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저의 마지막 공부였잖아요
권영상
퇴근 무렵이었다.
막 가방을 챙기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저쪽에서 ‘혹시…’하면서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물었다. 그렇다는 말에 ‘그럼, 저를 아시나 모르겠네요?’ 그러며 그가 제 이름을 간신히 밝혔다.
이찬주였다. 알다마다.
나는 대뜸 잠깐이라도 좋으니 만나자며 전화를 끊고 일어섰다.
그가 중학교 1학년 때인 22년전의 일이다.
나는 그 무렵 그의 담임이었고, 시를 좋아하는 아이들과 ‘볍씨’라는 시 동아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1학년이었지만 다른 누구보다 생각이 깊고 시도 잘 썼다.
그러나 그는 모임을 가질 때면 늘 혼자 떨어져 앉았고, 공원에 함께 산책을 갈 때에도 혼자 걸었다.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려고 하면 피하듯 서너 발짝 물러나곤 했다.
그때마다 내가 알게 된 게 있었다.
그의 옷에서 오줌 절은 내가 난다는 거였다.
그 때문이었을거다. 그는 누구와도 가까이 하지 않았고, 내게도 거리를 두었다.
그 무렵 그의 아버지가 담임인 나를 찾아오셨다.
“찬주란 놈 말이지요. 에미를 잃고 새 엄마 밑에서 크고 있구먼요.”
목수 일을 하고 있다는 아버지의 말투는 투박했다.
주로 지방을 다니는 바람에 한 달에 한 두 번 집에 들른다는 거였다.
나는 그때에야 그가 왜 밤이면 바지에 오줌을 누고, 생각 깊은 시를 쓰는지를 대강 알 것 같았다. 그에겐 무엇보다 엄마의 사랑이 필요했던 거다.
그 후에도 우리는 열심히 ‘볍씨’를 키워갔고, 그 결실을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그때마다 찬주가 쓴 시는 기슭에 숨어 흐르는 샘처럼 맑고 깊었다.
나는 시가 그를 위로하는 좋은 동무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끝내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못 한 채 졸업을 하고 말았다. 그를 보내고도 나는 가끔 그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시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신림동 어느 은행 앞에서 만난 나는 그와 가까운 음식점으로 갔다.
고개를 반쯤 숙인 채 간신히 말하는 모습이 그때와 똑 같았다. 소목일을 하고 있다는 그의 코밑은 면도를 했어도 거뭇했다. 술 한잔을 들자,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때, 말입니다."
그는 거기에서 또 말을 끊었다.
그때라면 아마 ‘볍씨’ 활동을 할 때를 말하는 듯 했다.
“그때, 선생님께선 세상의 모든 예술엔 외로움이 묻어있다고 하셨어요.”
다 잊어버린 내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 말을 했다면 새 엄마 밑에서 사는 그를 위로하기 위한 말 같았다.
어떻게 그 말을 지금껏 기억하느냐는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게 저의 마지막 공부였잖아요.”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마음이 찡, 하고 아팠다.
“그 말씀을 믿고 문짝을 만들 때도 외로움이 배어 있게 만들고 있어요. 저혼자 밤을 지키는 놈이잖아요, 문이란 게.”
그는 벌써 서른 다섯을 먹은 사내가 되어 있었다.
서툰 말이지만 그의 말엔 시처럼 깊은 울림이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일어설 때 결혼을 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없이 크는 놈 저 하나면 되지요 뭐.”
그러며 서둘러 악수를 하려고 그가 두 손을 내밀었다.
작별을 하고 돌아오는 발길이 내내 무거웠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일이 행복하기도 하지만 우울하게 할 때도 많다.
(교차로신문 2008년 5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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