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우정어린 거짓말

권영상 2013. 6. 10. 20:22

 

 

 

 

우정어린 거짓말

권영상

 

 

 

 

우리 반에 정기가 있다.

키가 작고 부산하다. 수업시간에도 한 자리에 가만 앉아 있지 못한다. 잠깐 눈을 돌리면 그 사이 책상 밑으로 내려가 엉금엉금 기어다닌다. 그냥 기는 게 아니다. 남의 다리를 긁거나 꼬집는다. 아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인다. 그때쯤이면 정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난다. 나는 그가 제 잘못을 깨달으라고 뒷자리에 옮겨 앉혔다.

한 달이 다 되었는데도 그에게 변한 게 없었다.

그렇기는 해도 이제는 그를 다시 맨 앞의 제 키에 맞는 본디의 자리로 옮겨주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교실 뒷편의 엎질러진 쓰레기를 정기가 비로 쓸고 있었다.

나는 이 때다 싶게 그를 칭찬하고 제자리에 옮겨 앉혔다. 그와 동시에 그가 전과 다른 모습의 정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며칠 전부터 나는 호세이니의 장편 ‘연을 쫓는 아이’를 만나고 있었다.

거기엔 어린 아미르와 한 살 차이 밖에 안 나는 그의 하인 하산이 등장한다. 하산은 주인의 아들인 아미르에게 헌신한다. 그것은 사회 제도가 갖는 신분 이상의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우정과 헌신이었다.

그러나 아미르는 언제나 소심하다. 하산이 마을의 주먹잡이 아세프에게 동성 강요를 당하는 걸 보면서도 그는 그의 폭력이 두려워 못 본 체 피하고 말았다. 그 후, 아미르는 늘 하산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산다.

 

 

 

아미르의 생일,

아미르는 선물받은 돈과 아버지가 해 준 시계를 하산의 방에 감추어 놓고 아버지에게 하산이 자신의 선물을 훔쳐갔다고 거짓말을 한다. 하산을 쫓아내지 않고는 진실 앞에 당당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가여웠기 때문이다.

돈과 시계를 하산의 방에서 찾아낸 아버지가 하산에게 물었다.

“네가 정말 돈을 훔쳤느냐? 시계도?”

어린 하인이 대답하기엔 너무도 잔인한 질문이었다. 더구나 이 일이 한 번도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아미르의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네”

급기야 하산이 대답했다.

하산은 아미르를 위해 거짓 대답을 했던 것이다.

그 일로 인해 하산은 눈물을 삼키며 아미르의 집을 떠난다. 하산은 거짓말이라는 방식으로 자신을 버리고, 우정과 헌신을 택했다.

거짓말이란 때로 비장한 도덕일 수 있다.

그것이 남을 위해 어떻게 쓰여지느냐에 따라 아름다울 수도 있고, 때로 감동적일 수도 있다.

 

 

 

그날 오후, 국어 시간이었다.

“정기는 아침 청소도 스스로 잘 했으니 숙제도 잘 해 왔겠지?”

정기는 나의 칭찬을 잊지 않고 있었다.

“해 왔습니다.”

정기가 반쯤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나는 앞자리에 옮겨앉은 정기에게 어떻게든 자신의 모습이 달라졌다는 걸 한번 더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발표를 하려고 정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그의 책을 넘겨다 봤다. 거기엔 숙제의 흔적이라곤 한 군데도 없었다.

“잘 해 왔구나. 그러니 읽지 말고 간단히 대답해 보렴.”

나는 그를 위해 거짓말을 했다.

 

 

 

그 순간, 그가 내 말뜻을 읽은 게 분명했다.

황급히 몇 마디를 하고 앉았다.

난데없이 박수가 터졌다. 지켜보던 아이들이 나와 정기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짓말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우리 반 32명은 모두 정기를 위해 거짓말을 해준 공범자들이다.

코 끝이 찡 했다. 이 땅에 이런 우정어린 거짓말이 아직도 살아있다니!

(교차로신문 2008년 5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