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배 고파요
권영상
퇴근 시간이다. 배 고프다. 점심을 일찍 먹어 그런지 시장기가 확 몰려온다. 나가다가 뭔가 좀 사먹고 갔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먼저 퇴근해 밥을 짓는 아내에게 미안하다. 부랴부랴 4호선을 타고 충무로에 갔다. 거기서 다시 3호선 오금행을 기다리느라 의자에 앉았다.
‘아, 배 고프다.’
나도 모르게 그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때 한 사내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천천히 내 무릎 앞에 와 섰다. ‘아,아,아’하고 말을 더듬었다.
“아아저씨, 바밥을 모못 먹었어요. 배배가 고파요.”
뜻밖에도 사내가 그런 말을 했다.
그의 배고픈 표정이 너무도 절실했다. 누가 봤다면 배고픈 지금의 내 표정이 그랬겠다.
“정말 그렇게 배고파요?”
나는 아이에게 묻듯 그렇게 묻고 말았다.
“예. 배배고파요. 저점심을 모못 먹었어요.”
한 서른 살 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하늘색 반 소대를 입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배고파 보였다.
나는 밥 한 끼 이드거니 먹을 수 있는 돈을 꺼내 그의 손에 얹어줬다. 그는 그 돈을 들고 오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이윽고 기다리던 전철이 왔고 나는 전철에 올랐다.
예전, 우리가 살던 시절엔 배 고픈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는 상이군인이며, 떠돌이며, 걸인들이 밥을 얻으러 자주 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 모두 그 시대가 만들어놓은 마이너리티들이었다. 그들이 목숨을 비비고 기댈만한 곳은 밥술을 놓치지 않는 농촌이 아니었나 싶다.
그들 중에 이웃 바닷가 마을에서 아침마다 우리 마을로 찾아오는 곰이 있었다. 건장한 사내였는데 정신이 좀 부실했다. 본디는 어부였는데 병을 얻어 그렇게 됐다고 했다. 곰은 아침마다 그릇을 들고 밥을 얻으러 왔다. 참 순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그를 향해 흙덩이를 던지고 나뭇가지를 던졌지만 그는 늘 웃었다.
근데 그의 밥 구걸은 좀 특이했다. 그냥 맨 밥그릇만 들고 오는 게 아니었다. 꼭 들꽃을 꺾어 밥그릇에 담아왔다. 이른 봄이 되면 어디서 구했는지 뽀얗고 서늘한 버들개지나 이제 막 피려는 참꽃을 꺾어 왔다. 마당에 하얗게 내린 눈을 신도 없이 맨발로 밟아 그가 오면 어머니는 식구들 밥을 다 뜨고난 뒤 그의 밥을 떠 주셨다. 밥이 모자라면 따로 두었던 식은밥을 주셨다. 그러면 그는 담아온 꽃을 마루에 놓고 밥을 받아 천천히 걸어 마당을 나갔다.
‘얼마나 발이 시릴까?’
우리는 맨발로 눈 위를 걸어가는 곰을 보며 배 고픈 일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알아갔다.
그가 가고 나면 우리는 마루에 놓아둔 버들개지나 참꽃을 들고 들어와 빈 술병에 꽂았다. 버들개지는 꽃가루를 다 떨구고 나면 파란 연둣빛 속잎을 피워올렸다. 그 잎이 피어나면 봄은 어김없이 문밖까지 가득히 차올랐다.
“곰 줄 거 한 개 더 깎을래.”
어머니가 밥에 안칠 감자를 깎으면 우리는 곰을 걱정하며 감자를 하나 더 깎았다. 발 시린 것 보다 밥 굶는 일이 더 고통스럽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밥을 얻어먹고 사는 사람들은 다 선하다. 그들이 선하지 않았다면 얻어먹을 이유가 없다.
(교차로신문 2011년 8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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