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가 일러준 생의 비밀
권영상
창밖에서 참새들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방안에 앉아 책을 읽다가 불쑥 일어났다. 이런 날 책 읽는 일이 몹쓸 짓 같다.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지붕이 파란, 요 앞 할머니집 늙은 대추나무에 참새들이 소복히 앉아있다. 새소리는 거기만이 아니다. 호밀밭 건너편 참나무숲에서도 들려왔다.
마을길로 내려서는 데 갑자기 새들 소리가 뚝 끊긴다. 다섯 집이 모여사는 동네가 고즈넉해진다. 하늘을 쳐다봤다. 솔개 때문이다. 솔개가 동네 위를 빙빙 돌고 있다. 그때 저쪽 건너편 산에서 까치 두 마리가 날아와 솔개를 위협했다. 솔개가 몇 번인가 피하더니 돌연 까치를 기습했다. 비틀, 하는 까치 몸에서 깃털 몇 개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급소를 찔렸나보다. 쫓기듯 비스듬히 날아가던 까치가 빈 밭에 떨어졌다. 다시 보니 솔개는 날아가버리고 없다.
놀라웠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다. 나는 생존투쟁이 벌어졌던 그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 봤다. 지금은 텅빈 푸르고 고요한 하늘이지만 좀전까지만 해도 그 하늘에선 섬뜩한 생사의 혈투가 일어났다. 까치에게 쫒겨다니기만 하던 솔개의 역습이 생생히 눈에 어렸다. 솔개라고 새들의 포식자만은 아니다. 그도 살아남기 위해 공격하고, 또 공격에 실패하고, 쫓기는 수모를 겪지 않을 수 없다.
요 한달 전부터다.
펜실베니아 프랜시스 슬로쿰 호수 근방에 살고 있는 친구로부터 뜻밖의 사진을 받아보고 있다. 친구는 취미삼아 사진을 찍어 간간히 이메일로 보내오는데 벌써 3년은 족히 되었다. 일을 마치면 카메라를 차에 싣고 바깥을 나돌았다. 처음엔 주로 꽃, 풀, 열매, 정원의 나무들을 한 번에 대여섯 장씩 보내왔다. 그러더니 언제부턴가 산야의 사계 풍경을 보내왔다. 그것도 주 경계를 넘어 수십 킬로미터나 나가 그쪽 풍경과 사람들을 찍어보냈다.
또 언젠가부터는 펜실베니아 산록의 광대한 일몰을 찍더니 별을 찍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다. 망원렌즈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의 카메라 피사체도 바뀌었다. 그의 사진에 독수리가 나타났다. 흰머리수리.
주로 서스쿼해나 강에서 물고기를 채는 모습이었다. 두 발로 물고기를 움켜잡는 순간이거나, 움켜잡고 날아가는 모습, 물고기를 공중에 떨어뜨리는 순간의 모습들. 때로는 허공을 비익하는 날개깃의 오묘한 움직임과 지상을 내려다보는 지배자 같은 서늘한 눈빛, 그리고 그 도도한 흰머리의 위용.....
그가 찍어보내는 독수리의 모습엔 하늘의 제왕다운 위엄이 있었다. 무인정찰기처럼 아래쪽을 향해 소리없이 하강하는 섬뜩한 모습에선 역시 왕 중의 왕다운 카리스마가 보였다. 망원렌즈에 잡힌 독수리 눈의 홍채도 또렷하고, 갈고리 모양의 부리도 선명했다.
인디언 추장들이 그들의 머리에 독수리 깃털을 장식한 이유를 알만 했다. 나는 그렇게 오래 전부터 내가 보아왔던 방식대로 독수리의 제왕다움을 보아왔다.
그런데, 어제다.
나는 친구의 독수리 사진에서 전에 못 보던 것을 발견했다. 독수리의 아랫배 깃털속에 반쯤 묻힌 누런 두 발이었다. 여태까지 내가 독수리의 위엄있는 풍모나, 도도한 머리, 위협적인 날개를 보았다면 어제는 독수리의 허리 아래를 보았다. 허리 아래.
제왕의 허리 아래에 놓인 발은 차마 제왕의 발이라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글 모르는 농사꾼의 험하고 뭉툭한 손을 닮았다. 보리 한톨이라도 더 건지려고 호밋자루를 쥐고 풀포기를 그러잡아 당기는 억센 손. 그런 농사꾼의 손을 닮은 발로 먹잇감을 사로잡거나, 잡은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을 일을 생각하니 생에 대한 비애가 일어났다. 그뿐인가. 남의 먹이를 훔치거나 하위 포식자가 잡은 저녁거리를 가로채기 위해 발은 또 저렇게 염치없이 거칠어졌을 것이다.
창공을 유유히 나는 독수리는 제왕답다. 그러나 그의 허리 아래에 놓인 두 발은 먹고살기 위해 비겁해지거나 때로는 위선과 비열한 짓도 서슴치 않았을 것이다.
나는 요즘 친구가 보내주는 망원렌즈 속에 숨겨진 생의 비밀을 읽는다. 그러다가 문득 내 두 손을 펴들었다. 단지 살기 위해서 내 손이 무심코 저질렀을 나의 죄업을 생각한다. 내 머리가 높은 가치와 미덕과 향기로운 영혼을 꿈꿀 때 내 두 손은 무엇을 했나? 어두운 그림자처럼 나의 것을 움켜쥐기만 했지 베푸는 일에 인색했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이내 집으로 돌아왔다.
봄이라지만 농촌의 봄은 서울과 달리 화사하지 않다.
울담 안에 앵두꽃이 피고, 개나리가 노랗게 피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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