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교만한 자의 징벌

권영상 2013. 7. 31. 16:27

 

 

교만한 자의 징벌

권영상

 

 

 

 

올해로 농사를 지은 지 5년이다.

주말농장을 얻어 봄에는 상추, 쑥갓, 부추 등을, 가을에는 무,배추, 갓, 쪽파 등을 심었다. 첫해는 정말이지 흙에 대한 애정이 자식을 향한 애정 못지 않았다. 물도 넉넉히 날라다 주었다. 물뿌리개로 열번을 주면 될 일을 한번 더 주고, 또 한번 더 주고, 인제 그만 가자 하면서 또 더 주고 그랬다.

물만이 아니다. 집에서 나는 음식물 찌꺼기들은 화분에다 썩혀 밭에다 내었다. 낙엽 한 장도 아까워 밭에 묻었다.

정성을 다해서 그랬는지 작물들은 잘 자라 주었다. 상추를 심으면 상추가, 옥수수를 심으면 옥수수가, 배추를 심으면 배추가 주말농장의 다른 밭들보다 월등히 잘 자랐다. 그것에 나는 자부심을 가졌다.

내 밭의 일이 다 끝나면 나는 여유롭게 이웃밭들을 구경삼아 돌아다녔다. 남의 밭 고추를 보면서 포기 사이가 뵈네 뜨네 하거나 토마토 앞에서는 곁가지 순을 따줘라 말아라 했다. 밭에다 몇 가지 작물만 단순하게 심지 말고, 두루두루 아무 계절에나 먹을 수 있는 작물들을 골고루, 다품종식으로 심으라는 충고도 했다.

그건 제 밭의 농사를 제법 잘 지어놓은 나만의 특권이었다. 나는 그 특권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면 그들은 내 농사 솜씨를 보러 내 밭을 찾았다. 그때마다 그들은 놀란다.

 

 

 

 

“야아, 대단하시네요! 완전 프로군요.”

나는 그런 찬사를 받는다. 그러면 나는 얼른 고맙다는 말을 안 한다. 그들이 멋지게 키워올린 내 작물들을 오래 바라보며 감상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내가 키운 작물 앞에서 놀라는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나의 자만을 즐긴다.

“이제 몇 년 차시지요?”

그들은 부러운 눈을 하고 내게 묻는다.

그러면 나는 겸손하게 “이제 삼년밖에 안됐어요.” 그러며 가능한한 농사지은 햇수를 한 해라도 줄인다. 그래야 그들이 더 놀라고 나도 더 실력을 과시할 수 있으니까.

지난 4년동안 나는 모범경작생이었다. 그러면서 또한 나는 오만해졌다.

 

그런데 5년이 문제다.

직장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5년이 문제다. 5년이 되면 제가 하는 일에 자만심을 가질 때다. 이제 그 일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나만큼 아는 사람 없다며 뻐긴다.

‘아, 권태로워! 직장의 일이라는 건 너무나 단순해’ 하며.

그 오랜 학교 공부를 한데 대해 회의를 느낀다. 그때가 입사 후 5년, 무서운 자만에 빠질 때다. 나의 주말농장의 농사 실력도 5년이 되는 올해, 교만에 빠졌다.

농사?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이미 나대로 농사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믿었다.

 

 

 

드디어 ‘농사도 요령이다.’는 판단하에 매주 가던 일을 격주로 갔다. 물뿌리개로 수십 번씩 주던 물도 포기하고 하늘이 내려주는 비로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했다. 그게 자연스런 이치가 아니냐면서.

그 교만함 때문인가. 올해 김장은 글렀다. 폐농 수준이다. 주말농장 50여 명의 밭 중에 내가 가꾼 김장이 제일 밑이다. 남들 배추는 탄탄하게 알이 배어가는데 내것은 아직도 봄배추 수준이다. 무는 열무 수준이고.

다른 이들 보기에 창피해 가만히 밭에 숨어들어가 도둑처럼 늦은 물을 준다. 그런 때에 꼭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근데 이 밭 김장은 꼴이 말이 아니네!”

한심하다는 듯 빈정댄다.

그런 말을 들으면 미친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교만에 빠진 자의 징벌이 이렇게 잔혹하다.

 

(교차로신문 2010년 11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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