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오늘 술 한 잔 해요.
권영상
"선생님, 오늘 술 한 잔 어떠세요? 김지훈입니다.”
수업을 끝내고 돌아와 휴대폰을 여니 메시지 한 건이 와 있다. 지훈이다. 메시지 도착 시간 오후 2시 18분. 지금 시각 오후 4시 반. 30분 뒤면 나는 퇴근이다. 그에게 전화를 넣었다.
“시간 있으니 일 마치고 학교로 오렴.”
6시쯤에 일이 끝난다며 그때까지 좀 참아줄 수 있냐고 되물었다. 마침 다음 주 목요일까지 출판사에 건네줄 원고가 있다. 그렇지 않다 해도 그와 만나고 싶었다. 나는 선뜻 그러마고 대답했다.
지훈이는 나에게 국어를 배운 제자다. 20여 년 전, 그러니까 지금 내가 있는 이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때 <볍씨>라는 시 쓰는 동아리를 만들어 일 주일에 두 번씩 모여 시를 읽고 감상하고 했다. 그때 지훈이는 일 학년이었는데 졸업할 때까지 끈기있게 참여했다. 손위로 누나가 여섯이고, 고향이 함안이다. 누나들 밑에서 자라 그런지 성격이 모나지 않고 감성이 풍부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부터다. 내게 편지를 했다. 그러더니 군에 입대하자 가끔 가끔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 쓰기 좋아하는 나도 그가 생각날 때면 읽으라며 시도 적고, 좋은 책 이야기도 적어 여러 장씩 보냈다. 그러면 그는 또 훈련하다가 쉬는 참에 풀밭에서 찾았다며 네잎 클로버를 편지 갈피에 넣어 보내곤 했다. 그때도 지훈이의 편지 말미엔 ‘선생님, 저 휴가 가면 술 한잔 사주세요.’였다. 술을 좋아하는 내가 싫어할 리 없었다. ‘물론 오너라.’였다. 그만한 나이라면 같이 술을 마신대도 어색할 게 없다. 더구나 그에겐 옛 중학교 시절의 담임과 제자라는 묘한 향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것도 그의 그리움이 그렇다는 거지 만나지는 못했다.
군에서 제대를 한 후 지훈이는 대학에 복학했고, 편지도 두절 됐다.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렀을까. 학교 뒷뜰에 사과나무 꽃이 막 피는 날이었다. 컴퓨터를 열자, 이메일함에 뜻밖에도 그의 편지가 와 있었다. 맨해튼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고, 디자인 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어떻게 내 이메일을 알았는지, 그는 그날 이후부터 종종 자신의 근황을 알려왔다. 가끔은 시적 서정이 물씬 풍기는 상품 디자인 광고를 이메일로 보내왔다. 그러니까 그는 시를 공부해 디자인을 하는 셈이었다.
그런 녀석이 언젠가 귀국한다며 주례를 서 달라고 했다. 나는 이미 몇 번인가 주례를 서 본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네 영혼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인데 주례 서기에는 참신함이 없다는 이유였다. 물론 부탁의 말미에도 ‘선생님, 귀국하면 술 한잔 해주셔야 해요.’가 있었다. 내 대답은 ‘물론 좋지.’였다. 서울에 들어와 결혼을 하고 2년만에 그가 학교로 나를 찾아왔다. 내 명함 한 통을 선물로 만들어 가지고. 한 면이 저의 그림으로 고스란히 앉혀 있는 멋진 컬러 명함이었다.
“어떻게 선생님을 뵈올까 고민했습니다.”
그가 내게 인사했다. 그날 우리는 학교 근처 음식점에서 십여 년 동안 별러온 그 ‘술 한잔’을 했다. 그때, 그는 첫 술 한잔을 받아놓고 ‘선생님!’ 하고 나를 불렀다. 그러는 그의 볼에 주르르 눈물이 굴러내렸다. 듣고 보니 그에겐 아버지가 없었다. 그러니 그 동안 내가 그의 오랜 아버지 노릇을 한 셈이었다.
우리는 그날 술을 꽤 마셨다.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리다 나는 문득 시계를 봤다. 약속시간이 다 됐다. 서둘러 컴퓨터를 끄고, 구두를 신었다. 똑똑똑! 그의 노크소리가 곧 들릴 것만 같다.
(교차로신문 2011년 7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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