적고, 또 적고 하면서 심었습니다. 나이 먹은 내 손이 요렇게 호사를 합니다. 주름살 진 손으로 이렇게나 예쁜 꽃씨를 집어 뿌릴 줄 누가 알았겠나요. 반짝이는 맨드라미 씨앗, 먼 별씨 같은 채송화 씨앗, 향수 분꽃을 피우는 눈이 똘망똘망한 깜장 분꽃씨들..........

작은 꽃씨들이 자꾸 내 손에 헛집혔지만 나는 공들여 햇빛이 묻은 이 반짝이는 씨앗을 흙속에 떨어뜨렸지요. 내 몸에 꽃씨를 심듯, 4월을 심듯 허리를 바짝 숙여 다문다문 뿌렸지요.

 

 

 

다 심고는 물뿌리개에 물을 담아와 땅이 흠뻑 젖도록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철주를 둥글게 박고 비닐을 씌웠지요. 비닐을 덮고 나니 또 그 안이 궁금합니다. 나는 일어나지 못하고 몇 번이나 그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한 시간쯤 뒤에 또 가 또 들여다보고, 저녁 무렵에 또 찾아가 두 손을 동그랗게 맞대어 눈가에 대고 비닐 속을 들여다봤습니다. 금방 뭔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기다림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밤이 추울 텐데 참고 잘 자렴.”

나는 그 말을 하고야 거실에 들어와 저녁을 차렸지요.

 

 

그렇게 사흘을 돌보다가 토요일에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서울에는 또 서울에 두고 온, 먹고 사는 것에 관한 일이 있으니까요. 나흘을 자고나니 견딜 수 없었습니다. 안성에 심어놓은 꽃씨가 궁금했습니다. 비닐 속 흙이 말라버렸다면 꽃씨는 더 이상 움이 트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벌써 꽃씨가 나왔다면 높은 온도 때문에 자라도 한 뼘 넘게 웃자라 있을 것 같았습니다.

“병이 나도 단단히 났네.”

아내가 얼른 안성에 가보라고 합니다.

아내 보기에도 내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나 봅니다.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4월의 길을 달렸습니다. 꽃씨들이 모두 말라버렸을 것 같아 편하게 듣던 FM도 껐습니다. 휴게소에 들러 커피를 마시던 일도 그만 두었습니다.

 

 

 

 

부랴부랴 안성 집에 도착했습니다.

꽃씨 온상으로 달려가 비닐부터 걷었습니다.

더운 온기가 확 끼쳐 나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내 걱정과 달리 온상 안은 촉촉합니다. 그 사이 해바라기씨 열세 개가 돋았습니다. 맨드라미가 빨간 몸을 내놓았습니다. 더러더러 꽃씨 순인지 풀씨 순인지 모를 것들이 나와 있습니다.

물을 흠뻑 주고 혼자 마당의자에 와 앉았습니다.

 

 

아직 안성 사람들이 짓는 농토엔 봄이 멀었습니다. 집 앞 호밀밭의 호밀도 지난 겨울에 자란 그 키 그대로입니다. 늘 시간표에 맞추어 살아온 나의 오래된 습관을 생각해 봅니다. 나는 매일 시간 단위로, 아니 때로는 분 단위로 시간표에 대느라 허겁지겁 살았습니다. 그런 내가 오늘 이토록 천천히 흘러가는 자연의 시간에 크게 조롱당한 느낌입니다. 대지가 가까운 곳에서는 시간이 아니라 세월이 느긋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