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삶의 즐거움
권영상
“북어 세 마리 주세요.”
재래시장을 지나는데 생선가게 기둥에 매달린 북어가 눈에 띄었다.
“콩나물 넣고 북엇국 끓여 드시면 몸에 화기가 돌지요.”
나이 든 주인아주머니가 몸빼바지를 추스르며 일어나 북어를 내린다. 그걸 도마 위에 뉘여 목장갑 낀 손으로 능란하게 도막을 낸다. 그러더니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 내 앞에 내민다.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드리는 북어값을 받아 앞치마 주머니에 밀어 넣는다.
“저녁에 시원하게 해 자시우.”
세상 바람에 길든 목소리다. 투박하지만 은근히 고마운 데가 있다. 격조는 없어도 마음에 깊이 스며드는 목소리다. 돌아서다가 다시 그분을 본다. 북어를 내리치던 손이며, 헐렁한 몸빼바지며 빛 바랜 털모자가 정겹다. 정겹다 못해 아름답다. 상냥하고, 맑고 투명한 목소리 대신 그 질박하고 거친 목소리가 순간 나를 따뜻하게 한다.
북어를 들고 걸어오며 목소리에 대한 나의 오랜 편견이 무너지는 걸 느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길거리 시장에 나와 생선을 팔고, 과일을 팔고, 신발이며, 감자며, 배추, 무와 싸구려 옷과 선지국과 해장국을 말아 파는 이들의 삶의 고초를 안다. 그래서 그런 걸까. 그들의 투박한 목소리가 새삼 아름답게 느껴진다.
남대문 시장에서도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편견이 변하는 걸 느낀다.
넘쳐나는 인파를 뚫고 음식을 나르는 아줌마들을 볼 때가 그렇다. 그들은 층층이 올려놓은 음식 그릇을 머리에 이고 가랑잎처럼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간다. 언제부터인지 그들의 걸음걸이가 좋아 보인다.
한 손으로 머리 위의 점심 그릇을 잡고, 또 한 손으로 휘휘휘 손을 내두르며 걷는 걸음걸이. 그 매임없는 걸음걸이가 좋다.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엉덩이를 실룩대며, 품격보다는 몸이 가는 대로 몸의 리듬을 유지하며 가쁘게 달려나가는 모습은 매력적이다.
세상 어떤 이들의 걸음걸이가 이처럼 힘차고 거침없을까.
그들에겐 하이힐이 필요없다. 몸의 근육을 숨겨주는 헐렁한 옷과 발 편한 운동화면 된다. 그들의 걸음걸이 뒤엔 2만원이든 3만원이든 하루치의 몸을 놀린 땀이 숨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일신을 치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루치의 밥과 잠자리와 소박한 꿈을 위한 것이다. 그것 이외의 것은 거기에 없다. 그러기에 그들의 걸음걸이는 가장 단순하며 가장 솔직한 몸짓이다. 고급 하이힐과 고급 의상으로 포장된 과장과 위선이 없다.
전화대며 통나무 의자를 손수 만들어 공으로 선물하는 이를 안다. 그는 자신의 소목기술을 그런 식으로 쓴다. 그런데도 그 장년의 사내는 공치사를 못 듣는다. 수다 때문이다. 그를 아는 이들은 다들 그런다. 제 공덕을 제 수다로 까먹고 만다고.
하지만 얼마 전에 안 일이다. 그가 서른 후반에 홀아비가 되어 혼자 자식 둘을 키워내며 산다는 사실을. 그러고 보면 그의 수다는 자신을 살려내는 수다였다. 서러운 눈물을 날숨으로 토해내는 수다였다. 남에게 공치사는 못 들어도 홀아비인 저를 살려내는 수다. 반듯하고, 경우있게 하는 말도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홀아비의 수다가 더 생명성에 가깝다. 이득을 따지지 않는 말이니 더 솔직하다.
얼굴도 만들어지고, 몸매도 만들어지는 가공과 위선의 사회에 살아 그런 모양이다. 가공된 것보다 오히려 투박하여도 거짓없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 그런 까닭에 성형투성이 ‘미인’들이 등장하는 안방 드라마보다 길거리 사람들의 솔직한 아름다움이 더 좋다.
(교차로신문 2011년 5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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