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는 나흘 동안
권영상
안성에 나무를 심으러 내려갔다. 식목일 즈음이면 양재동 꽃시장이 붐빌 것 같아 미리 움직였다. 울타리로 쓸 측백과 창밖에 심을 으름덩굴과 영춘화를 샀다. 그 말고도 틈틈히 읽을 김종섭씨의 <조선의 노비들>도 한권 구해갔다.
나는 안성에 도착하는 대로 나무부터 심었다. 심으면서 생각해도 좀 이르지 않을까 했다. 아직 꽃샘추위도 남았을 테고, 얼토당토 않게 봄눈도 내릴지 모른다. 지난해엔 4월 중순에 심은 토마토가 냉해를 입기도 했다. 안성의 밤은 겨울 점퍼를 입지 않으면 춥다.
나무를 심어놓고, 주변의 마른 풀을 모아 밑동이를 넉넉히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텃밭에 돋는 마늘이며 온상에서 이제 막 돋아나는 상추며 애호박을 돌보고, 밤엔 꼼짝않고 방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 일을 나흘째 반복하고 난 일요일,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열흘째 독감에 신음하는 아내를 위해서도 일찍 올라가야 했다. 아내는 아직 깜깜한 한겨울이다. 강릉에 볼일을 보러갔다가 추운 밤버스에서 그만 독감을 얻어왔다.
9시. 차를 몰아 부랴부랴 안성을 떠났다. 한 시간이 못 되어 양재시민의 숲을 지날 때다. 뭔가 차창밖 온도가 미묘했다. 목련꽃이 마을에서, 숲에서 그 희고 빛나는 빛깔을 내뿜고 있었다. 낯설어 보였다. 서울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창밖의 개나리꽃이 유난히 눈부시고, 10시 무렵의 봄햇빛도 심상찮게 빛났다.
서초 IC를 막나오자, 계절 분위기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직 겨울인 줄만 알았던 서울이 봄이다. 봄도 4월 중순의 봄이다. 아파트 마당에 들어서자, 살구나무며 매화나무가 미친 듯이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북향의 그늘 속에 서 있던 목련도 이미 만개해버렸다.
나는 얼른 차를 세워놓고 우면산으로 갔다. 어쩌라고 길옆의 벚꽃이 이미 활짝 폈다. 벚꽃을 보자면 남쪽의 벚꽃 소식을 듣고, 그 소식에 마음이 설레이고, 그러고도 온갖 꽃샘추위를 거쳐 피는 게 벚꽃인데 미쳤다. 나 없는 나흘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야 단 나흘만에 겨울 같던 서울이 4월의 봄을 어떻게 연출할 수 있을까.
우면산은 진달래꽃 지천이었다. 기껏 생강나무 꽃이 피고, 귀룽나무 잎 피는 걸 보고 안성에 내려갔는데, 산이 진달래빛으로 붉다. 참나무는 속잎을 피우느라 바쁘고, 늙은 나무 뒤에 숨어 찬바람을 피하던 찔레덩굴은 잎을 다 피워 당당히 바람과 맞서고 있다. 골짝을 하나 넘을 때마다 산은 나흘 전에 내가 보고간 그 산이 아니다. 참나무 가지에 날아와 우는 새는 흰눈썹황금새다. 5월에나 찾아오는 여름철새다.
나없는 동안 이 서울에 이변이 생겼다. 서울이 술에 취해 달력을 마구 넘긴 모양이다. 나 없는 동안 바퀴를 달고 여름을 향해 과속을 했거나 봄이라는 이름의 정거장을 그냥 통과해 버린 모양이다. 서울은 지금 비정상이다. 안성의 대지엔 밭둑에 고작 쑥이 크고, 농가의 마른 개나리 울타리엔 참새들이 모여와 재재거리며 봄을 기다리고 있다. 나 없는 동안 서울이 겁없는 소년처럼 위험하게 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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