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이메일로 받은 그림 한 장

권영상 2013. 8. 15. 06:38

 

 

 

이메일로 받은 그림 한 장

권영상

 

 

 

 

이메일로 그림 한 장을 받았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그러나 종전의 토끼와 거북이 그림이 아니다. 경주를 포기한 듯한 거북이가 출발 선상에서 아예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고 있다. 그걸 바라보는 토끼가 ‘너, 어디 가려고?’ 하고 놀란 듯이 묻는 그림이다.

현명한 거북이라면 결과가 뻔한 토끼와의 경주를 또다시 할까. 앞서 달려간 토끼가 도중에 맥없이 잠자 줄 것이라고 믿는 거북이가 요즘 세상에도 있을까. 설령 경주에 이긴다 해도 이긴 순간은 행복하겠지만 양심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잠자는 토끼 몰래 이긴단들 뭐가 영광스러울까. 느린 걸음의 거북이를 제압한단들 토끼는 또 뭐가 그리 기쁘고.

이건 처음부터 잘못된 경주다. 잘 달리는 토끼와 느린 거북이라니. 바다에서 하는 토끼와 거북이의 수영 정도라면 또 모를까. 물론 그것도 사는 터전이 다른 두 인물들에게 공정하지 못하다. 

그림 속의 거북이는 현명한 거북이답게 출발선상에서 방향을 튼다.

 

 

 

경주를 사양한다. 더는 주체 측의 농간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다. 다시 경주를 한다고 해도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토끼를 뒤쫓아 간다는 건 고통이다. 뒤쫓아 가는 것만도 고통인데 이기려면 앞질러야 한다. 경기가 끝나는 그 지점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토끼를 이길 수 있을까. 없다. 토끼의 실수로 말미암아 이겨본 거북이라면 안다. 토끼가 불행해지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 다시 한번 토끼가 깊은 잠에 빠져주거나, 돌멩이에 걸려 다리를 다치거나, 벼랑에 떨어지거나, 덫에 걸리거나…….

 

 

토끼를 이기는 경주를 해야 한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번 패배를 경험한 토끼라면 또다시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번의 우연한 실수일 뿐이다. 그렇다면 거북이는 적극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오토바이 뒤에 슬그머니 무임승차해 결승점에 가 내리거나, 솔개를 이용해 먹거나, 잔꾀와 술수를 써야 한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마음을 먹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거북이는 고통스럽다. 이기기 위해 품어야 하는 욕심은 인생을 소진시키는 독과 같다

 

 

 

거북이만 고통스러울까. 거북이와 경주해야 하는 토끼도 마찬가지다. 태생적으로 느린 거북이를 압도적인 시간차로 승리한다는 건 수치다. 자존심에 관한 문제다. 더욱이 그것이 약한 거북이에게 패배의 아픔을 안겨주는 일이라면 잔인한 승리일 뿐이다. 그래도 토끼와 거북이는 경주를 해야 하는가.
이 세상에 ‘토끼와 거북이’로 태어난 이상 포기할 수 없다고 하는 이들도 있겠다. 어차피 세상은 냉엄한 경쟁사회가 아니냐며 경주를 부추기는 이들도 있겠다. 경쟁 논리의 세상에서는 권모술수가 발휘될수록 경주가 아름답다며 찬미하는 이들도 있겠다.

 

 

 

그러나 한번 비겁한 방식으로 이겨본 경험이 있는 거북이라면 경쟁이라는 이름의 경주를 아예 포기할 것이다. ‘이겼다’는 것 외에 얻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경주가 내면을 살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승부욕의 벼랑으로 자신을 내몰 뿐이기 때문이다.

한번 냉정히 생각해 보자. 이긴다는 것이 거북이들의 인생에 그토록 절대적인가.

 

 

 

이제 거북이는 자신의 보폭에 맞는 인생을 즐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주를 거부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경주는 강자인 토끼에게도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만다. 2만 불 시대에 진입했다고들 한다. 그렇게 쉬지 않고 결승점을 달려와 ‘거북이’가 더 행복해진 건 무엇인가. ‘이겼다’는 그것만으로 사람은 행복할 수 있을까.

 

(교차로신문 2011년 5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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