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네가 행복했으면.......이런 낙서

권영상 2013. 7. 3. 14:58

 

네가 행복했으면....... 이런 낙서

권영상

 

 

 

 

"오늘도 김주효 학교 안 왔네!"

 걱정스런 내 말에 아이들이 학교 오다 골목에서 주효를 봤다고 한다.

수업을 끝내고 서둘러 애들과 주효를 찾으러 동네 골목으로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우리는 골목을 훑어 나갔다. 그러나 주효가 골목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리 만무했다.

학원 시간에 쫓기는 아이들을 보내고 혼자 터덜터덜 골목길을 되짚어 올라왔다. 가파른 골목 언덕길을 걷는데 길가 전신주가 눈에 확, 들어왔다. 목 마른 사람 눈에 샘이 보인다고 거기 전신주에 ‘주효 짜증나’ 하는 낙서가 있었다. 나는 반갑게 다가갔다. 분명히 주효라는 이름이 굵은 연필 글씨로 쓰여 있다. 전신주가 서 있는 골목 안쪽 길로 나는 발길을 돌렸다. 주효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면 이쯤 어딘가가 주효가 노는 반경일 것 같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흔적을 찾으려고 천천히 벽을 훑었다. 주효와 상관없는 낙서들이긴 하지만 낙서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형 같은 여자애 그림이며, ‘이성남♡전예희’, ‘처음 느꼈던 그 설레임 조민제’ 등의 낙서도 눈에 띄었다. ‘류진석 바보’, ‘메롱’, ‘사랑해’, ‘씨발’, ‘섹스’…

나는 그런 낙서를 따라 자꾸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이 좁아질수록 낙서가 자주 보였다. 처마가 낮고, 바람벽이 낡아 떨어진 집 벽일수록 그랬다. 이젠 낙서가 없는 걸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이트 클럽 광고지와 용달 스티커 에 ‘영수 시로’ 이런 낙서가 있다. 나는 가만히 낙서를 바라보며 웃었다. ‘싫어’라는 말을 ‘시로’라고 썼다. 잘 구부려놓은 우리 말 느낌이 새롭다. 영수를 싫어한다기 보다 오히려 좋아한다는 느낌이 든다.

 

 


 

어느 막다른 집 대문 곁엔 이런 낙서도 있다.

‘삼춘네.’

삼촌집에 놀러 왔다가 삼촌이 좋아서, 또는 삼촌집을 찾지못할까 봐 해놓은 낙서 같다. 그 곁 꽤나 큰 하얀 벽엔 이런 낙서도 있다.

‘2+100=102’, ‘1000+5=1005’. 그리고 그 아래에 ‘내가 했어요.’ 라는 낙서.

나는 혼자 싱긋이 웃었다.

그걸 셈해놓고 스스로 얼마나 대견해 했을까. 그러니 제가 했다는 걸 꼭 밝히고 싶었을 테다. 그 ‘내’가 누구인지, 그 애가 ‘삼춘네’라고 쓴 아이인지, 괜히 착할 것 같은 그 아이가 보고 싶어진다.

 

 


주효를 찾겠다는 생각을 잊고, 나는 골목을 바꾸어 낙서를 따라 자꾸 안으로 들어갔다.

키 낮은 집 담장 위에 매직펜으로 쓴 이런 낙서가 있다.

‘가현 good love'.

사춘기에 접어든 여학생의 낙서가 아닐까. 그 곁에 그를 못잊어 그랬겠지. ‘가현이는 내 사랑 귀여오’가 있다. 그 곁에 누군가 다른 필체의 낙서가 또 있다. ‘가현2한테 안귀여봐.’ 초등학생들의 낙서에 비하면 마음의 깊이가 은은히 느껴진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골목길이 점점 가파르다.

골목이 끝나는 집 오래된 굴뚝에 ‘네가 행복했으면…’이란 화이트로 쓰여진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그 낙서 앞에 오래 머물렀다.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낙서도 있다니!

그 누군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헤어진 여자애일까. 아니면 남자애일까. 이쯤에 와 그 누군가의 행복을 빌어주고 떠나간 그 애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진다.

그 낙서 한 줄 때문에 이 가파른 골목, 조금은 힘들게 살아가는 이 골목 사람들이 날마다 행복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이 벌써 따스해진다.

가방을 챙겨들고 퇴근을 하며 주효를 다시 생각한다. 어쩌면 따뜻한 이 골목 아이들 때문에 자꾸 결석을 하는 건 아닐는지. 주효도 행복했으면… 금요일 오후의 하늘을 향해 기도해 본다.

 

(교차로신문 2009년 11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