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물병에 물을 채울 때

권영상 2013. 8. 27. 13:47

 

 

물병에 물을 채울 때

권영상

 

 

 

 

출근을 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어제 쓴 컵과 빈 물병을 들고 본 교무실로 가는 일이다. 거기 개수대에서 컵과 물병을 씻는다. 컵 두 개와 빈 물병. 물병은 나 혼자 하루치 마실 1리터 반쯤 되는 병이다. 그걸 깨끗이 닦아 정수기 작은 주둥이에 대고 물을 받는다. 잠깐 기다리면 가득히 물이 찬다. 그것이 비록 ‘잠깐’이어도 물이 차는 데는 그 그릇의 크기 만한 시간이 필요하다. 

 

 

40초쯤 될까. 하루 스물네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댕강한 시간이다. 양치질하는 시간보다 짧고, 커피 마실 물 끓이는 시간보다 짧다. 그렇기는 해도 그 시간이 때에 따라서는 길게 느껴진다. 그 40초 동안을 못 견뎌 나는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물병을 들여다 본다. 그래도 물병의 물이 차기를 기다리는 이 간명한 시간은 좋다. 물이 차오르는 만큼 내 안에 서늘한 그 무엇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영화 <밀물이 들어올 때까지>가 생각난다. 맹관표 감독이 만든 14분짜리 영화다. 초등학생 봉구는 늘 바닷가 갈대밭에서 논다. 섬에 사는 봉구는 공부에 재미가 없다. 아침 등교 시간에도 갈대밭에서 놀다가 툭하면 지각을 한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 봉구에게 시험을 잘 보면 자전거를 사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일을 하러 섬을 떠나간다. 우연일까? 아니면 봉구의 숨을 노력이 있어서일까. 매번 ‘빵점’을 받던 봉구는 88점을 받는다. 자전거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봉구는 갯벌로 달려나가 아버지를 기다린다.

 

 

“밀물아, 빨리 들어와라!”
봉구는 아버지가 돌아오길 고대한다. 밀물을 타고 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들이란 대체로 다 그런 존재들이다. 자식에게 꿈을 심어주고는 먼 타지로 나간다.
자식은 매양 동구 밖에 나가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아버지란 자식에게 그 무엇을 던져놓고 스스로 해답을 찾기를 기다리는 존재다. 그런 까닭에 아버지가 돌아오는 데엔 기다림이란 시간이 필요하다. 아버지란 지루하도록 기나긴 시간적 존재다.

 

나의 소년 시절도 오랜 기다림의 추억으로 무늬져 있다. 어머니는 십여 년이 넘도록 병원에서 투병을 하셨고, 아버지는 그런 이유로 나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거의 내팽개쳐져 있었다.
나는 홀로 갯가에 나가 갯물과 갈대들과 먼 대관령과 지루하도록 마주 하며 살았다. 마주한다는 건 대결한다는 것, 패배하지 않기 위해 오랜 시간들과 싸웠다.
“아버지, 상급학교엔 보내주셔야지요?”
아버지에게 불평하면 아버지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그래, 두고 보자.”

 

그렇게 나는 일 년, 이 년을 기다렸다. 기다리다 지치면 먼 대관령을 향해 돌을 던지고, 욕지기를 했다. 그 모든 것이 그들 때문인 것처럼. 그러나 기다림 끝에 허사란 없는 법. 나는 기어코 내가 원하던 것을 얻어냈다. 그뿐 아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것도 얻어냈다. 그것은 ‘문학’이라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내가 쏠려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늘도 정수기 앞에 서서 물병에 물이 차길 기다린다. 물병의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내 안에 서늘하게 차오르는 그 무엇이 있다.

 

산다는 건 시간에 길들여져 가는 오랜 훈련이다. 물병의 물이 차는데 걸리는 시간을 거부하고는 어떤 사소한 것도 얻을 수 없다. 아침마다 물병에 물을 채우는 이 기다림의 시간이 나는 소중하다. 

(교차로신문 2011년 7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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