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행복과 불행의 차이

권영상 2013. 7. 31. 16:45

 

 

 

 

 

행복과 불행의 차이

권영상

 

 

 

 

작은형이 돌아가셨다.
일흔일곱. 갑작스럽게 다가온 암이 작은형의 목숨을 앗아갔다. 암 선고 소식을 듣자, 나는 작은형을 보러 강릉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조카도 내려와 병석을 지키고 있었다.

형은 환자라기보다 늘 지켜보던 그 모습 그대로 건강했다. 단단한 이마와 잘 생긴 얼굴, 농사일로 다져진 균형잡힌 체격과 험하지만 탄탄한 손. 달라진 모습이 있다면 옆구리에 차고 있는 호스였다. 호스 끝에는 제 기능을 못하는 담즙을 뽑아내는 비닐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그러지 말고 서울로 올라가 한번 치료를 받아 봅시다.”

나는 그 말을 했다.

내가 형을 찾아간 것도 실은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옮겨와 좋은 치료를 받아보자고 권하러 간 거였다. 큰 조카도 서울에서 제법 탄탄한 직장을 가지고 있고, 또 나도 있고, 작은누나도 있고. 형님이 올라온 대서 부담을 느낄 일은 전혀 없었다.
“얼른 결정을 해요. 하루가 급한데”
나는 또다시 재촉했다.

내가 또 하나 재촉하는 데는 작은형이 평생을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살아 왔다는 점이다. 형은 일곱 살 때에 실명을 하여 너무도 힘든 세월을 살았다. 눈 뜨고 사셨다면 일흔 일곱이란 나이가 적은 나이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형에게 있어 일흔일곱은 눈뜨고 산 일 년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내게 있었다.

 


 

작은형은 실명의 몸으로 아들 둘과 딸 둘을 키웠다. 그 자식들을 출가시킬 때마다 눈이 멀다는 이유로 적잖이 마음 고생을 했다. 얼마나 그 고충이 심했면 형이 내게 어느 밤 전화를 해왔었다.
“혹시 서울에 내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병원이 있는지 좀 알아봐 주게.”
그러는 형님의 목소리에 눈물이 배어 있었다.

쉰을 훨씬 넘긴 형의 눈을 고칠 수 있는 병원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사리에 밝은 형이 그 일을 모를 리 없었다. 나는 그러마 하고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재생이 어렵다는 말만 들었다.

작은형은 오래 전에 빛을 포기하였다. 그렇지만 주변 일이란건 그렇지 못했다. 그런저런 고충을 겪으면서 형은 조카들을 훌륭히 다 출가시켰다.

 

 

 

“목숨을 연명하고 싶지는 않네.”
형은 나의 재촉에 뜻밖에도 그런 대답을 했다.
나는 또다시 수차례나 수술을 권했지만 작은형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형은 그렇게 석 달을 더 살고는 그만 원하던 대로 운명했다. 그 사이에 한두 번을 더 만났지만 형은 담담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고, 살아온 삶에 대한 애증도 없어 보였다.
형을 보내면서 나는 그간의, 내가 아는 형에 대한 추억 때문에 슬펐다. 작은형은 한 치의 빛도 못 보고 떠났다. 자식들이며 손자들의 얼굴도 단 한번 보지 못하고 떠나는 형 때문에 살아있는 우리들이 실은 더 괴로웠다.

 

삼오제를 마치느라 나중에 서울로 돌아온 조카에게 위로의 전화를 걸었다. 내 전화를 받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조카가 운명하기 전날, 아버지가 하셨다는 말을 전했다.
“제 손을 잡고 그간 행복하게 살았다, 그 말씀을 하셨어요.”
그랬다. 너무도 뜻밖이었다. 우리가 작은형과의 작별을 괴로워하고 있을 때 작은형은 그런 작별의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작은형의 일생을 서럽고도 불행한 모서리가 많은 삶이라 생각했는데 형은 그 인생을 행복으로 받아들였다. 행복은 뭐고, 불행은 또 무엇인가. 작은형은 그 질문을 우리 앞에 던져놓고 떠나셨다.

 

(교차로신문 2010년 12월 3일자)

 

 

'오동나무 연재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장 뒤에 숨은 유머  (0) 2013.08.02
엄마, 내 방 손대지마  (0) 2013.08.02
교만한 자의 징벌  (0) 2013.07.31
배낭에서 내려놓은 랜턴  (0) 2013.07.27
시달리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  (0) 2013.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