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오동나무꽃에서 배우는 삶의 여유

권영상 2013. 6. 9. 23:15

 

 

 

 

 

오동나무꽃에서 배우는 삶의 여유

권영상

 

 

 

4월부터다.

주말을 맞아도 그게 나의 주말이 아니다. 주말마다 예식장을 순례하는 날이 되고 말았다. 모처럼 한가한 주말 아침. 화분에 물을 주고, 묵은 우편물을 열어보고, 베란다 청소며 재활용품 분류며 방청소를 하고 다시 시계를 봤다. 오전 시간이 다 간다. 버릇처럼 이러는 내가 참 싫다. 이런 날 좀 느긋하게 일어나면 어디가 덧나는지.

이게 아니다 싶어 나는 게으를 작정을 한 사람처럼 씨디 한장을 꺼내들었다. 음악을 들어본지가 언제인지. 일년? 아니다. 그보다 더 훨씬 오래된 듯하다. 어떻게 음악 한곡 여유롭게 들어볼 시간도 없이 살아낼 수 있는지….

 

 

허겁지겁 살아온 삶이 밉기까지 하다.

듣고 싶은 음악 하나 못 듣고 사나 싶은 오기가 일어난다.

씨디를 넣고 전원을 켰다. 은은히 밀려나오는 바이올린과 함께 내 가슴이 숲속의 문처럼 열리기 시작했다. 창밖에서 머물던 4월 연둣빛이 호밀밭에 부는 바람의 물결처럼 음악이 흐르는 방안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딱 2분.

2분이 지났을 때다.

틈날 때마다 음악 하나만이라도 내 뜻대로 듣고 살자는 다짐이 솟구쳤다. 이런 다짐들이 맹렬히 일어나는 건 또 어떤 수순을 위한 나의 불안일까. 아니나 다를까. 마음과는 달리 귀가 점차 음악의 바깥을 겉돌기 시작했다.

 “이럴 때가 아니잖아. 한가히 음악을 들을 게 아니라 감자씨 넣은 밭에 강낭콩을 심어야하고, 마트에 가 일주 일치 식품을 사와야지.”

생각이 거기에 가 닿자, 내 손은 잔인하게 전원의 스위치를 껐다.

 

 

 

5분을 못 넘기고 나는 바장거리는 내 일상으로 돌아왔다.

건너서는 안 될 경계를 건너고 온 밀항자처럼 나를 자책하며 밭으로 향했다.

아파트 마당을 나서는데 열린 창문으로 짙은 꽃향이 들어온다. 세탁소 담장 위에 오동나무꽃이 폈다. 5월에나 피는 꽃이 벌써 피고 있다. 고향, 시골집에도 마당귀에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두 아름드리 큰 나무였다. 아버지께서 분가해 나오실 때 마당귀에 심은 거라 하셨다.

예전, 어른들 말로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으면 선산에 잣나무를 심는다 했다. 딸자식을 키워 시집을 보내려면 25.6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다. 그 25.6을 내다보며 나무를 심는 옛사람들의 느긋하고도 여유로운 마음은 어디에서 왔을까.

 

 

느긋하고 여유롭기야 오동나무꽃만한 것도 없다. 담벼락 양지짝에 제비꽃이며 민들레가 피고, 살구꽃이며 복숭아꽃이 피었다 지도록 감감하다. 산벚꽃이며 함박꽃이 왔다 가고, 이제 봄이 다 끝났다 하는 때에 게으른 콘트라베이스처럼 퉁명하게 피는 게 오동나무꽃이다. 한껏 여유를 부리며 오는 만큼 향기 또한 눈물을 자극할 만큼 진하다. 아버지는 그러셨다. 오동나무꽃 향기에 취해 집으로 들어오던 고양이가 쓰러지는 걸 봤다고.

 

 

오동나무꽃을 보면 여유를 부리는 시간이 아까운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여유가 인생의 향기를 익어가게 만든다. 

 ‘시간, 시간’ 하며 시간에 쫓겨사는 버릇은 이제 몸에 밴 병인 듯 싶다. 그러나 오늘만은 억지를 써가며 4평 작은 밭에 강낭콩을 심고, 그것들이 자라고, 꽃 피우고, 열매 맺을 때를 한가히 생각해 본다.

남들 다 바쁘게 사는 데 사람이 되어가지고 어떻게 저만 바쁘지 않게 살 수 있을까. 그렇기는 해도 가끔 억지를 부려서라도 바쁜 일상의 틈을 흔들어 보자. 분명 빈 자리가 있을 테다.

(교차로신문 2008년 5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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