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도시로 끌려오는 소나무들

권영상 2013. 7. 26. 16:22

 

 

 

도시로 끌려오는 소나무들

권영상

 

 

 

 

 

가끔 길에서 대형 트럭에 실려오는 소나무들을 본다. 단근 작업이 된 소나무들이 쇠사슬에 또는 고무 타이어 줄에 묶여 마치 수형자 형국으로 실려온다. 저만한 나무가 되려면 족히 4,50년은 살았을 거다. 저들이 주로 강원도 산간에서 온다면 아침에 실려 무려 대여섯 시간을 끌려 왔을 것이다. 물론 그 일을 소나무가 자처했을 리 만무하다. 장사꾼이나 그걸 사려는 사람에 의해 끌려오는 게 분명하다.
아파트 재건축 붐을 타면서 강원도 산자락이나, 아담한 마을 앞에서 마을사람들과 일생을 살던 소나무들이 수난을 겪는다. 소나무 한 그루를 서울로 끌어와 아파트 마당에 심는데, 식재비용만 적게는 500만원에서 많게는 5,000만원이 든다고 한다. 소나무 꼴이 바르고 병충해 피해 없이 시원시원하게 잘 자란 4,50년생일수록 값이 더 나간다는 거다.

500가구 규모의 아파트에 소나무를 심으려면 소나무값만 30억. 이렇게 비용이 드는 데도 아파트 입주자들은 소나무를 많이 심어달라고 아우성이란다. 그래야 집값이 올라간단다.

 

 


 

그 때문에 아파트마다 소나무를 더 심으라는 주민들의 요구가 하늘을 찌르는 모양이다. 비용이 얼마나 들든 소나무 숲을 만들어 집값을 올려보자는 섬뜩한 생각은 특정한 사람들의 머리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도시 사람들의 생각이 다 그렇다는 거다.
고층 아파트 마당에 그럴 듯하게 심어놓은 소나무를 볼 때마다 그들의 생애가 너무도 눈물겹다. 나도 강원도의 산자락 소나무숲 마을에서 자랐다. 강원도, 특히 영동지방은 바람이 많다. 그 바람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마을 둘레에 소나무를 심었다. 그 소나무가 5,60년을 크는 동안 사람들은 바람없는 땅에서 살 수 있었다. 소나무 숲에 기대어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 숲길을 걸어 학교에 갔고, 그 그늘에서 지친 몸을 달랬다.

서른 살 나이에 나는 강원도를 떠났다. 내 스스로 떠나온 것도 있지만 일자리를 찾아 떠나왔다. 내가 일을 찾아 고향을 떠날 때 나와 함께 살던 소나무들은 떠나가던 나를 지켜봤다. 제 살던 집을 두고 떠나가는 것을. 그들을 두고 집을 떠날 때 나는 서러웠고, 서울에 와 살 때 나는 부모님 다음으로 고향의 소나무들을 그리워했다. 고향을 찾을 때마다 나를 반겨준 건 소나무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서 있어 주었고, 그들이 그 자리에 서 있어준 것만으로 나는 행복했다. 내게 있어 소나무는 고향의 다른 이름이다. 그들은 그런 나와의 사적인 인연도 가지고 있지만 이 땅의 역사도 기억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육이오 전란, 좌우익간의 갈등과 가뭄과 홍수와 산불. 그들은 강자의 총구에 죽어간 사람들이 저들의 발밑에 묻히는 것을 목격했고, 보릿고개도 기억한다. 그래서 소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다르다. 다른 나무들은 다 베어낼 수 있어도 소나무만은 베지 못했다. 그걸 베었다가 관의 힘에 잡혀가는 걸 나는 어렸을 적부터 보아왔다.

 


명절이나 마을 행사에 개나 돼지, 염소는 잡았어도 소는 못 잡듯이 소나무에도 쟁기를 대지 못했다. 소나무는 분명 사람대접을 받는 나무였다. 그런 소나무들이 이제는 값으로 매겨져 팔려나가는 세상이 되었다. 4,50년씩이나 살던 고향을 떠나가게 되었다. 마을을 떠나는 이들을 보낼 줄만 알던 그들이 이제 사람들의 손에 팔려 고향을 떠나는 신세가 되었다.
사람의 욕심이 지나쳐 바다를 옮겨놓겠다면 옮겨놓는 그런 세상이다. 저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고향을 지켜주는 마을 앞 그 멋들어진 방풍림까지 파헤쳐 오는 게 우리들이다. 자연 중심적인 세상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이 좋자고 하는 세상꼴이 됐다.
(교차로신문 2010년 10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